과거 초등학교 교과서에는 '동창이 밝았느냐'라는 시조가 실려 있었다. 남구만南九萬·1629~1711)이 저자로, 목가적이면서 권농(勸農)의 의미로 해석됐다. 남구만이 이 시조를 지은 동기는 완전히 규명되지 않고 있다. 1689년 그는 숙종의 뜻을 거스르고 희빈장씨의 소생인 균(均)을 세자로 책봉하는 것에 대해 반대했다. 역린을 건드린 것으로, 그는 지금의 강원도 동해시로 유배됐다. 동해 사람들은 이때 그 유명한 '東窓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 소치는 아이는 상기 아니 일었느냐 / 재 너머 사래 긴 밭을 언제 갈려 하느니' 내용의 시조가 지어졌다고 주장하고 있다. 반면 남구만 사당이 남아 있는 경기도 용인시에서는 낙향했을 때 '동창이 밝았느냐'를 지었다고 주장, 역시 같은 내용의 시조비를 세웠다. 이와는 별개로 1920년대까지 창으로 불려진 내용은 요즘 교과서에 실린 것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동아일보 1929년 9월 29일자 시조 소개란에 실린 내용이다. '東窓이 밝았느냐 노고질이 우지진다 / 소치는 아희놈은 상기아니 일엇느냐 / 뒷뫼에 사래 긴 밧흘 언제 갈려 하느니.' '노고지리'를 '노고질', '아이'를 '아희놈', '재 너머'를 '뒷뫼'로 표
괴산군 칠성면의 산막이 옛길이 큰 인기를 얻고 있다. 괴산군에 따르면 주말이면 평균 1천500~1만대의 승용차가 산막이 옛길을 찾고 있다. 따라서 이를 사람수로 따지면 주말평균 5천~1만명이 산악이 옛길을 찾고 있는 셈이 된다. 산막이 옛길은 칠성댐 건너편인 괴산 칠성면 외사리 사오랑 마을에서 칠성호를 따라 남쪽 방향으로 시작된다. 약 3㎞ 정도의 거리로, 옛길 끝은 칠성면 사은리 '산막이' 마을이 된다. 마치 영월 청령포를 연상시키는 산막이 마을에는 과거 분청사기 가마가 위치했고, 이를 굽던 도공들은 가마 옆에 산막을 치고 기거했다. 산막이라는 마을 이름은 여기서 유래했다. 따라서 댐 담수로 위치가 위로 올라오기는 했지만, 지금의 산막이 마을 옛길은 과거 도공들이 왕래하던 길이었다. 그 끝에 노수신(盧守愼·1515~1590) 적소(유배지)가 위치하고 있다. ◇고행의 상징 유배용어 장배, 위리안치, 절도안치, 본향안치, 적소, 귀양살이 등 유배 용어는 그 표현이 다소 어려운 면이 있다. 장배( 杖配)는 유배를 그냥 떠나는 것이 아니라 곤장을 맞고 떠나는 것을 말한다. 죄의 경중에 따라 60~100대형이 추가됐다. 위리안치(圍籬安置)는 거주지를 제한하기 위해
◇마곡사 찾아가는 길봄 경치가 아름다운 마곡사를 찾았다. 공주에서 예산 유구 방면으로 32번 국도를 타고 가다가 사곡면에 이르고, 면소재지를 조금 벗어나면 우측으로 지방도로 이다. 여기서 다시 우측으로 회전하여 9km 정도 가면 마곡사 주차장이다. 주차장 위쪽에는 새로 만든 상가단지와 식당들이 질서있게 조성되어 관광객을 맞이한다.주차장 위 매표소에서 표를 사서 오르면 새로 만든 일주문이 '태화산 마곡사'의 현판을 달고 서있다.일주문에서 옆 계곡 계류, 갈대들이 나무들과 어울려진 길을 오르면 조선 숙종 때 사람인 송상기의 "유마곡사기"를 생각나게 한다. "절은 고갯마루에 있고, 10여 리 길가에 푸른 시냇물과 횐 바위가 있어 저절로 눈이 트였다."이 절경의 노래 속에 태화산이 마곡사를 앉고 있다. ◇마곡사의 옛 이야기들흐르는 계곡 바위 골 따라온 햇살이 마곡사를 비춰 준다.마곡사는 백제 무왕 때 자장율사가 창건하였다 한다.자장율사가 불법을 성취하려고 당나라에 건너가 수도 중 문수보살로부터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사와 사리 등과 깨달음을 전수 받아 귀국하였다 한다.이에 선덕여왕이 전이백결(田二百結)을 하사하고 전국에 사찰자리를 물색하게 하여 명당자리를 찾아다니던 중
누각(樓閣))과 정자(亭子)는 혼동되는 면이 있다. 한자가 둘의 차이점을 어느 정도 설명해 주고 있다. 누각 할 때의 '다락樓' 자는 마치 이층집 모습을 하고 있다. 바로 누각은 1층은 기둥만 세우고 2층에 마루를 깐 건축물로, 과거 관아에서 부속 건물로 짓는 경우가 많았다. 이에 비해 정자는 규모가 누각보다 작으면서 1층으로만 지어졌다. 과거 선비 개인의 피서나 음풍농월 장소로 주로 이용됐다. 누각과 정자는 다르면서 같은 점이 있다. 바로 벽과 문이 없다는 점이다. 이와 관련, 조선초기 문신 손순효(孫舜孝·1427∼1497)는 물재집에 '樓虛則能納萬景 心虛則能容衆物'이라는 문장을 남겼다. '누각은 비어 있어야 주변의 많은 경치를 불러들일 수 있고, 마음도 비워 있어야 여러 사물을 포용할 수 있다'라는 뜻이다. 우리 선조들은 취경(取景) 즉, 경치를 불러들이기 위해 누정(樓亭)에 벽과 문을 설치하지 않았다. 이는 '마음을 비워야 선행을 쌓을 수 있다'는 불교 선사상과 상통하는 면이 있다. ◇청풍과 한벽루의 역사 충숙왕 4년(1317) 우리고장 청풍현 출신의 '청공'(淸恭) 스님이 왕의 스승(王師)이 됐다. 바로 한벽루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건물로, 이
조선 정조 때 간행된 '戶口總數'(호구총수·1789)는 당시 전국의 호구와 인구수를 꽤나 정확히 기재해 놓았다. 호구총수에 따르면 당시 전국의 총호수는 1백75만2천837가구, 총인구는 7백40만3천606명이었다. 이를 행정 단위별로 살펴보면, 한양 18만9천153명, 평양 10만7천592명, 의주 8만9천970명, 충주 8만7천331명, 전주 7만2천505명, 경주 7만1천956명으로, 충주가 전국 4위를 차지하고 있다. 나머지는 상주, 진주, 길주, 해주, 대구,양주, 강계, 성천, 나주 등이 그 뒤를 이었다. 이처럼 충주가 대읍(大邑)의 규모를 지녔던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당시 충주목이 관할하던 행정 면적은 지금보다 훨씬 넓었다. 일제강점기 직전까지 존재했던 지도를 보면 충주의 서쪽 경계는 지금의 음성 금왕, 맹동면 일부까지, 동쪽은 백두대간에까지 이르렀다. 이 때문에 충주의 인구 규모는 대동지지가 간행된 1861년(철종1)에도 청주목 인구를 크게 앞선 것으로 나타난다. 당시 충주 인구는 9만7천명, 청주는 4만6천명이었던 것으로 고산자 김정호는 기록했다. 두번째 이유는 하항(河港) 목계나루의 번창에 있었다. ◇ 충주 조운(漕運)과 왜구 지방의 조
◇명부전의 목각상석종 부도에서 서쪽 끝에 자리한 명부전 목각상이 아름답다고 하여 이를 알현하기 위해 명부전으로 갔다. 명부전을 드니 새로 채색한 목각상이 있고 십여 년 전에 있었다는 시왕전에 열립하여 있었다는 작은 동자상은 보이지 않는다. 작은 동자들이 붓도 들고, 합장하며 서있던 작고 예뻤던 동자들, 댕기를 땋아 뒤로 늘이기도 하고, 쌍상투를 틀기도 하였다는 말을 듣고 찾아 갔으나 다른 곳에 보관 했는지 동자상이 보이지 않아 서운한 기분이 든다. 명부전은 지장보살을 봉안한 경우는 지장전이라고 부르고, 시왕을 모신 경우는 시왕전이라 부른다. 시왕은 지옥에서 죄의 경중을 정하는 염라대왕을 비롯한 열 명의 왕이다. 지장보살은 지옥의 공간인 명부세계의 주존이므로 지장전을 명부전이라고 한다.◇시인 묵객의 대장각비 서쪽 명부전에서 다시 석종부도 위 숲길을 따라 동쪽으로 조금 가면 대장각기비가 서있다. 신륵사의 뛰어난 풍광 때문인지 문장가나 시인 묵객들이 드나들었다. 그 중 대장각 짓기를 발언한 이곡이 있었고 그 발언을 성취한 이곡의 아들 목은 이색이 있었다. 나웅대사 석종비 보다 4년 늦은 1387년 대장각기 비문을 이숭인이 짓고 권주가 해서로 비문을 썼다. 원래 이
달천의 한자 표기는 '達川'이다. 여기서 '달래강'이라는 이름도 파생된 것으로 여겨진다. 달천의 지명 유래에 대해서는 '수달(獺)이 많이 살아서'와 '물맛이 달아서' 등 두가지 설이 존재하고 있다. 옛부터 달천수계에 수달이 많이 살았던 것으로 나타난다. 신증동국여지승람(1530)은 토산조에서 당시 충주에서 많이 나는 것으로 철, 해송자(잣), 송이, 활석(일명 곱돌), 수달 등 5가지를 적었다. 후자에 대한 근거는 신증동국여지승람과 택리지에 함께 나온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달천의 물맛에 대해 '본조(本朝)의 이행(李行)이 능히 물맛을 변별하는데, 달천 물을 제일이라 하여 마시기를 좋아하였다'(사진 참조)라고 적었다. 택리지는 충주목 조에서 '임진년에 명나라 장수가 달천을 지나다가 물맛을 보고 '(중국) 여산(廬山) 폭포의 물맛과 같다고 했다. 고을이 한강 상류에 있어서 물길로 오가기가 편리하므로 서울의 사대부들이 예부터 여기에 많이 살았다'라고 적었다. 이처럼 달천은 예로부터 물이 매우 맑았다. 그러나 청정수가 흐르던 달천은 1592년 피로 물들었다. 한국 전란사 중 가장 참혹한 패배가 이곳에서 일어났다. ◇신립은 왜 새재에 진을 치지 않았나 1592년 4월
◇대들보 없는 조사당 다층 석탑에서 극락전 좌측으로 돌아가면 보물 제180호인 조사당이 서있다. 조사당에 나웅, 지공, 무학대사의 초상이 모셔져 있었는데 도난을 방지하기 위하여 영정을 다른 곳으로 옮겨 보관하고 지금은 그 영정을 사진으로 찍어 액자에 넣어 조사당에 모셨다.조사당은 대들보가 없는 팔작지붕으로 정면 1칸 측면 2칸의 아담하고 예쁜 건물로 조선 태조가 무학대사, 지공, 나웅화상을 추모하기 위하여 지었다 한다.정면에 띠살문늬, 분합문늬 6짝 문을 달아 벽체에 고정하고 측면 한 짝에 정자 문살 문을 달아 출입문으로 사용하고 3면에는 모두 벽을 둘렸다.내외 이출목 다포계 공포형식을 하고 내부를 우물반자로 장식한 통칸 구조를 한 건물 이다.장대석 낮은 기단 위에 초석을 놓고 기둥을 세웠는데 가운데 기둥을 세우지 않아 대들보가 없다. 측면 간주에 의해서 그 위 대들보가 아닌 대량이 건너가 네 모서리의 추녀 끝을 받치는 재목을 만나 건물을 가구 하였다.조사당 앞에 향나무가 서있는데 600년의 수령으로 무학대사가 은사 나웅스님을 추모하여 심었다 한다. 이는 스승을 그리워하는 제자의 마음으로 후세 제자들의 지표가 되어 오늘도 향나무가 푸르게 서있다.◇조선 초기…
인류의 에너지소비가 날로 증가함에 따라 지구는 자원고갈의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현재 에너지 자원의 주종을 차지하고 있는 석유, 석탄, 천연가스의 경우 경제적으로 채굴이 가능한 매장량은 각각 40년, 230년, 65년 정도로 추정되고 있다.또 화석연료의 사용에 따른 대기오염을 비롯한 환경문제는 인류의 성장잠재력을 가로 막고 있다.지구온난화로 대표되는 지구환경문제와 자원에너지문제의 해결을 위해 전세계는 신재생에너지 개발이 박차를 가하고 있다.신재생에너지란 기존의 화석연료를 변환시켜 이용하거나 햇빛, 물, 지열, 강수, 생물 유기체 등을 포함하는 재생 가능한 에너지를 변환시켜 이용하는 에너지로 총 11개 분야가 지정(신에너지 및 재생에너지 개발·용도·보급 촉진법 제2조)돼 있다.신재생에너지의 특징은 △연구개발에 의해 확보가 가능한 기술주도형 자원이다. △지구 온난화가스 발생의 85%가 화석연료 사용에 기인한다는 점에서 환경친화적 자원이다. △항구적으로 재생 가능한 비고갈성 자원이다. △장기적인 선행투자와 정부지원이 필요한 공공성이 강한 미래에너지라는 점이 꼽히고 있다.특히 신재생에너지 가운데 태양광산업은 여타 에너지보다 청정하며, 무한 재생가능한 미래의 에너지원
충북도내 시군 중 한시가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곳은 최북단 단양이다. 단양문화원이 조사를 한 결과, 무려 130여수에 달하고 있다. 이들 한시의 대부분은 단양팔경 등 명승을 노래했다. 퇴계 이황, 추사 김정희 등의 작품이 대표적인 경우에 해당한다. 흔치 않게 유배시를 남긴 인물도 있다. 정철(鄭澈·1536∼1593)과 더불어 조선 시가(詩歌)의 쌍벽을 이루고 있는 고산 윤선도(尹善道·1587~1671)다. 그는 85살 생애를 살면서 14년은 유배지, 19년은 은거지, 나머지 8년은 관직에 몸을 담았다. 윤선도는 이 기간중 세 차례의 유배와 두 차례의 이배(유배지를 옮김)를 당해야 했다. 고산은 이때 우리고장 단양을 지나며 '歇馬孔巖'(헐마공암)과 '죽령도중'(竹嶺道中) 등 두 편의 한시를 남겼다. ◇14년을 유배지에서 살다 윤선도는 1616년(광해군 8) 일개 성균관유생 신분으로 이이첨(李爾瞻)·유희분(柳希奮)의 죄상을 격렬하게 규탄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과거가 공정하지 못하다는 말은 오늘날 피할 수 없는 일상적인 이야기거리입니다. 그런데도 이이첨이 또한 감히 변명을 하고 있으니 신은 삼가 통분스럽게 생각합니다.'- 당시 이이첨은 일인지상의 최고 권력자였다
단양 도담삼봉(국가명승 제 44호)은 카르스트 지형이 만들어낸 절경이다. 주변의 석회암지대는 하천과 지하수 등에 의해 모두 깎여나갔다. 지질학 용어로 용식(溶蝕) 현상이다. 반면 도담의 세 봉우리는 석회암이 아니기 때문에 지금의 원추 모양을 계속 유지하고 있다. 강 안에 '바위섬'(巖島)이 존재하는 곳은 국내에서 이곳이 거의 유일하다. 도담삼봉의 이같은 명승성은 역사적으로 '에피소드 공간'이 되기에 충분했다. 그것도 단색이 아닌 다원색이었다. ◇택리지도 장문으로 언급 이중환(李重煥·1690~1752)은 숙종~영조 연간을 산 인물이다. 그는 택리지에서 단양을 '들판은 없지만, 강과 시내, 바위와 골의 홀륭한 경치가 있다'(無十里野有江溪巖洞之勝世)라고 적었다. 또 '이담삼암'(二潭三巖)이라는 표현으로 단양 전체의 명승성을 함축했다. 이담은 2개의 못이라는 뜻으로 구담과 도담을, 3개의 바위를 의미하는 삼암은 상선암·중선암·하선암을 의미한다. 그는 도담삼봉에 대해 돌로 인위적으로 쌓았다는 뜻인 '석가산 같다'고 표현했다. '강물이 휘돌아 가면서 모여 깊고 넓다. 물 가운데 세 개의 돌봉우리가 각각 떨어져 한 줄로 선 것이 활줄같이 곧으며 쪼아서 새긴 것이 기이하
◇홍건적이 침입하다머리에 붉은 두건을 써 이름이 붙여진 홍건족은 고려를 노략질하기 위해 1차(1359년·공민왕8), 2차(1361년·공민왕 11) 등 두 차례에 걸쳐 한반도를 침입했다. 1차 때는 평안도 함종까지 진출했으나 고려군의 반격으로 퇴각했다. 2차 때는 10만여명의 대군이 침입했다. 공민왕은 개성의 마지막 방어선인 절령(일명 자비령·개성~평양 중간)이 돌파를 당하자 남쪽으로의 몽진(蒙塵)에 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몽진은 왕의 피난길을 의미하는 표현으로, 본래는 '먼지를 뒤집어 쓴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공민왕 일행이 지금의 경기도 땅에 들어서자 우리고장 충주, 청주목사 등이 잇따라 알현했다. '분수원(焚修院) )에 이르니 안렴사 안종원 충주목사 박희(朴曦)가 와서 알현하고 드디어 영서역(迎曙驛 양주에 이르니 남경유수 최인원(崔仁遠), 청주 목사 김성갑(金成甲)이 와서 알현하였다.'- ◇충주를 경유하다 고려 수도인 개성은 공민왕이 이천현을 경유할 때 홍건적에게 완전히 함락됐다. 이때 천인공로할 만행이 저질러졌다. '우설(雨雪)이 내리는데 어가가 이천현에 이르니 어의가 젖어 얼어서 섶을 태워 스스로 따뜻하게 하였다. 이날에 적이 경성을 함락하고 유
◇고종황제의 비 명성황후 생가를 찾아보고 신륵사는 남한강변 봉미산 아래 있다.영동 고속도로 따라 여주 I.C로 나가 좌회전 하면 장호원 쪽이고, 우회전 하면 여주읍내로 들어가는 길이다. 여주 가는 37번국도 따라 여주시내로 조금가면 전봉리로 명성황후 민비의 생가로 가는 길이다.민비는 1851년에 이곳에서 아버지 민치록과 어머니 이 씨 사이에 태어나 여덟 살에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 이 씨와 살아오다가 숙종의 비 인현왕후가 폐비되었다가 다시 왕비로 복위되면서 왕궁으로 돌아 간 자리 감고당으로 이사하여 십육 세에 고종황제의 비로 간택 되었다.안동김씨 세도정치의 폐단을 겪은 흥선대원군이 부모와 외척이 없는 왕비를 물색하던 중에 자기의 처 민 씨와 먼 친척이 되는 민비를 왕비로 간택 하였다.그러나 똑똑한 민비와 대원군의 갈등 끝에 견제하여 갈등의 세월을 살아오다가 민비가 1895년 일본의 낭인에 의하여 경복궁 건청궁 옥호루에서 살해되었다. 이를 을미사변이라 한다.고종은 비명에 간 민비를 위하여 생가 터 위에 고종의 친필로 쓴 탄광구리비(誕降舊里碑)와 각을 광무 8년에 세워 주었다. 생가 터가 거의 폐가되어 내려오던 중 1995년 원형 그대로 복원 수리하고 그 집 앞…
지리적으로 이름없는 남쪽산(1097m)과 북쪽산(1057m)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해발고도 810m로, 저수령(850m)에 이어 백두대간 충북 고개중 두번째로 높다. 행정적으로는 충북 단양군 영춘면 의풍리와 경북 영주시 부석면 임곡리를 남북방향으로 연결하고 있다. 이곳도 지난주 소개한 고치령과 마찬가지로 충북과 경북의 도계가 영로 정상에 위치하지 않는다. 경북땅이 고개 정상을 넘어 북쪽으로 약간 더 들어와 있다. 따라서 북쪽사면 고개 밑에는 영주시 부석면 남대리가 위치하고 있다. 이는 영춘 의풍리 일대가 조선시대 순흥도호부에 속했던 것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경상도 순흥도호부는 금성대군 역모사건 후 행정구역 자체가 해체돼 지도에서 사라졌다. 이후 1687년(숙종9) 옛 행정지위를 회복했으나 의풍 일대는 영춘현 소속으로 그대로 남았다. 그러나 이곳 주민들은 영춘을 생활권역으로 하고 있다. 경사도는 남쪽사면이 훨씬 가파르고 굽이가 많다. 특히 고갯길 바로 옆에는 낭떠러지가 곳곳에 위치, 운전대를 잡은 초행자는 어깨에 힘이 잔뜻 들어가게 된다. 마구령은 정상 일부를 제외하고 양사면 모두 포장돼 있다. 그러나 위 모습 때문에 산사람들로부터 '백두대간의 차마고
◇히로세 데이조(후쿠오카대학 인문학부 교수)=가해와 지배의 입장에 있던 일본의 역사기술 내용은 한국과 북한·중국 등에서 자주 비판받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일본의 교과서는 이러한 비판에 대응하지 않고 있다. 명백한 역사적 사실에 의거해 일본정부는 그 기술 내용을 시정할 필요가 있다. 속도가 더디기는 하지만,정보화·국제화의 진전에 따라 한·일 양국의 교과서 내용은 서로 가까이 다가가고 있는 중이다. 35년전에 일본에서 한국사를 배운 나에게는 그런 느낌이 강하다. 과거에는 정부의 의향만을 따르며 자국민만을 대상으로 삼아 폐쇄적이었던 교과서는 정보의 공개,사료 공개,번역서의 확대,공동연구의 증대, 인터넷의 확대 등에 따라 '타자의 시점'으로부터 늘 검증받게 됐다. ◇김형목(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선임연구위원)=동서고금을 물론하고 지배층은 항상 역사교육에 관심을 기울였다. 자국 중심의 역사교육은 객관성·합리성을 배제한 채 '뜬구름' 같은 왜곡과 미화를 일삼는다. 한국사의 과도한 '외인론(外因論)'은 역사적 사실과 현격한 거리감을 준다. 역사교육도 '순진한' 한국과 '교활한' 일본으로 대비시킨다. 그러면서도 선린우호를 강조하는 등 어린이들에게 혼란을 심화시키고 있는 점을
"한국과 일본 양국의 미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정치도 경제도 아닙니다. 다음 세대들이 참된 친구가 되는 것이죠. 그러기 위해선 '같은 역사'를 공부해야 합니다."김능진 독립기념관장(62·사진)은 부임한 지 20여일밖에 되지 않은 대학교수 출신이지만 '일본'이나 '독립운동'과 인연이 깊다. 우선 김 관장의 친할아버지인 김병우(金炳宇· 1879 ~ 1936) 선생은 3·1운동 당시 안동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다 2년간 옥고를 치른 애국지사다. 아버지는 만주로 도망을 가는 바람에 투옥을 피했다고 한다. 그러나 조부를 포함,집안 어른 3명이 투옥된 기간을 합치면 4년 6개월이나 될 정도로 반일 성향이 강한 독립운동가 집안에서 자랐다. 그러다 보니 어릴 때부터 주위 어른들에게서 "일본 사람은 모두 나쁘다"라는 말을 귀가 따갑도록 들으며 살았다고 했다. 하지만 성장하면서 사귄 일본인 친구들은 모두 마음이 따뜻했다. 대학교수 시절,김 관장을 집을 예고없이 방문해 자고 간 일본인 교수 3명은 그 후 제자들을 데리고 한국을 방문할 때면 가장 먼저 독립기념관을 방문하는 보은(報恩)을 베풀기도 했다.김 관장은 "앞으로 3년 임기 동안 내·외국인에게 사랑받는 독립기념관을 만들고…
29일은 '경술국치'라고도 불리는 한일병합조약 (韓日倂合條約) 이 체결된지 101년을 맞는 날. 최근 한·일 양국 사이에는 독도·역사 교과서 문제 등으로 또 다시 갈등이 깊어지고 있다. 이에 독립기념관은 지난 24~25일 양국 역사교육에서 뜨거운 쟁점이 되고 있는 '임진왜란'과 '한일병합조약'을 주제로 학술 워크샵을 열었다. 양국 초등학교 교사 4명이주제 발표를,교수 등 전문가 6명은 토론을 했다 .◇제1주제:임진왜란에 대한 한·일 초등역사교육의 현황과 과제△요시다(효고현 야부시이자소학교 교사)=내가 근무하는 초등학교에서 사용하고 있는 동경서적 교과서에는 임진왜란과 관련해 6줄이 서술돼 있다. 구체적 제목은 별도로 제시되지 않고 '오사카성(大阪城)과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라는 제목 아래 일부 내용으로 기술돼 있다. '침략'이라는 말은 본문과 별도로 따로 제시하고 있다. 또 일본문교출판 교과서에는 '히데요시의 조선출병과 도쿠가와이에야스(德川家康)'라는 제목 아래 8줄이 서술돼 있다. 이 교과서에는 '침략' 대신 '조선 출병'이라고 표현돼 있다. 일본 교사들은 '임진왜란'을 일본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싸움은 쌍방이다. 서로 전체를 바라보는 시
남쪽 국망봉(1,421m)과 북쪽 형제봉(1,177m)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해발고도는 760m다. 청원-보은 경계에 위치하고 있는 피반령이 360m인 점을 감안하면, 그 높이를 가늠할 수 있다.행정적으로는 충북 단양군 영춘면 의풍리와 경북 영주시 단산면 좌석리를 정남-정북으로 연결하고 있다.(대동여지도 참조) 고치령은 여타 백두대간 고개와 행정적으로 약간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대개의 경우 백두대간 고갯길 정상을 사이에 두고 충북과 경북의 도계(道界)가 형성돼 있다. 그러나 이곳 만큼은 경북도계가 고개 정상을 넘어 백두대간 북쪽 사면까지 들어와 있다. 따라서 고치령(古峙嶺) 정상과 단양군 영춘면 의풍리 사이에는 영주시 단산면 마락리가 위치하고 있다. 때문에 경북의 도계 조형물(사진 참조)도 백두대간 북쪽 사면에 세워져 있다. 충북으로서는 썩 기분좋은 모습은 아니다. 고치령 영로는 남북사면 모두 S자형 굴곡을 많이 지니고 있다. 경사도는 경북 사면이 다소 가파른 모습이어서, 승용차 브레이크를 자주 밟게 된다. 반면 충북 사면은 5월에도 잔설이 남아 있을 정도로 응달이 짙게 지고 있다. 대간(大幹)인 만큼 마루금(능선)은 분수령 역할을 정확히 하고 있다.…
#용화사의 기록들*용화사 용화보전용화사 사적에 의하면 용화사 미륵보전에 봉안된 원래 불상들은 개울가 절터에 방치되어 있었다. 1902년에 현재 용화사 자리에 봉안된 것을 1972년 법당에 안치하고 1990년대 현재의 미륵보전이 완공되면서 일곱 분의 부처님을 봉안하였다가 네 분을 극락전이 신축되면서 모셔오게 되었다. 창건 당시 미륵전과 설교전은 각각 15평이었고 산신각, 칠성각, 행곽, 요사채 등을 갖춘 큰 절이었는데 6·25전쟁으로 법당이 전소되었다. 이로 인해 미륵불 군상이 노천에 방치되어 오다가 1972년 미륵보전을 완성, 보호하여 왔다. 그러나 시멘트 건물로 벽면과 천장이 부식되어 1991년 증축을 위해 미륵보전 중창불사 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1992년 용화사 칠존미륵석불 보호를 위한 기초 공사와 목재공사가 시작됐다. 1996년 용화보전을 완성, 2008년 극락전을 신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세계에서 하나뿐인 미륵부처님 두상 뒤 나한상과 고려시대의 용화사 전신 사뇌사보물 제985호인 칠존미륵석불을 보니 그 중 한가운데 위치한 여래 입상이 높이가 3.2m로 당당한 체구와 삼도가 뚜렷한 만도형의 형태를 나타내고 있었다. 가사를 입고 불상 뒷면에 나한상
해발 696m로, 북쪽의 소백산 제 2연화봉(1,357m)과 도솔산(1,316m) 사이에 위치한다. 행정적으로는 충북 단양군 대강면 용부원리와 경북 영주시 풍기읍 수철리를 서북-동남 방향으로 연결하고 있다. 역시 이곳에 떨어진 빗물은 최종 도착지가 다르다. 경북사면의 빗물은 영주 남원천, 내성천을 거쳐 낙동강으로 유입된다. 반면 충북사면의 빗물은 단양 죽령천을 거쳐 남한강으로 흘러들어 충주호에 합류한다. 고개 경사도는 비슷하면서 다른 느낌을 준다. 충북사면은 고갯마루에서 8부 능선까지는 비교적 완만하나 고개 밑에 이를수록 굴곡이 심한 내리막길이다. 경북사면은 경사가 급하면서 굴곡이 심한 모습이 다소 지루하다 싶을 정도로 나타난다. 그 구절양장 모습은 희방사 계곡 입구에 이르서야 끝이 난다. 죽령 경북사면은 옛길이 비교적 잘 보존돼 있어 지난 2007년 국가명승 제 30호로 지정됐다. 그러나 충북사면은 농로로 포장되면서 옛길 흔적을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따라서 같은 죽령 고갯길이면서 충북 사면은 명승에서 제외됐다. ◇지리지 속의 죽령문헌에 등장하는 우리나라 제 2호 고갯길이다. 삼국사기 아달라이사금 5년조는 '춘삼월에 죽령을 열었다'(春三月 開竹嶺)고…
행정적으로 충북 단양군 대강면 올산리와 경북 예천군 상리면 용두리를 남북으로 연결하고 있다. 지리적으로는 북쪽의 도솔산(해발 1,1314m)과 남쪽의 황정산(1,077m)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해발 850m이다. 산세는 경북 사면이 훨씬 가파르고 굽이가 매우 심하다. 속리산 말티고개 정도는 아니지만, 이른바 구절양장의 모습이 자주 나타난다. 반면 충북사면은 영로 아래가 가파른 편이지만, 해발고도가 높아질수록 경사도가 완만하다. 따라서 충북사면서 고갯길 정상에 이르는 길은 마치 고원지대를 지나는 느낌을 갖게 된다. 얼마전까지 이곳에 소백산 관광목장이 운영됐었다. 백두대간인 만큼 마루금(능선) 자체가 분수령 역할을 한다. 북쪽 사면의 물은 남조천을 거쳐 남한강으로 흘러든다. 반면 남쪽사면의 물은 한천을 거쳐 낙동강으로 유입된다. 저수령의 어원은 경상도 사면에서 생겨났다. 저수령 중턱 쯤에는 저수골, 안골 등의 마을이 현존하고 있다. 저수골에서 저수령의 지명이 생겨났다. ◇대동여지도 속의 영로 단양과 은풍(지금의 예천군 하리면) 사이에 도로를 의미하는 선이 남북 방향으로 그어져 있다. 그리고 선과 백두대간이 종횡으로 교차되는 지점에 '故峴'이라는 고개 이름이 표
피안의 뗏목을 타고 대교를 건너 무심천을 따라 걸었다. 하늘에서 별이 쏟아지고 희미한 달빛이 무심천 물에 잠겨 고즈넉하게 흐르고 있다. 피안의 세계로 가려면 물 위에 뗏목을 타고 용화의 강 언덕을 넘어야 한다. 이곳이 반야의 세계, 용화보전이 있다. 용화사엔 무심천 강 언덕과 물이 있고 용화보전이 있다. 용화세계는 도솔천 내원궁으로 미륵부처님이 계시다.미륵부처님은 용화 세상을 꿈꾸는 모든 중생들에게 희망의 불로 신앙되어 왔다. 오늘도 도솔천 천상에 보살로 계시며 56억 7만 년 뒤에 세상에 내려와 미처 구제하지 못한 중생들을 구제한다는 미래의 부처이시다. 미륵 신앙이란 지난 날 석가모니 부처께서 불법을 듣고 수행을 계속한 제자 중 한 사람이 미래에 성불한다는 약속을 받고 도솔천에 있으면서 수행을 계속하여 세상에 내려와 성불하고 중생을 교화시킨다는 미륵보살님을 근거로 부연한 미륵삼부경을 토대로 발생된 신앙이다.이는 미륵보살님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아 부지런히 공덕을 닦고 선을 행하면 이 세상을 떠날 때 도솔천 내원궁에 미륵보살을 만나고 미래의 세상을 쫓아 염부제(閻浮提)로 내려와 미륵불의 법회에 참석하여 깨달음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삼일의 마음 수양은 천 수례
행정적으로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와 경북 문경시 문경읍 관음리를 남북 방향으로 연결하고 있다. 종전까지 백두대간은 충북과 경북을 동-서 방향으로 연결했다. 그러나 남한 백두대간은 계립령(鷄立嶺·하늘재)에 이르러 변곡점을 맞는다. 충북의 지형은 마치 오른쪽(동쪽)으로 고개를 돌린 누에(蠶) 모습을 하고 있다. 바로 오른쪽으로 꺾어지기 시작하는 지점이 계립령이다. 때문에 이곳부터의 백두대간은 충북과 경북을 남북으로 연결하게 된다. 주변 산세는 북쪽으로는 포함산(962m), 남쪽으로는 탄항산(857m)이 바싹 위치하고 있다. 계립령이 그 사이를 여우목 모습으로 빠져나가고 있다. 해발 525m다. 백두대간인 만큼 이곳에 떨어진 빗물은 남북으로 갈리게 된다. 북쪽의 물은 동달천, 송계계곡으로 거쳐 충주호로 흘러든다. 남쪽의 물은 신북천, 조령천을 거쳐 낙동강으로 유입된다. 경사도는 남쪽은 밋밋하고 북쪽은 다소 가파른 편이다. 그러나 해발고도가 그리 높지 않기 때문에 어느 표현처럼 '하늘'에 닿을 정도는 아니다. 미륵리사지에서 고개 정상까지는 1.8㎞ 정도로, 1시간 남짓 걸린다. 계립령 옛길은 지난 2008년 국가명승 제 49호로 지정됐다. 공식 명칭은 '충주 계립
범종각 옆 요사채에는 스님들이 참선을 하고 있어 근엄한 침묵이 흐르고 그 옆 위로 삼성각이 있다.경내의 모든 시선을 모으게 하며 서있는 3층 석탑에는 8각의 이중 기단을 갖추고 3층 석탑을 올렸는데 8각 기단이 매우 특유한 기법으로 불상대좌처럼 기단 위에 불상을 안치한 모양의 탑신이 올려져 있다. 높직한 지대석 방형 위에 하층 기대석을 마련하고 각 면에 안상을 조각했다. 갑석 위 굄대에는 단조로운 복련을 조각하여 별석을 놓았으며 그 위에 키가 높은 8각의 중대석을 놓고 소담한 양련을 조각한 8각 상대석을 얹었으며 방형 굄돌을 만들어 몸돌에 맞추었다.이같은 형식은 일반 탑과는 달리 불상의 대좌 기단 형식으로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특이한 것이다. 이 탑의 탑신부는 일반 석탑의 모양을 취하고 있는데 몸돌은 위 지붕돌과 각각 1매로 짜였으며 우주가 새겨져 있다.돌들의 키가 높아 전체 균형이 큰 느낌을 준다. 상륜부엔 노반만 남아 있으며 3층 지붕돌과 상륜부가 손상되어 거룩한 문화재의 손상이 안타깝기만 하다. 높이가 4.1m인 3층 석탑은 보물 제223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 탑 앞 작지도 크지도 않은 대적광전으로 들어갔다. 비로자나 좌불상이 지권인의 자세로 육계
충북 괴산군 연풍면 원풍리와 경북 문경시 문경읍 상초리를 고갯길 양사면으로 갖고 있다. 지리적으로는 주흘산(1106m·북)과 조령산(1017m·남)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그러난 이는 넓게 본 것으로, 좁게 보면 마패봉(927m·북)과 치마바위봉(835m·남)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서쪽사면은 고갯길 정상까지 거리가 짧고, 동쪽사면은 반원 모양으로 돌아 저능부로 빠진다. 따라서 서쪽사면이 다소 가파르게 느껴지고 있다. 백두대간인 만큼 서쪽과 동쪽 사면의 빗물은 최종 목적지까지 동행하지 않는다. 서쪽사면의 물은 연풍천에 모여 충주 달천으로 흘러든다. 반면 동쪽사면의 물은 조령천에서 만나 낙동강으로 유입된다. ◇대동여지도 속의 영로 충주목과 문경현 사이에 직선이 그어져 있다. 따라서 앞서 언급한 것과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고산자 김정호(金正浩·? ~ 1866)의 당시 지도제작 기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는 강이나 하천과 달리 구불구불한 도로는 직선으로 긋고, 그 위에 10리마다 점표시를 했다. 따라서 조령은 문경-연풍-충주를 연결하고 있는 고갯길임에도 불구하고 바로 충주를 연결하는 길로 표시돼 있다. 조령은 예로부터 한반도 최고의 요충지로 꼽혀왔다. 대
[충북일보] 청주시가 민선8기 3대 핵심현안 중에 하나로 꼽고 심혈을 기울였던 '우암산둘레길'이 엉터리 공사로 눈총을 받고 있다. 본보 취재결과 시가 지난해 12월 시민들에게 개방한 상당구 수동 우암산둘레길의 나무들이 제대로 수분을 흡수하기 어려운 환경에 자리잡은 것이 곳곳에서 확인됐고 심지어 일부 나무들은 뿌리까지 시멘트에 잠겨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9일 본보 취재팀이 육안으로 직접 확인한 생육환경이 열악한 나무들만 수십그루에 달한다. 이같은 사례 중 가장 쉽게 찾을 수 있는 나무는 데크길에 위치한 나무들이다. 최대한 나무를 피해 데크길을 설치하려는 시의 계획은 이해가 되는 부분이지만 나무와 데크 사이 틈이 너무 좁아 과연 나무들이 수분을 흡수할 수 있는가하는 의구심이 드는 대목이다. 게다가 곳곳에선 데크 구멍에 흙이 쌓여 투수가 불가능해보이는 곳도 보였다. 특히 일부 보행자인도에 위치한 나무들은 뿌리까지 시멘트가 덮여있는 모습들도 포착됐다. 나무의 뿌리 부분은 시멘트 아래에 묻혀 이대로 몇 년만 지나면 고사할 위기에 놓였다. 더욱이 해당 나무들은 주변의 나무들과 비교해 생육이 원활하지 않아 일부 기둥 부분이 갈라지고 이파리도 적게 달려있는 모
[충북일보] 7일 오전 10시부터 오후까지 충북 청주시 소재 충북대학교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주관한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렸다. 그러자 지역 곳곳에서 '무슨 일이 있느냐'는 문의전화가 빗발쳤다. 대통령실의 한 관계자는 이날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린 배경에 대해 "기존에 국가재정전략회의는 국무총리와 장·차관 등 국무위원 중심으로 열렸다"며 "이번에는 다양한 민간 전문가들을 참여시켜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고 정책의 현실 적합성을 높이고자 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해도 왜 굳이 충북대에서 이번 회의가 열렸어야 했는지 궁금증은 해소되기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또 하나의 특징은 회의 장소가 충북대라는 점"이라며 "기존에는 주로 세종청사나 서울청사에서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었는데, 충북대를 이번에 택한 이유는 지방 발전, 지역 인재 육성을 포함한 지방시대와 연계해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고자 하는 대통령의 의지가 반영됐다"고 설명했다. 이 또한 대통령의 의지라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일반 시민들의 궁금증을 해소시키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윤 대통령은 MZ세대인 충북대 학생들과 오찬 간담회를 열어 청년일자리, 지역인재 육성 등의 고민과
[충북일보] 청주시가 민선8기 3대 핵심현안 중에 하나로 꼽고 심혈을 기울였던 '우암산둘레길'이 엉터리 공사로 눈총을 받고 있다. 본보 취재결과 시가 지난해 12월 시민들에게 개방한 상당구 수동 우암산둘레길의 나무들이 제대로 수분을 흡수하기 어려운 환경에 자리잡은 것이 곳곳에서 확인됐고 심지어 일부 나무들은 뿌리까지 시멘트에 잠겨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9일 본보 취재팀이 육안으로 직접 확인한 생육환경이 열악한 나무들만 수십그루에 달한다. 이같은 사례 중 가장 쉽게 찾을 수 있는 나무는 데크길에 위치한 나무들이다. 최대한 나무를 피해 데크길을 설치하려는 시의 계획은 이해가 되는 부분이지만 나무와 데크 사이 틈이 너무 좁아 과연 나무들이 수분을 흡수할 수 있는가하는 의구심이 드는 대목이다. 게다가 곳곳에선 데크 구멍에 흙이 쌓여 투수가 불가능해보이는 곳도 보였다. 특히 일부 보행자인도에 위치한 나무들은 뿌리까지 시멘트가 덮여있는 모습들도 포착됐다. 나무의 뿌리 부분은 시멘트 아래에 묻혀 이대로 몇 년만 지나면 고사할 위기에 놓였다. 더욱이 해당 나무들은 주변의 나무들과 비교해 생육이 원활하지 않아 일부 기둥 부분이 갈라지고 이파리도 적게 달려있는 모
◇22대 총선 당선인 인터뷰 - 청주 청원 더불어민주당 송재봉 "국회의원이란 자리는 명예를 위한 것도 아니고 권력을 누리기 위한 자리도 아닙니다. 입법권을 가진 국회의원으로서 그 권한을 가지고 우리 지역에 필요한 일을 해야 합니다." 더불어민주당 송재봉(54) 청주 청원 당선인은 국회의원의 직무를 강조하며 송재봉을 선택한 게 "잘한 선택이다"라고 생각할 수 있도록 열심히 뛰겠다고 밝혔다. 송 당선인은 "윤석열 정권의 2년 성적표에 대한 국민들의 실망감이 컸고, 무너지는 민주주의와 추락하는 민생 경제를 회복시키라는 국민의 준엄한 명령으로 민주당이 승리할 수 있었다"며 "앞으로 민심을 최우선으로 삼는 국회의원이 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또 "민생을 살리는 것이 22대 국회의 역할이자 사명"이라며 "윤석열 정권의 독선과 독주를 멈추게 하고 비민주적 행태와 민생에 반하는 정책은 질책하고 견제하겠다. 야당의 본질적 역할도 충실하게 수행해 정부 여당이 민생을 외면하고 민의를 거부하는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국정을 더 철저히 감시하겠다"고 각오를 다졌다. 선거 기간에 약속한 공약은 반드시 실천하겠다고 했다. 청원구를 '충청권 메가시티의 핵심 축'으로 만드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