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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가 있는 충북역사기행 - 단양 도담삼봉

태종때 뱃놀이 기생 익사 등 '에피소드 공간'
노래한 한시만 무려 130여수 문인 필답코스
택리지는 '人家에서 쌓은 石假山 같다' 표현
정조, 김홍도시켜 "실내 감상용 그려올려라 "
야외 노래방 文風 모독 행위 詩碑 건립 필요

  • 웹출고시간2011.09.21 17:40:24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도담삼봉 절경

단양 도담삼봉(국가명승 제 44호)은 카르스트 지형이 만들어낸 절경이다. 주변의 석회암지대는 하천과 지하수 등에 의해 모두 깎여나갔다. 지질학 용어로 용식(溶蝕) 현상이다.

반면 도담의 세 봉우리는 석회암이 아니기 때문에 지금의 원추 모양을 계속 유지하고 있다. 강 안에 '바위섬'(巖島)이 존재하는 곳은 국내에서 이곳이 거의 유일하다.

도담삼봉의 이같은 명승성은 역사적으로 '에피소드 공간'이 되기에 충분했다. 그것도 단색이 아닌 다원색이었다.

조선시대 신증동국여지승람(중종)이 도담을 언급한 부분(맨 오른쪽)이다. '군의 북쪽 24리에 있다. 3개 봉우리가 담수 가운데 서있다'고 적었다.

◇택리지도 장문으로 언급

이중환(李重煥·1690~1752)은 숙종~영조 연간을 산 인물이다. 그는 택리지에서 단양을 '들판은 없지만, 강과 시내, 바위와 골의 홀륭한 경치가 있다'(無十里野有江溪巖洞之勝世)라고 적었다.

또 '이담삼암'(二潭三巖)이라는 표현으로 단양 전체의 명승성을 함축했다. 이담은 2개의 못이라는 뜻으로 구담과 도담을, 3개의 바위를 의미하는 삼암은 상선암·중선암·하선암을 의미한다.

그는 도담삼봉에 대해 돌로 인위적으로 쌓았다는 뜻인 '석가산 같다'고 표현했다.

'강물이 휘돌아 가면서 모여 깊고 넓다. 물 가운데 세 개의 돌봉우리가 각각 떨어져 한 줄로 선 것이 활줄같이 곧으며 쪼아서 새긴 것이 기이하고 공교로워서 인가에서 쌓은 석가산(石假山)같다.'-<택리지 복거총론 산수편>

다만 이중환은 '낮고 작아서 우뚝하고 깎아지른 듯 한 모습이 없는 것이 유감스럽다'(但恨低小無嵬峨찰)고 도담삼봉의 규모가 작은 점은 아쉬워했다.

◇수 많은 문인들이 찾다

몇년전 단양문화원은 '단양한시선'을 1천46쪽 분량으로 펴냈다. 자료에 따르면 단양 지역의 여러 명승지 중 도담삼봉을 직접적으로 노래한 한시가 무려 131수에 달하고 있다.

작품을 지은 문인도 이황, 이해조, 윤순거, 정약용, 황준량, 김정희 조선시대 내노라하는 문재들이 망라돼 있다. 퇴계 이황(李滉·1501∼1570)은 늦은 나이인 48세에 단양군수가 됐다.

그러나 형(이해·1496∼1550)이 충청도관찰사로 부임해 오자 자청하여 경상도 풍기군수로 전임하였다. 상피제도를 스스로 실천한 셈이다.

이황은 3수로 구성된 연시조로 도담삼봉을 노래했다. 다음은 '島潭' 제목의 연시조 중 두번째 한시다. 흐르는 것과 흐르지 않는 것이 묘한 대구를 이루고 있다.

'그 어느해 신선이 번개 일으켜(何年神物動雲雷) / 강 가운데 거석을 잘라 절경을 이루었나 絶景中間巨石開) / 만고의 시간동안 물결따라 흐르지 않고(萬古不隨波浪去) / 우뚝 서 내가 오기를 기다렸던가(巍然如待使君來)-<퇴계집>

추사 김정희(金正喜·1786∼1856)는 중국 죽림칠현의 한 명인 중산(中散)이 속세에서 사는 곳이 바로 도담삼봉이라고 상상했다.

'바다 밖에 삼신산이 있다고만 들었더니(徒聞海外有三山) / 어드메서 날아와 부처머리 배웠는고(何處飛來學佛환) / 사람에게 견준다면 운과 격이 선골이라(格韻比人仙骨在) / 이야말로 중산이 속세에 사는 걸세(恰如中散住塵환)-<완당집>

◇정조의 파격인사와 김홍도

김홍도가 그린 도담삼봉도로, 병진화첩에 실려 있다. 마치 헬기를 타고 가듯 위에서 내려다보듯 그렸다.

정조는 단원 김홍도(金弘道·1745∼?)의 그림을 무척 좋아했다. "회사(繪事·그림)에 속하는 일이면 모두 홍도에게 주라"고 명령할 정도였다.

따라서 정조는 극히 이례적으로 '환쟁이'(화원)인 단원을 우리고장 연풍현감으로 임명했다. 1791년의 일이다. 정조가 단원을 연풍현감으로 임명한데는 또 다른 의도가 있었다.

정조는 단원에게 연풍 등 충청도 일대의 명승지 그림으로 올려 보내도록 명령했다. 실내 감상을 위해서였다. 단원은 이때 도담삼봉도 외에 옥순봉도, 사인암도 등과 같은 진경 산수화를 집중적으로 그리게 된다.

미술평론가들은 단원의 도담삼봉도에 대해 "온화하고 서정적인 것이 조용한 文氣가 흐른다. 부감법이 세 봉우리와 흐르는 물을 더욱 실감나게 살리고 있다"고 평했다.

부감법은 마치 헬기를 타고 가듯,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처럼 그리는 방법을 말한다.

그림 하단을 보면 세 사람이 배를 불렀는지 사공이 노를 저어 오고 있다. 또 이들 오른쪽으로는 나귀를 끌고 오는 일행이 표현돼 있다. 이들은 양반의 짐을 끌고 오는 하인들일 수도 있고, 배를 타려는 손님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림 참조>

◇시대의 울분도 토로

태종실록의 내용으로, 뱃놀이를 하다 '기생 한명과 아전 1명이 빠져죽었다'(妓一吏一死)는 내용이 보인다.(흰색 부분)

도담삼봉은 반전의 에피소드 공간이기도 했다. 조선전기 일대 수계는 '단양강'으로 불렸다.

당시 단양군수는 박안의(朴安義) 등 4명은 기생을 동승하고 단양강에서 뱃놀이를 하다 배가 전복, 기생과 아전이 익사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그림 참조>

'지단양군사 박안의를 파직하였다. 처음에 안의가 청풍군사 황보전·강릉판관 김질·제주감무 유여 등과 더불어 단양강(丹陽江) 위에서 배를 띄우고 연음(宴飮)하다가, 배가 기울어져서 기생 하나와 아전 하나가 물에 빠져 죽었다.'-<태종실록>

이들은 현직 지방관임에도 당시 충청도관찰사 함부림으로부터 곤장을 맞아야 했다. 그러나 이들은 파직당하지 않고 현직을 유지했다. 그 뒤에는 당시 단양 출신의 실력자 이무(李茂··-1409)가 있었다.

'이무(李茂) 등이 장계(狀啓)하여 안의(安義)를 용서해서 환임(還任)시키기를 청하였으니, 무(茂)는 단양 사람이었다.'-<태종실록>

도담삼봉 수계는 시대의 울분을 토로하는 공간이기도 했다. 성호사설의 저자 이익(李瀷·1579∼1624)에게는 이잠(李潛·1660∼1706)이라는 친형이 있다.

그는 부친 이하진이 평안북도 운산(雲山)으로 유배돼 그곳에서 2년 뒤 죽자 벼슬을 포기했다.

당시 집권층은 노론인 반면 그의 집안은 대대로 남인계열이었다. 그는 울분을 달래려 도담삼봉을 자주 찾았던 것으로 보인다. 실록에 관련 내용이 등장한다. 그는 결국 상소 내용이 문제가 돼 심문을 받던 중 사망했다.

'그리고 일찍이 도담(島潭)의 중류에 배를 띄우고 관저시를 읊으며 줄줄 눈물을 흘리기도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자기 소견만 믿고 이 소를 올려 스스로 춘궁을 위하여 죽는다는 뜻에 붙였는데, 그 어머니가 힘껏 말렸으나 그만두지 않고, 드디어 극형을 받으니…'-<숙종보궐정오>

◇김홍도 그림에는 정자가 없다

충주댐이 담수하기 전의 도담삼봉 모습으로, 정자는 보이지 않고 대신 사람이 올라선 모래톱이 보인다.

도담삼봉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것은 가운데 봉우리에 세워진 정자다. 정자에 얽힌 사연은 멀리 조선 영조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단양군수 '조정세'라는 인물이 도담삼봉에 '능양정'이라는 정자를 세웠다. 그러나 이 정자는 민폐를 끼친다는 이유로 곧바로 철거된 것으로 보인다.

"단양군수 조정세(趙靖世)는 오로지 '탐람'만 일삼고 있으니, 청컨대 사판(仕版)에서 지워버리소서."-<영조실록> 인용문 중 '탐람'은 마시고 노는 것을 즐긴다는 뜻이다.

지금의 정자는 1970년대 후반에 세워졌다. 단양지역 시멘트 생산업체인 '성신양회'는 대홍수(1972)가 지나간 1976년 철근콘크리트 구조의 육각형 정자를 건립, 단양군에 기증했다.

조선후기-대홍수 기간에는 정자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김홍도 그림이나 수몰전 사진에는 정자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콘텐츠 방향

도담삼봉-석문 구간은 단양을 방문한 조선시대 문인들이 반드시 방문하는 필수 코스였다. 도담과 석문을 노래한 한시가 '세트'로 남아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앞서 도담삼봉을 직접적으로 노래한 한시가 1백30수가 넘는다고 밝힌 바 있다.

현재 이 구간에는 속칭 야외분수 음악무대가 가설돼 있다. 곡당 2천원을 내면 누구나 대중가요를 부를 수 있다. 그러나 말이 야외 음악무대이지 속칭 '가라오케' 공간에 가깝다.

대낮에 알코올의 힘을 빌리지 않고 노래를 할 사람은 많지 않다. 도담삼봉의 역사성을 감안하면 문풍(文風) 모독행위에 가깝다.

도담삼봉-석문 구간에 이황, 정약용, 김정희 등 조선시대 지식인들의 단양을 노래한 시비(詩碑)를 세우는 것이 보다 바람직해 보인다. 도담삼봉의 콘텐츠가 한층 풍부해 질 것으로 보인다.

/ 조혁연 대기자

자료도움: 충북대 사학과, 국사편찬위원회, 한국학 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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