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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가 있는 충북역사기행 - 윤선도 유배길과 단양

14년 구속된 몸, 단양에도 유배시를 남기다
2차 유배길 '헐마공암'·'죽령도중' 등 한시 2수
두번째 유배시 '어부사시사' 도입부와 꽤 비슷
실록 남인인 그가 죽자 단 한줄 '윤선도가 죽었다'
유배시 언급한 '잔도', 실록에도 등장 꼭 찾아야

  • 웹출고시간2011.09.28 17:58:19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충북도내 시군 중 한시가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곳은 최북단 단양이다. 단양문화원이 조사를 한 결과, 무려 130여수에 달하고 있다.

이들 한시의 대부분은 단양팔경 등 명승을 노래했다. 퇴계 이황, 추사 김정희 등의 작품이 대표적인 경우에 해당한다.

흔치 않게 유배시를 남긴 인물도 있다. 정철(鄭澈·1536∼1593)과 더불어 조선 시가(詩歌)의 쌍벽을 이루고 있는 고산 윤선도(尹善道·1587~1671)다.

그는 85살 생애를 살면서 14년은 유배지, 19년은 은거지, 나머지 8년은 관직에 몸을 담았다. 윤선도는 이 기간중 세 차례의 유배와 두 차례의 이배(유배지를 옮김)를 당해야 했다.

고산은 이때 우리고장 단양을 지나며 '歇馬孔巖'(헐마공암)과 '죽령도중'(竹嶺道中) 등 두 편의 한시를 남겼다.

◇14년을 유배지에서 살다

조선시대 지도의 하나인 지승(地乘)이다. 도로를 의미하는 붉은 선이 단양 치소에서 죽령으로 연결돼 있다. 윤선도 유배길도 이 도로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윤선도는 1616년(광해군 8) 일개 성균관유생 신분으로 이이첨(李爾瞻)·유희분(柳希奮)의 죄상을 격렬하게 규탄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과거가 공정하지 못하다는 말은 오늘날 피할 수 없는 일상적인 이야기거리입니다. 그런데도 이이첨이 또한 감히 변명을 하고 있으니 신은 삼가 통분스럽게 생각합니다.'-<광해군일기>

당시 이이첨은 일인지상의 최고 권력자였다. 윤선도는 이이첨 일파의 역공을 받고 되레 함경도 경원으로 유배를 가야 했다. 1차 유배로, 그의 나이 33살(1619년) 때의 일이다.

그는 1년 뒤 경상도 기장으로 이배되었다가, 1623년 인조반정으로 이이첨 일파가 제거되자 6년 4개월만에 해배됐다.

병자호란 이후 해남 보길도의 산수에 묻혀 지내던 고산에게 반대파 대신들의 모함이 시작됐다. 호란 때 어가(御駕)룰 따르지 않았고, 또 처녀를 어찌어찌 했다는 모함이 뒤따랐다.

'간원이 아뢰기를, "대동찰방 윤선도(尹善道)는 일찍이 병란 때에 해로를 따라 강도 근처까지 이르렀었는데, 경성을 지척에 두고서도 끝내 달려와 문안하지 않았으며, 피난 중이던 처녀를 잡아 배에 싣고 돌아갔습니다. 그리고는 그 일이 남들에게 알려질까…."' -<인조실록>

'처녀를 어찌어찌 했다'는 것은 해명을 통해 풀렸지만, 문안하지 않은 것은 죄가 인정돼 경상도 영덕으로 유배를 가야 했다. 2차 유배로, 그의 나이 52살(1638) 때의 일이다.

효종의 국상에 그의 어머니 자의대비 조씨가 얼마동안 상복을 입어야 하느냐는 문제가 불거졌다. 며느리인 효종비 인선대비가 죽자 복상 문제가 또 일어났다.

이른바 1,2차 예송 논쟁이다. 모두 효종이 차남으로 왕이 됐기 때문에 빚어진 문제였다. 고산도 이에 휘말렸고, 노구의 몸을 이끌고 함경도 삼수로 유배를 떠나야 했다.

'윤선도를함경도 삼수군(三水郡)에다 안치하였다. 당초에 선도의 죄목이 투저사예(投諸四裔)로 재가가 나, 의금부가 배소를 삼수로 정하고 이미 발송을 하였던 것인데, 이때 와서 상이 다시 극변 안치를 명하였으므로…'-<현종실록>

그의 나이 74살 때의 일로, 광양 이배를 포함해 7년 3개월간의 긴 시간을 3차 유배지에서 보내야 했다.

◇ 단양 첫번째 시 '헐마공암'을 짓다

조선시대 권신응이 그린 '봉생천'(1744)이다. 건너편 벼랑 위로 사람들이 무리지어 잔도를 걷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단양 잔도도 이와 유사했을 것으로 보인다.

서두에 언급한 '헐마공암'(歇馬孔巖)과 '죽령도중'(竹嶺道中) 등 두 편의 한시는 2차 유배지(경상도 영덕)로 향하던 중 단양을 지날 때 지었다.

먼저 지어진 헐마공암은 '공암에서 말을 멈추고서' 정도로 그 제목이 해석된다. 잔도는 벼랑을 쪼아 인위적으로 만든 좁은 길을 말한다. 공암이 잔도를 지칭하는 것임은 고산이 스스로 주(自註)를 달은 것에서 입증된다.

그는 자주를 '공암은 잔도이다. 무인(1638년) 6월 영덕으로 귀양가던 길에 단양을 지나며 지은 것이다'(丹陽棧道也 戊寅六月 謫向盈德時作也)라고 썼다.

시는 잔도인 헐마공암에 잠시 쉬면서 주위에 펼쳐진 수려한 풍광에 도취된 모습을 그렸다. 특히 회화성이 잘 드러나, 단양풍경이 손에 잡힐 듯이 다가온다.

'푸른 강가에 말을 멈추고 조용히 누우니(休鞍靜臥綠江湄) / 강가의 맑은 모래는 너무가 기이하네(江上明沙分外奇) / 천겹 비단 병풍은 그림처럼 생기있는 빛 발하고(千疊錦屛生色畵) / 세간의 장막 가운에 어느 것이 이만하랴(世間供帳孰如斯)'-<고산유고 권1>

국문학 쪽에서는 고산이 65세 때 지은 ,'어부사시사' 도입부와 헐마공암의 분위기가 유사하다고 밝히고 있다. 다음은 어부사시사 '겨울' 편에 등장하는 한 수로, 고한글체는 편의상 현대문으로 바꿨다.

'斷崖翠碧이 畵屛같이 둘렀는데 / 배 세워라 배 세워라 / 巨口細鱗을 낚으나 못 낚으나 / 至국悤 至국悤 於思臥 / 孤舟蓑笠에 興겨워 앉았노라'-<고산유고 권6>

의역하면 '단애취벽에 배를 세우고 거무세린(농어 지칭)을 낚으나 못 낚으나, 홀로 있는 배 위에서 도롱이 삿갓쓰고 흥겨워 한다'는 정도가 된다.

◇단양 두번째 시 '죽령도중'을 짓다


고산은 죽령 입구에 도달할 쯤 단양 두번째 유배시인 '죽령도중'(竹嶺道中)을 짓는다. 이때 젊은 시절(33살·1차 유배) 조령을 지나던 일이 생각났던 모양이다.

한시의 주를 스스로 '기미년 남쪽으로 귀양지를 옮길 때 조령 길을 취했다.'(己未南遷時取路鳥嶺)라고 적었다.

'헐마공암'이 아름다운 서경시인데 반해 '죽령도중'은 유배객의 서글픔과 부끄러움이 함께 묻어 있다. 그러나 전체적인 분위기는 서러운 인생을 자괴하고 있다. '어찌해야 지난번 지나갔던 곳을 피할 수 있을까'는 이 시의 절정이 되고 있다.

'지난날 조령을 따라 지나갔는데(昔世曾從鳥嶺去) / 금년에 죽령을 와서 앞길을 물어보네(今來竹嶺問前程) / 어찌해야 지난번 지나갔던 곳을 피할 수 있을까(如何回避經行處) / 태평시절에 이런 행색을 하고 있으니 부끄럽구나'(愧殺明時有此行)'-<고산유고 권1>

◇단양 잔도, 지금도 존재할까

유성룡이 임란 발발 후 관방 수비책을 보고하는 실록의 내용이다. 좌측 두번째줄에 '(외적이) 단양잔도 만큼은 통과할 수 없다'는 내용이 보인다.

단양 잔도는 고산만 언급한 것은 아니다. 서애 유성룡(柳成龍·1542~1607)도 '단양행'(丹陽行)이라는 시에서 이를 노래했다.

'단양의 산 높고 높아(丹陽之山高復高) / 하늘 찌를 듯한 돌 봉우리 창을 벌여 세운 듯(石峯·天如列戟) / 한 가닥 잔도는 바위 끝에 얽혔는데(一線棧道·岩巒) /…/'-<서애선생문집 권1>

벼랑 끝에 걸려 있는 모습에서 잔도의 위치성이 잘 드러나 있다. 선조~인조 연간을 산 신활(申活·1576∼1643)이라는 인물도 '과단양잔도'(過丹陽棧道) 제목의 칠언절구를 지은 바 있다.

단양 잔도를 가장 구체적으로 언급한 사료는 조선왕조실록이다. 유성룡이 임진왜란 발발 후 선조에게 관방 수비책을 건의하는 내용이다. <그림 참조>

'지난 임진년에 적이 내침할 때에 청풍 등지는 모두 통과하였으나 단양의 잔도(棧道)는 통과할 수 없었습니다. 그곳에 만약 험새(險塞)를 설치하면 국가는 철관(鐵關)을 둔 것 같을 것입니다.'-<선조실록>

실록의 사관은 윤선도가 죽자 단 한 줄만 썼다. '윤선도가 죽었다.(尹善道死)'-<현종개수실록> 윤선도는 집권 노론이 아닌 남인계열이었다.

◇콘텐츠 방향

윤선도가 단양을 지나며 유배시를 남겼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고산 시비를 세우는 것 자체가 관광 단양의 부가가치를 높이는 것이 된다.

죽령 입구 적당한 공간에 시비를 건립한 필요가 있다. '어찌해야 지난번 지나갔던 곳을 피할 수 있을까'라는 한 구절로도 방문객의 심금을 울릴 수 있다..

'한 가닥 바위 끝에 얽혔있다'는 단양 잔도의 흔적도 반드시 찾아야 한다. 도로 개설이나 확포장 등으로 이미 멸실됐을 수도 있으나, 설명 찾지 못한다 하더라도 '헐마공암' 시비를 세울 필요가 있다.

잔도는 전국 여러 곳에 존재한다. 그러나 한시의 주제가 되고, 또 실록에까지 등장하는 사례는 매우 드물다.

/ 조혁연 대기자

자료도움: 충북대 사학과, 단양문화원, 국사편찬위원회, 한국학 중앙연구원

고산 윤선도 연보

윤선도 영정으로 문중 후손들이 제작한 것이다. 사료 고증은 거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1세 1587년: 6월 22일 한성부 동부 연화방(현 종로구 연지동)에서 태어남.

6세 1592년: 학문 시작.

8세 1594년: 종가인 관찰사공 윤유심(삼촌이며 작은 아버지)의 집(서울 명지동)에 양자.

20세 1606년: 승보시(陞補試) 장원. 소학 접하고 평생의 필독서로 삼음.

26세 1612년: 봄에 진사시에 1등으로 합격.

30세 1616년: 집권파 난정을 주도한 이이첨을 죽여야 한다고 상소.

33세 1619년: 함경도 경원(咸鏡道 慶源)으로 귀양감.

37세 1623년: 인조반정으로 귀양에서 풀림.

42세 1268년: 봄 별시문과 초시 장원급제.

42세 1268년: 3월 봉림대군과 인평대군 두 왕자의 사부가 됨.

50세 1636년: 병자호란 발생.

51세 1637년: 병자호란 후 제주도로 가던 중 보길도를 발견, 부용동이라 이름짓고 거주.

52세 1638년: 경상도 영덕으로 귀양감. 이때 단양을 지나며 '헐마공암' '죽령도중' 한시를 지음.

53세 1639년: 2월 귀양 풀림.

56세 1642년: 해남 금쇄동에서 산중신곡 19수 지음.

65세 1651년: 보길도 부용동에서 국문학에 영원히 빛나는 어부사시사 4편 춘하추동 각 10수씩 40수를 지음.

66세 1652년: 예조참의에 임명되었으나 고산의 거절과 반대파의 모함으로 해남으로 귀향.

74세 1660년: 함경도 삼수로 3차 귀양.

81세 1667년 현종 8년 정미년: 귀양 풀림

85세 1671년 현종 12년 6월 11일 : 보길도 부용동 낙서재에서 85세로 서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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