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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여지도와 백두대간 충북의 옛고개 - 마구령(단양 영춘-경북 영주 부석면)

급비탈에 낭떠러지 "백두대간 차마고도"
남쪽사면 특히 심해, 초행자 긴장하기 일쑤
영춘 3개 고개 중 물산 이동 가장 많았던 듯
삼도 넘나들던 길목 주막문화 아직도 잔존
이웃 여촌령과 함께 트레킹 코스 개발 필요

  • 웹출고시간2011.08.31 16:54:57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마구령을 하늘에서 내려다 본 모습이다. 남쪽사면에 굽이가 훨씬 많음을 알 수 있다. '백두대간 차마고도'로 불려진다.

지리적으로 이름없는 남쪽산(1097m)과 북쪽산(1057m)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해발고도 810m로, 저수령(850m)에 이어 백두대간 충북 고개중 두번째로 높다.

행정적으로는 충북 단양군 영춘면 의풍리와 경북 영주시 부석면 임곡리를 남북방향으로 연결하고 있다.

이곳도 지난주 소개한 고치령과 마찬가지로 충북과 경북의 도계가 영로 정상에 위치하지 않는다. 경북땅이 고개 정상을 넘어 북쪽으로 약간 더 들어와 있다.


따라서 북쪽사면 고개 밑에는 영주시 부석면 남대리가 위치하고 있다. 이는 영춘 의풍리 일대가 조선시대 순흥도호부에 속했던 것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경상도 순흥도호부는 금성대군 역모사건 후 행정구역 자체가 해체돼 지도에서 사라졌다. 이후 1687년(숙종9) 옛 행정지위를 회복했으나 의풍 일대는 영춘현 소속으로 그대로 남았다. 그러나 이곳 주민들은 영춘을 생활권역으로 하고 있다.

마구령은 노폭이 좁기 때문에 대형차가 진입할 수 없다.(사진 표지판) 마구령 남쪽길 모습이다. 곳곳에 낭떠러지가 위치한다.

경사도는 남쪽사면이 훨씬 가파르고 굽이가 많다. 특히 고갯길 바로 옆에는 낭떠러지가 곳곳에 위치, 운전대를 잡은 초행자는 어깨에 힘이 잔뜻 들어가게 된다. <사진참조>

마구령은 정상 일부를 제외하고 양사면 모두 포장돼 있다. 그러나 위 모습 때문에 산사람들로부터 '백두대간의 차마고도'라는 별칭을 얻고 있다.

북쪽사면은 고치령과 마찬가지로 정북으로 향하고 있어 5월 초순에도 잔설이 남아 있다. 버스 등 대형차는 사계절 통행 불가다.<사진참조>

대간인 만큼 고개 정상에 떨어진 빗물은 각각 남북으로 갈리게 된다. 남쪽사면 빗물은 낙화암천, 내성천을 거쳐 낙동강으로 유입되고, 북쪽사면 빗물은 마포천, 옥동천을 거쳐 남한강에 합류한다.

◇대동여지도 속의 마구령

대동여지도의 마구령(지도에는 馬兒嶺)이다. 충청도 영춘과 경상도 영주(지도에는 榮川)을 연결하고 있다. 부석사 서쪽을 경유한다.

충청도 영춘현과 경상도 영천군(지금의 영주) 사이에 '통행'을 의미하는 선이 그어져 있다. 그리고 그 선과 백두대간 마루금이 교차하는 곳에 '馬兒嶺'(마아령)이 표기돼 있다.

'마아령'이 지금의 '마구령'(馬馬+區嶺)으로 변한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여러 정황상 일제가 한반도 땅이름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고개명이 변한 것으로 보인다.

사료 추적 결과, 마구령은 조선총독부가 지난 1918년 발행한 조선지형도에 처음으로 등장했다. 그 이전은 모두 마아령으로 표기됐다.

마구령 정상의 표지석이다. 뒷면에 설명구가 있다.

충북 영춘에서 경북 북부지역을 넘는 백두대간 고개는 고치령, 마구령, 여촌령(呂村嶺·대동여지도 참조) 등 3개가 존재하고 있다.

고치령은 영춘과 순흥, 마구령은 영춘과 영주, 여촌령은 영춘과 봉화를 연결하고 있다. 이는 조선 조정이 오지인 영춘에 왜 현(懸)을 설치했는지를 알게 하는 대목이다.

영춘은 황간, 연풍 등과 함께 관방적으로 매우 중요시 되던 곳이었다. 이와 관련, 영춘 3개 영로중 가장 중요시 되던 고개는 마구령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조선 중·후기 여러 지리지는 3개 고개중 마구령을 장문이면서 가장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1530·중종) 영천군 산천조는 '마아령은 군의 북쪽 삼십육리에 있다. 길이 매우 험난하며 충청도 영춘현으로 가는 길이다'(馬兒嶺: 재북三十六里 道甚險阻 至忠淸道 永春峴之路)라고 적었다.

여지도서(1752·영조) 순흥현 산천조도 비슷하게 표현, '마아령은 부의 북쪽 삼십오리에 있는데 백병산으로부터 왔다. 길이 매우 험하고 충청도에 이른다'(馬兒嶺 在府北三十五里自白屛山來道甚險阻指忠淸道)라고 기록했다.

이밖에 대동지지(1861·철종) 충청도 영춘현 산수조는 '마아령, 곶적령은 함께 남쪽으로 삼십리에 있다. 순흥과 영천으로 통한다'(馬兒嶺^串赤嶺 俱在南三十里 通順興^榮川甚險阻)라고 적었다.

영춘은 4,9일, 영주는 3,8일로 장시일이 각각 달랐다. 그러나 직선거리 30㎞로, 보부상들이 하루에 오가기는 다소 먼 편이다. 따라서 소, 목재, 소금 등 고가의 물산이 거래됐을 가능성이 높다.

◇유난히 발달한 주막문화

마구령 북쪽 들머리에 있는 주막거리 표지석이다. 이곳에서는 삼거리가 나타난다.

연풍 주현(周峴·현 은티)을 소개할 때 주막을 거론한 적이 있다. 조선시대 큰 고개 밑에는 반드시 주막이 존재했다. 도적과 호환(虎患) 때문에 집단으로 고개를 넘는 것이 안전했다.

또 큰 고개를 넘으려 하룻밤 묵으면서 체력을 비축하는 것도 필요했다. 마구령 북쪽사면 들머리는 삼거리 갈래길이다. 경북 봉화(여촌령)와 부석사(마구령) 그리고 영춘을 경유해 강원도 영월로 가는 길이 이곳에서 갈린다.

이는 주막이 입지하기에 가장 좋은 모습이다. 마구령 북쪽 들머리에는 지금도 주막이 위치하고 있다.(사진 참조) 당시 주막은 숙박, 음식, 농주 외에 짚신도 취급했다.

◇역사속의 사건

충북 북부지역의 의병사는 유인석(柳麟錫, 1842~1915), 이강년(李康·1858 ~ 1908), 김상태(金尙台·1864 ~1912) 등의 순으로 계보를 잇는다. 유인석의 제자가 이강년이고, 이강년의 지휘권을 넘겨받은 인물이 김상태다. 마구령은 이들의 주활동 무대였다.

유인석은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으로 친일내각이 성립되자 의병을 일으켜 충주·제천 등지에서 저항했으나 관군에게 패배, 만주로 망명했다.

이강년은 을미사변 후 제천으로 유인석을 찾아가 사제의 의를 맺고, 그의 유격장으로서 문경·조령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1907년 일본의 침략정책이 더욱 노골화되자 영춘(永春)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켜 충주를 공격하였다. 이후 곳곳에서 전과를 거뒀으나 제천 금수산에서 체포돼 사형당했다.

김상태는 우리고장 단양 출신으로, 이강년과 의형제를 맺고 많은 전과를 올렸다. 1907년 이강년 등과 함께 다시 제천·단양 등지에서 의병을 일으켜 순흥·봉화·풍기·영춘·영월 등지에서 맹활약했다.

그러나 1911년 현상금에 눈이 먼 내국인의 밀고로 순흥에서 잡혔다. 대구경찰서로 압송된 끝에 3년형을 선고받은 그는 단식 13일 만에 옥중 사망했다.

◇주변의 명소와 콘텐츠 개발

마구령 정상의 모습이다. 한 백두대간 종주자가 피곤이 엄습했는지 맨땅에 앉아 토막잠을 자고 있다.

부석사라는 이름에서 보듯 마구령 남쪽사면은 관광자원이 풍부하다. 반면 충북사면은 사람의 발길이 아직 많은 편은 아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늦은 시기까지의 마구령은 충청도, 경상도, 강원도 등 삼도를 넘나들던 길목이었다. 특히 마구령이 갖고 있는 '백두대간 차마고도'라는 이미지는 그 자체가 훌륭한 관광자원이 될 수 있다.

마구령 북쪽 들머리에서는 경북 봉화로 연결되는 여촌령(일명 늦은목이)이 위치하고 있다. 그러나 이곳은 수풀이 우거져 있어, 도보나 자전거로 고개 정상을 밟을 수 없다.

이 옛길을 복원, 도보나 자전거 접근이 가능하도록 만들면 매력적인 트레킹 코스가 될 것으로 보인다.

/ 조혁연 대기자

자료도움: 충북대 사학과, 단양군문화원, 산림청, 규장각한국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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