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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사학자 송부일의 사찰을 찾아서 - 신륵사(上)

경기도 여주군 북내면 천송리 282
봉미산·남한강 감싸안은 천년사찰

  • 웹출고시간2011.09.05 17:41:14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고종황제의 비 명성황후 생가를 찾아보고

신륵사 극락보전

신륵사는 남한강변 봉미산 아래 있다.

영동 고속도로 따라 여주 I.C로 나가 좌회전 하면 장호원 쪽이고, 우회전 하면 여주읍내로 들어가는 길이다. 여주 가는 37번국도 따라 여주시내로 조금가면 전봉리로 명성황후 민비의 생가로 가는 길이다.

민비는 1851년에 이곳에서 아버지 민치록과 어머니 이 씨 사이에 태어나 여덟 살에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 이 씨와 살아오다가 숙종의 비 인현왕후가 폐비되었다가 다시 왕비로 복위되면서 왕궁으로 돌아 간 자리 감고당으로 이사하여 십육 세에 고종황제의 비로 간택 되었다.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폐단을 겪은 흥선대원군이 부모와 외척이 없는 왕비를 물색하던 중에 자기의 처 민 씨와 먼 친척이 되는 민비를 왕비로 간택 하였다.

그러나 똑똑한 민비와 대원군의 갈등 끝에 견제하여 갈등의 세월을 살아오다가 민비가 1895년 일본의 낭인에 의하여 경복궁 건청궁 옥호루에서 살해되었다. 이를 을미사변이라 한다.

고종은 비명에 간 민비를 위하여 생가 터 위에 고종의 친필로 쓴 탄광구리비(誕降舊里碑)와 각을 광무 8년에 세워 주었다.

생가 터가 거의 폐가되어 내려오던 중 1995년 원형 그대로 복원 수리하고 그 집 앞 길 건너 민비의 영정을 모신 기념관을 건축하여 명성황후에 대한 사료와 일대기를 전시 하여 역사의 장을 열어 놓았다.

민비의 파란만장한 생을 알아보고 그 곳에서 뒤돌아 신륵사를 향하여 여주 시내로 5.6km쯤에 여주전문대가 있고 이를 지나면 네거리가 나온다. 여기서 우회전하여 1.2km지점에 상리, 하리 3층 석탑이 있다.

◇신륵사의 전설이 있는 용마바위

이를 지나면 강을 가로 지르는 여강대교가 나온다. 이 다리를 건너 두 갈래 길로 오른쪽 42번 국도를 따라가면 여주 국민관광단지이다. 여기서 여강길을 따라 신륵사에 이른다.

신륵사 초입 여강에 마암(馬岩)이라는 바위가 우둑 솟아 있는데 이 바위가 신륵사라고 하는 이름을 붙이게 한 전설적 바위이다.

이 용마는 두 가지 전설이 전해지는데 하나는 고려 고종 때, 인근 마을에 용마가 나타나 매우 거칠고 사납게 인근 사람들을 괴롭히는데 그 누구도 이를 당할 수가 없었다. 그때 신륵사 인당선사가 신력으로 고삐를 잡으니 순해졌다는 전설과 나웅대사가 사나운 말을 신륵사에서 이상한 굴래(勒)를 가져와 용마 머리에 씌우니 그 말이 순해지고 말을 잘 들어 대사가 이 말을 타고 다녔다 한다. 이에 굴래가 신령스로운 굴래라 하여 神勒寺(신륵사)라 부르게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융단 길 은행잎 길 따라가면 전설을 생각하며 여강 언덕길을 걸으면 그냥 이대로 멈췄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펼쳐진 들, 저녁노을, 굽이쳐 흐르는 파란 강물, 맑은 가을 하늘, 흘러가는 흰 구름, 황금빛 은행나무 단풍이 길가에 떨어져 한 폭의 동양화를 그려주고 마음을 쉬게 하기 때문이다.

초여름 영혼을 헹궈 주던 파란들의 녹색 들판이 벼가 익어 황금 빛 물결을 만들고, 떨어진 은행잎이 수북이 쌓여 포근한 양탄자 길 같아 구도자가 극락 길 찾아 가는 선의 세계 같다. 여기에 봉미산이 신륵사를 품고 선이 있는 여강 물길 따라 선정을 풀고 천년 역사를 자랑하고 있다.

신륵사는 신라 진평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때의 유물, 유적이 없고 고려 후 유적, 유물만이 남아 정확한 창건 연대는 알 수가 없다.

고려 우왕 때 양주 회암사에 머물던 나웅대사가 왕명을 받고 밀양 땅 향원사로 떠나게 되었다. 원래 나웅대사는 양주 회암사에 주석하면서 회암사를 중수하고 낙성회를 여는데 많은 여인들이 비단과 곡식을 가져다 공양을 하며 여인들이 몰려들어 떠나지 않음은 물론 그 후에도 여인들이 수 없이 찾아들었다. 이에 조정에서 사람을 보내 산문을 막게 하였으나 그래도 많은 여인들이 모여들자 나웅대사를 밀양 땅 향원사로 떠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 무렵 대사가 병이 들어 먼 길을 떠날 수 없는 처지였으나 왕명을 어기지 못하고 향원사를 향하여 떠나게 되었다. 신륵사에 이르러 더 이상 가지를 못하고 쉬게 되었다. 그때 하늘에서 오색구름이 산마루를 덮고 용이 승천하는 등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그 후 신륵사가 세상에 알려지면서 중창불사가 이루어져 대 사찰이 되었다 한다.

조선의 억불정책으로 절들이 움츠려졌지만 세종대왕의 영능이 광주 대모산에서 인근 능서면 왕대리로 이전 하면서 왕실에서 신륵사를 원찰로 삼아 절 이름을 잠시 보은사(報恩寺)로 부르고 전각들과 당우를 확장 하였다.

그 후 임진란 때 승군 500여 명을 조직하여 일본군과 전쟁을 할 때 극락전을 비롯하여 대부분 건물들이 전소 되었으나 헌종 때 다시 불사를 일으켜 오늘의 신륵사에 이르렀다 한다.

신륵사의 역사를 생각하며 여강 둑을 따라 걸어오는데 굽이쳐 흐르는 맑고 깨끗한 강물이 바닥에 깔인 조약돌을 굴리며 번뇌, 망상을 씻어 주고 흘러가는 듯한 마음에 앞을 보니 물안개가 백운교를 만들어 신륵사 일주문으로 안내하여 준다.

◇구룡루와 극락전

일반적으로 많은 사찰은 깊숙한 산속에 자리를 잡는데 신륵사는 푸른 물줄기와 드넓은 모래 밭 넓은 들판, 낮고 부드러운 봉미산(鳳尾山)자락에 위치 해있다.

포근하고 아늑한 일주문으로 들어가 강변의 넓은 마당으로 가면 왼쪽에 구룡루 누각이 2층으로 서서 흐르는 여강을 지켜보고 있다. 구룡루 누각 2층에 오르면 김병기의 중수기와 몇몇 문인들의 시제가 판각되어 걸려 있다.

구룡루에서 왼편으로 돌아가면 신륵사의 중심도량 극락전이 고풍스러운 모습으로 서있다. 영릉의 원찰이여서 그런지 정남향을 한 극락전을 중심으로 전각과 당우들이 안정감 있게 배치 되어있다.

장대석 기단 위에 세워진 정면 3칸 측면 2칸 팔각지붕 다포집으로 기단 위에 추녀를 4개의 활주가 받치고 있다. 전각 안에는 불단 위에 목조 아미타 삼존불을 봉안하고 그 위에 화려한 닫집을 우물반자 천정으로 꾸며 아름다운 천상을 만들었다.

내부에는 1900년에 조성한 후불, 신중, 감로 탱화를 모시고 1908년 다시 지장탱화를 그려 모셨다 한다. 그리고 극락전내 총길이 90cm 하폭 65cm의 범종이 있는데 종신에 건륭 38년 즉 영조 49년에 주조된 범종임을 알려주는 양각 글씨가 새겨져 있어 범종의 역사를 알려 준다.

◇흰 대리석으로 만든 다층 석탑

금당 바로 앞마당에 보물 제225호인 조선 성종 때 만든 높이 3m 횐 대리석 다층 석탑이 유려한 몸단장을 하고 아담하게 서있다. 원래는 9층이었다는데 지금은 8층만 남아있다.

방형의 석탑에 2층으로 기단부를 구성하고 그 위에 여러 층을 거듭하여 올린 다층 기단 위 탑신을 받고 있다. 외형상 일반적인 신라, 고려의 형식이나 세부형식은 다르다. 지대석 위, 상하 갑석에 단엽 복련을 두르고, 아주 얕은 하층 기단 면석 네 모서리에 형식적인 갓 기둥을 두고 있다. 4면에는 물결무늬, 구름무늬 등을 섬세하고 아름답게 조각을 하였는데 신라나 고려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조각된 작품이다.

8층으로 구성된 탑신부를 몸돌과 옥개석을 차례로 얹고 지붕돌 양쪽에 우주를 두고 다른 조각은 하지 않아 단순해 보인다.

현재 탑 보주위에 찰주가 꽂혀 있으나 본래의 것은 아니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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