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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여지도와 백두대간 충북의 옛고개 - 계립령(충주 수안보-경북 문경)

2천년의 숨결…문헌상 우리나라 제 1호 고개
온달 자원해 되찾고자 했던 바로 그땅
조운과 관련해서 조선초기 쇠퇴 시작
중종 때 이미 '옛길'이라는 표현 등장
역설적으로 그 덕택에 '명승' 지정돼

  • 웹출고시간2011.08.03 16:50:28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행정적으로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와 경북 문경시 문경읍 관음리를 남북 방향으로 연결하고 있다.

종전까지 백두대간은 충북과 경북을 동-서 방향으로 연결했다. 그러나 남한 백두대간은 계립령(鷄立嶺·하늘재)에 이르러 변곡점을 맞는다. 충북의 지형은 마치 오른쪽(동쪽)으로 고개를 돌린 누에(蠶) 모습을 하고 있다.

계립령 고도표이다. 주변 산세가 바로 험해짐을 알 수 있다.

바로 오른쪽으로 꺾어지기 시작하는 지점이 계립령이다. 때문에 이곳부터의 백두대간은 충북과 경북을 남북으로 연결하게 된다.

주변 산세는 북쪽으로는 포함산(962m), 남쪽으로는 탄항산(857m)이 바싹 위치하고 있다. 계립령이 그 사이를 여우목 모습으로 빠져나가고 있다. 해발 525m다.

백두대간인 만큼 이곳에 떨어진 빗물은 남북으로 갈리게 된다. 북쪽의 물은 동달천, 송계계곡으로 거쳐 충주호로 흘러든다. 남쪽의 물은 신북천, 조령천을 거쳐 낙동강으로 유입된다.

계립령을 하늘에서 내려다 본 그림이다.미륵리사지에서 고개 정상까지 한 시간 남짓 걸린다

경사도는 남쪽은 밋밋하고 북쪽은 다소 가파른 편이다. 그러나 해발고도가 그리 높지 않기 때문에 어느 표현처럼 '하늘'에 닿을 정도는 아니다. 미륵리사지에서 고개 정상까지는 1.8㎞ 정도로, 1시간 남짓 걸린다.

계립령 옛길은 지난 2008년 국가명승 제 49호로 지정됐다. 공식 명칭은 '충주 계립령로 하늘재'이다. 이름이 이례적으로 긴 것은 지명의 혼란과 관련이 있다.

◇대동여지도 속의 영로

대동여지도 속의 계립령이다. 도로 기능이 상실되면서 선이 보이지 않는다.

대동여지도(1861)는 계립령을 이름만 적고, 충주와 문경을 잇는 선은 그어놓지 않았다.

이는 계립령이 고개로 존재하나, 그 기능이 크게 떨어져 있음을 의미한다. 관련 징후는 문헌상 조선 초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한다.

세종실록지리지(1425)는 계립령에 대해 '마골점(계립령 지칭)은 현의 북쪽에 있고, 주정(周井·지금의 수안보 지칭)은 현의 북쪽에 있다'(麻骨岾在縣北 周井在縣北)라고 객관적 사실만 간략히 적고, 그 중요도는 거론하지 않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1530·중종)은 계립령을 아예 '옛길이다'라고 표현했다.

'속칭 겨릅산이라고 하는데, 방언으로 서로 비슷하다. 현의 북쪽 28리에 있고, 신라 때의 옛길이다.'(俗號麻骨山 以方言相似也 在縣北二十八里 乃新羅時舊路)-<신증동국여지승람 문경현 산천조>

여지도서(1752·영조)는 계립령을 '嶺'이 아닌 '峴'으로 표현했다. 조선시대는 관로 성격이 강하면서 중요도가 높으면 '嶺', 그 아랫단계 경우는 '峴'으로 표현하는 경향이 강했다. 꼭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와 관련이 있는 표현으로 보인다.

18세기 연풍군읍지도이다. 조령(상단 우측)과 달리 계립령(상단 좌측)은 도로 기능이 상실된 듯 선이 그어져 있지 않다.

계립령의 쇠퇴는 지도에도 그대로 반영돼 있다. 1768년(영조)에 간행된 연풍군읍지도는 동쪽에 이화치(伊火峙), 조령(鳥嶺), 계립령(鷄立嶺)을 모두 명기해 놓고 있다.

이와 관련해 이화치와 조령은 굵은 적색으로 표시, 사람과 물산의 이동이 많음을 나타냈다. 반면 계립령에 대해서는 명칭만 적었을 뿐 선(도로) 표시는 해놓지 않았다. 기능을 상실한 고갯길이라는 의미로 해석되고 있다. <그림참조>

일제시대 간행된 연풍지역 지도에도 계립령이 위치한 '상모면 미륵리'에서 경북 방향으로 어떤 도로 표시도 존재하지 않고 있다.

역설적으로 계립령 옛길은 '쇠퇴한 도로'였기 때문에 지난 2008년 국가 명승으로 지정되는 것이 가능했다. 계립령 경북사면은 영로 바로 아래 위치한 관음리까지 승용차로 접근하는 것이 가능하다.

계립령 정상 모습이다. 흙길(충북사면)과 포장도로(경북사면)가 극명하게 대비되고 있다.

반면 충주쪽 사면은 흙길이 원형 그대로 남아 있는 등 2천년의 숨결을 거의 간직하고 있다. 고개 정상에 서면 흙길과 포장도로의 대비를 극명하게 접할 수 있다. <사진참조>

◇역사속의 계립령

신라의 영토 콤플렉스는 남다른 면이 있었다. 신라는 초기부터 기회만 있으면 백두대간 밖으로 진출하려 노력했다.

신라 아달라 이사금(8대왕)이 재위 3년(서기 156)에 계립령을 개척했다. '阿達羅尼師今 三年 夏四月 開鷄立嶺路'-<삼국사기 신라본기>

때문에 계립령은 지금도 문헌상 제 1호 고갯길로 불리우고 있다. 단양 죽령은 이보다 2년 늦은 158년에 개척됐다.

나제동맹에 밀려 한강유역을 내줘야 했던 고구려는 6세기말 영양왕대에 이르러 실지(失地)를 회복하기 위해 다시 남하하기 시작한다.

이때 자원을 해 선봉에 선 장수는 온달(溫達?~590)로, 그는 영양왕에게 다음과 같은 출사표를 남긴다.

'계립현과 죽령 서쪽의 땅을 우리에게 귀속시키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다'(鷄立峴竹嶺以西不歸於我 則不返也)-<삼국사기 열전 온달조>

원병으로 요청하러 갔던 신라 김춘추(후에 태종 무열왕)에게 고구려 보장왕도 비슷한 발언을 한다. 인용문에 등장하는 '마목현'은 계립령의 또 다른 표현이다.

'마목현과 죽령은 본래 우리 땅이니 돌려주지 않으면 돌아갈 수 없다.'(麻木峴與竹嶺本我國地 若不拔還 則不得歸)-<〃 무열왕조>

고려시대 때 개성에서 영남으로 향하는 길은 대략 3갈래가 존재했다. 제 1로는 충주-죽령-영주, 제 2로는 충주-계립령-예천-안동, 제 3로는 용인-죽산-충주-계립령-문경이었다.

1361년 홍건적 2차 침입으로 공민왕이 안동으로 피난을 가야 했다.

그 남행 루트는 정확히 규명되지 않았다. 그러나 정황상 제 2로인 개경-한성-이천-충주-계립령-예천-안동을 경유했을 것이 확실해 보인다. 고려사는 공민왕이 충주에 도착하기 직전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신미에 우설(雨雪)이 내리는데 어가가 이천현에 이르니 어의가 젖어 얼어서 섶을 태워 스스로 따뜻하게 하였다. 이날에 적이 경성을 함락하고 유둔하기 수월(數月)에 우마를 죽여서 가죽을 펴어 성을 삼고 물을 대어 얼음을 만드니 사람이 붙잡고 오르지 못하게 되었으며 또 남녀를 잡아 불에 굽고 혹은 임신부의 유방을 구어 먹이를 삼아 잔인하고 포학함을 방자히 하었다.-<고려사>

계립령 구배도이다. 수안보 사면(좌측)이 더 가파름을 알 수 있다.

계립령의 쇠퇴는 조운, 임진왜란 등과 깊은 관련이 있다. 조선 태종은 세곡을 운반하는 조운선이 남·서해안 바다에서 자주 침몰하자 그 운송을 내륙으로 바꿀 것을 명령한다. 1414년(태종 14)의 일이다.

그러나 이때 태종은 기존 계립령이 아닌 조령(새재)을 이용하도록 지시했다. 계립령과 조령은 직선거리로 6㎞ 정도 떨어져 있다. 그만큼 북쪽으로 돌아가는 것이 된다.

태종의 지시는 이것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그에 앞서 태종은 조운 사고가 잦자 이때 이미 백두대간 운하 건설을 구상하기도 했다.

"정부·육조를 불러서 조운과 급전(給田)의 사의를 의논하였다. 임금이 말하였다. (…) 운하(渠)를 파는 일은 비록 작은 폐단이 있다고 하더라도 오히려 사람을 상(傷)하게 하는 것보다 낫지 않겠느냐."-<태종실록>

조선 조정은 신립장군이 충주 탄금대에서 대패한 이후 관방시설의 중요성을 절감했다. 이것이 반영돼 조령 2관문(일명 조곡관)이 임란 중에 건립되고, 나머지 제1, 제3 관문은 숙종 연간에 세워진다.

계립령은 이때부터 급격히 '잊혀진 고갯길'이 됐다. 이런 까닭인지 계립령을 주제로 한 시는 거의 없는 편이다. 영남출신 김종직이 계립령-충주 가흥을 경유, 한양으로 가는 길에 겨우 시 한 편을 남겼다. 주된 배경은 충주 가흥창으로, 과중한 조세를 비판하고 있다.

'높고 가파른 계립령은 / 예로부터 남북을 그어놓았네 / 북쪽 사람은 호화를 다투고 / 남쪽 사람은 기름과 피 빨리네 /…/ 돛대가 협구를 가득히 덮어 / 북쪽으로 앞을 다투어 내려가는구나 / 남쪽 사람들 낯을 찡그리고 바라보건만 / 북쪽 사람들 뉘라서 이 사정 알리'-<동문선>

◇하늘재의 어원

계립령의 또 다른 지명은 하늘재이다. 계립령은 신라 때는 '계립령', 고려시대에는 '대원령'(大院領)으로 불렸다. 어문학자들은 후자에 하늘재의 어원이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대원령'을 순우리말로 옮기면 '한울재' 정도가 된다. 이 한울재가 빠르게 발음되면서 지금의 '하늘재'가 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나 충북대 차용걸(역사교육과) 교수 등 일부 사가는 계립령과 하늘재를 서로 다른 고개로 보고 있으나, 이와 관련된 이론은 다소 복잡하다.

/ 조혁연 대기자

자료도움: 충북대 사학과, 괴산군문화원, 산림청, 규장각한국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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