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로 보는 인문학 - '사랑하는 당신에게'

사랑하는 사람을 영원히 간직하는 방법

2023.07.17 16:55:06

안소현

(사)여성문화예술기획 충북지부장

[충북일보] 사랑하는 당신에게

우리의 오래전 약속 기억해·

먼저 떠난 사람이 하고 싶어 한 일을

남은 사람이 하기로 한 거

그래서 당신의 뒤를 이어

현대 무용단에 입단했어

아이들에겐 절대로 비밀로 할 거야

알게 되면 당장 그만두라고 할 거니까

무대에 선 내 모습이

어색하기만 한데

세계적인 무용가가

나를 주인공으로 지목했어

이게 무슨 일일까·

무사히 공연을 마치고 나면

비로소 당신과 작별할 수 있을까?

보고 싶어, 영원히 사랑해

당신의 제르맹
한 장의 편지가 영화의 모든 것을 말해준다.

우리는 사는 동안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한다.

그러나 다시 만날 수 없는 헤어짐은 심장을 조이는 아픔을 동반한다.

며칠 전 비가 주룩주룩 오는 날 지인의 49재 추모식에 갔다.

고인을 보내는 슬픈 추모식이 아니라 고인 생전의 희·노·애·락 을 동영상으로 편집하고 맛있는 음식과 과일 상큼한 레모네이드로 식탁을 꾸민 이별 파티였다. 두런두런 그녀의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마치 금방이라도 나타날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파티에 참석한 20명 남짓의 지인들은 눈물과 미소를 동시에 머금고 헤어졌다.

이별이란 무엇일까.

사랑하는 이의 죽음이 영원한 이별일까.

내가 그를 또는 그녀를 기억하는 한 영원한 이별은 없을 것이다.

이별에 관한 아름답고 귀여운 2023년 5월에 개봉한 델핀 르에리세 감독의 영화 '사랑하는 당신에게'를 소개한다.

세상을 떠난 아내에게 편지를 쓰고 도서관에서 꽂혀 있는 책 속에 편지를 꽂아 두는 70대 제르맹을 닮고 싶다.
◇갑자기 사랑하는 사람을 갑자기 잃게 된다면.

무용 공연을 앞두고 연습이 한창인 아내 리즈(도미니크 레이몬드)가 집으로 돌아와서 그날의 즐거움과 공연에 대한 설렘을 남편 제르맹(프랑수아 베를레앙)에게 신나게 떠들어 댄다.

음식을 준비하러 주방에 들어간 아내가 조용하다.

주방 바닥에 쓰러져 있는 아내.

사랑하는 아내를 갑자기 잃게 된 남편 제르맹은 망연자실한다.

"어떻게 나를 혼자 두고 떠날 수 있어. 리즈."

홀로 된 아버지를 돌보려는 효심이 지극한 자식들은 시간표까지 짜고 담당 날짜까지 정하는 지나친 관심을 보인다.

그러나 아내와의 오래전 약속을 지키려는 제르맹은 아내가 속해 있던 현대 발레단에 입단해서 아내의 공연을 마무리해야 한다는 생각에 가족들의 관심이 너무 불편하고 성가시다.

제르맹의 식사를 담당하기로 한 이웃집 루시의 기름진 음식은 번번이 길고양이 밥이 되고.

아내와 약속을 지키려고 가족들 몰래 현대 발레단 입단을 결심하지만, 거울 앞에 비친 제르맹은 배불뚝이 70대 노인. 과연 아내와의 약속을 지킬 수 있을까.
◇'스페인의 피나 바우쉬'로 불리는 '라 리보트'와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은 프랑스의 국민배우 프랑수아 베를레앙의 완벽한 변신

아내와의 약속대로 현대 발레단에 입단한 제르맹은 세계적인 무용가이자 공연 안무가인 라 리보트와 만나게 되고, 그녀 앞에서 너무나 작아지는 제르맹.

어설픈 동작을 익혀 나간다.

어설프고 둔한 그의 동작이 금방 나아지진 않지만 발칙하고 새로운 모험에 제르맹은 신나게 빠져든다. 가족들을 완전히 속이고 발레 공연 연습에 매진한다.

공연 날짜가 촉박하지만, 갈피를 잡을 수 없는 공연은 단원들을 딜레마로 빠지게 한다.

안무가 라 리보트는 제르맹이 무용을 하는 이유가 '죽은 아내와의 약속'이었다는 말을 기억하고 제르맹의 이야기를 공연으로 기획하기로 한다.

공연 4주 전에 공연의 주제부터 다시 정하고 공연의 주인공을 제르맹으로 바꾼다.

무모한 도전 같지만, 단원들은 기대와 희망으로 동조한다.

결국 무용 공연 사실을 가족들에게 들켰고, 가족들이 관람하는 가운데 제르맹은 떨리는 가슴으로 무대에 오른다.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제르맹의 공연을 바라보는 가족들은 그의 열정적이고 무용에 몰입하는 모습에 감동의 눈물을 흘린다.

그의 몸짓을 통해서 죽은 리즈를 떠올렸을 것이다.

무용은 몸의 언어라고 했던가.
◇대중적 감각과 연출력을 겸비한 델핀 르에리세 감독의 미쟝센

마르셀 푸르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델핀 르에리세 감독은 여성의 섬세함으로 사랑을 잃은 한 남자가 자기만의 방식으로 슬픔을 극복하는 과정을 현대 무용과 접목해서 '상실을 극복하고 인생의 변화를 맞이하는 한 남자'를 따스한 시선으로 담아낸다.

죽은 아내의 분신이 되어 발레를 하는 70대 백발 제르맹의 둠칫둠칫한 몸짓이 웃기고 귀엽고 슬프다.

영화의 초반에 마르셀 푸르스트가 등장해서 소설을 낭독하는데 제르맹이 홍차와 마들렌을 먹는 모습은 20세기의 걸작을 코믹하게 배치해서 세련되고 품격 있는 장면을 선사한다.

여성 감독 특유의 섬세함으로 라 리보트라는 현대 무용의 거장과 마르셀 푸르스트라는 문학의 거장을 영화의 미쟝센으로 배치하는 발칙한 연출에 찬사를 보내고 싶다.

감독은 자신의 할아버지가 코로나로 만나지 못하는 아내에게 매일 편지를 보냈다는 자전적인 사실을 영화로 제작했다.

우리에게 사랑하는 이를 보내는 아름다운 방법을 제시한 이 영화는 76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스위스 최대 영화제이자 유럽의 가장 권위 있는 영화제인 75회 로카르노영화제에서 관객상을 수상하며 뛰어난 작품성과 재능을 인정받았다.

이별이란 무엇일까.

사랑하는 이의 죽음이 영원한 이별일까.

내가 그를 또는 그녀를 기억하는 한 영원한 이별은 없을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보내는 '제르맹'식 이별 파티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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