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에 대한 단상

2024.04.25 15:15:48

김현정

문학평론가·세명대 교수

우리나라에 라면이 등장한 것은 1963년이다. 삼양식품 전중윤 회장이 일본에서 라면 제조 기술 및 기계를 도입하여 국내에서 처음으로 '삼양라면'을 생산한 것이다. 1960년대 초 남대문 시장을 지나던 그가 꿀꿀이죽을 사먹기 위해 줄을 선 모습을 보고, 식량 문제를 해결하고자 라면을 생산하게 되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별로 인기가 없었으나 1965년에 정부의 혼분식 장려 정책에 힘입어 라면은 간편한 한 끼 식사 대용으로 대중들의 사랑을 받게 된다. 1969년에는 1500만 개가 팔릴 정도로 놀라운 성장세를 보여준다. 라면이 점점 서민들의 음식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1970년대 초중반으로 기억된다. 새마을운동이 한창 진행되던 시절, 우리 집에도 변화가 찾아왔다.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길도 넓히고"라는 새마을운동 노래 가사와 같이 초가집을 기와집으로 바꾸는, 지붕개량공사를 하게 된 것이다. 어머니는 인부들에게 줄 새참을 준비하셨는데, 그 새참은 다름 아닌 라면이었다. 라면을 살 형편이 넉넉지 않았던 어머니는 라면에 소면보다 굵은 우동국수를 섞어 끓이셨다.(당시 라면 가격이 20원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어머니는 인부들에게 한 그릇씩 퍼드리고 남은 라면을 나에게 주셨는데, 지금도 그 맛을 잊을 수 없다.

그리고 초등학교 4학년 때로 기억되는, 잊히지 않는 장면이 있다. 당시에는 농심에서 나온 '소고기라면'이 출시되어 집집마다 라면 한 박스씩 들여놓던 시절이었다. 며칠 간격으로 동네를 방문하는, 삼륜 트럭에 싣고 온 라면을 마을사람들은 집의 곡식과 교환하는 것이었다. 우리 집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 시기에도 라면은 아주 특별한 날에만 끓여먹었던 것 같다. 그런데 초등학교 동급생이 거의 매일 생라면을 가져오는 것이었다. 친구들하고 나누어 먹기에 넉넉지 않으므로 그는 친구들이 보는 앞에서 라면에 스프를 뿌려 먹곤 했다. 친구들은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며 군침을 흘리기도 했다. 풍족하지 못한 시절 우리들의 자화상이기도 했다.

고교시절 독서실을 다닐 때의 일이다. 나는 친구들과 독서실에서 공부를 늦게까지 한 적이 많았다. 한창 식욕이 왕성하던 시절, 우리는 육개장 사발면으로 허기를 때웠다. 야식을 사먹기 쉽지 않았기에 상대적으로 저렴한 사발면을 택한 것이다. 사발면을 같이 먹으며 미래의 꿈을 이야기하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어른거린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시기 라면을 너무 많이 먹은 탓인지 이후 소화가 잘 안 되어 한 동안 라면을 먹지 못하기도 하였다.

라면에 대한 기억들이 희미해질 무렵, 한 여고생이 지은 '라면' 연작시가 신선하게 다가왔다. 어느 청소년문학상에 입상한 시인데, '라면'을 통해 아버지와 친구에 대한 연민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아버지는 가을을 따라/ 논과 밭을 바쁘게/ 달려 다녔고/ 나는 냄비에 라면을 끓여/ 아버지의 가을을 쫓아다녔다.// 산길을 걸을 때마다/ 냄비가 출렁거렸고/ 억새가 마른기침을 토하자/ 낮게 엎드린 산들이/ 멀미를 해댔다.// 아버지는 시든/ 고구마 줄기를 깔고 앉아/ 라면을 드셨고/ 나는 고구마 순을/ 톡톡 분지르고 있었다.// 냄비를 들어 국물을 마신/ 아버지는/ 바닥에 가라앉아/ 꼬부라지고 불어터진/ 삶을 건져내고 있었다.

- 김자임의 <라면·1> 전문

라면을 통해 힘들게 농사를 짓는 아버지의 애환이 표출되어 있다. "시든/ 고구마 줄기를 깔고" 라면을 먹는 아버지의 모습이라든지, 냄비 "바닥에 가라앉아/ 꼬부라지고 불어터진/ 삶"을 건져내고 있다는 장면에서 아버지의 고단함을 들여다보는, 속 깊은 마음을 읽을 수 있다. 논과 밭으로 분주하게 다니시는 '아버지의 가을'과 동행하는 모습에서 시적 화자의 연민의 정도 느낄 수 있다. 시 <라면·3>은 발음 문제로 영어 선생님한테 꾸중을 들은, 친구의 안타까운 심정을 보여주고 있다. "물이 들어가자 둥근 면발이 떠올랐고/ 짝꿍의 라면 국물은 면발 속으로 파고들어 갔지만/ 꼬부라진 라면은/ 물음표만 남긴 채/ 쉽게 익지 않았다."라고 한 구절을 통해 친구의 그늘진 마음이 쉽게 풀어지지 않고 있음을 은연중에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김자임의 라면 연작시는 아버지와 친구의 우울한 내면을 진솔하게 드러내고 있는, 수작이라 하겠다.

1986년 아시안게임 육상 3관왕을 차지한, 가난한 시절 라면을 먹으며 운동했다는 임춘애 선수의 안타까운 '라면' 이야기는 잘 알려진 사실이다. 궁핍했던 시절, 서민들의 한 끼 식사를 해결해준 라면은 지금도 여전히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한류 열풍과 더불어 'K-푸드'로 자리 잡은 라면, 그 이면에 담긴 서민들의 애환도 함께 들여다보는, 따뜻한 시선이 필요한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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