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 23일이 음력 3월 15일로 이인좌의 반란군이 청주성을 함락시킨 날이었다. 조선시대 청주성이 반란군에 함락당한 대표적 사건이 이인좌의 난이다. 1728년(영조 4년) 3월 15일(음력), 이인좌가 우두머리에 선 반란군이 청주성을 함락시킴으로써 이인좌의 난이 시작됐다. 이인좌의 난은 소론 강경파와 남인 일부가 경종의 죽음에 영조와 노론이 관계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일으킨 내전이다. 난이 일어난 해가 간지로는 무신년이었기에 무신란(戊申亂)이라고도 한다.
*** 청주인이 일으킨 반란
청주목 괴산 송면 출신인 이인좌는 양성의 권서봉, 용인의 박완원, 안성의 정계윤, 괴산의 이상택 등의 반란군과 합세하여 3월 15일 청주성을 함락하기로 하였다. 그들은 상여 행렬로 꾸민 다음 상여 속에 병기를 감추고 청주 경내로 들어와 성 앞 숲 속에 몰래 숨겨 놓았다. 장례를 치르는 척 하다가 날이 저물자 미리 내통한 자들이 성문을 열어주어 청주성 안으로 들이 닥쳤다. 이인좌는 충청병사 이봉상과 그의 비장 홍임, 영장 남연년을 죽이고 스스로 대원수라 칭했다.
자칭 대원수 이인좌는 반란군에 합류한 권서봉을 청주목사, 신천영을 충청병사로 삼았다. 이인좌, 권서봉 등의 반란군은 천안 목천, 증평 청안, 진천을 거쳐 한양을 향해 북상하다가 경기도 안성과 죽산에서 도순무사 오명항 등의 관군에게 격파되었다. 이인좌는 체포되어 한양으로 압송 후 능지형에 처해졌다. 청주성에 남아 있던 신천영의 반란군은 박민웅 등이 이끄는 창의군에 밀려 상당산성에서 저항하다 체포되어 참수 당했다.
청주성을 지키다가 반란군의 협박과 회유에도 충절을 지키며 순절을 택한 이들의 이야기가 조선왕조실록 등에 기록되어 있다. 이봉상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5대 후손으로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포도대장, 훈련대장, 삼도수군통제사 등을 지내고 충청병사에 부임했다. 이인좌의 난이 일어난 날 밤 반란군이 이봉상을 끌어내어 칼로 위협하며 항복을 요구했다. 이봉상이 크게 꾸짖기를 "너는 충무공 집안에 충의가 서로 전해져 오고 있음을 듣지 못했느냐? 왜 나를 어서 죽이지 않느냐?"하고 크게 세 번 외치니, 드디어 죽였다.
홍임은 반란군이 항복하라고 협박했으나 끊임없이 욕설을 퍼부었다. 이인좌는 탄복하며 "이는 충신이다. 죽이고 싶지 않지만 나를 죽일까 염려되기 때문에 죽인다. 그러나 일이 성사된 후 너의 후손을 녹용(錄用)하겠다"고 했다. 홍임이 다시 꾸짖으며 "나에게는 본디 아들이 없지만 있다 하더라도 어찌 너 같은 역적에게 등용되겠느냐·" 하자 죽였다. 남연년도 이인좌에게 "어찌 개×끼 같은 너희를 따라 반역하겠느냐?"며 꾸짖다가 죽었다.
애초 이인좌의 난은 충청, 영남, 호남의 삼남지방과 평안도에서 난을 일으켜 한양 도성으로 쳐들어가고 도성에서는 포도대장 등이 내응하기로 모의했다. 그러나 평안도와 도성 내 가담자들은 사전 발각되고 충청, 호남 반란군들은 불과 며칠 만에 관군에게 일찍 진압되었다. 영남 지역의 반란군 진압에는 약 3개월이 걸릴 만큼 어려웠고 이 여파로 남인의 거점 지역인 영남에 대한 경계가 심해져 조선 후기 영남인의 벼슬길이 막히는 불이익이 주어졌다고 한다.
이인좌의 난을 맞아 청주성에서 순절한 이봉상, 홍임, 남연년을 제향하는 사당이 청주시 상당구 수동에 있는 표충사다. 충청병사를 자칭한 신천영의 반란군 일당을 토벌한 박민웅과 창의군을 기리는 사적비가 상당산성 남문 앞 잔디마당에 있는 무신창의사적비다. 청주시 것대산 봉수지에는 이인좌의 반란군이 봉화를 올리지 못하도록 봉화지기를 죽였으나 그 딸이 간신히 봉화를 올리고 역시 죽임 당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 역사는 충절과 배신의 기록
동서고금을 불문하고 역사는 충신과 역적이 엉켜 만들었으며 이들의 충절과 배신의 기록이기도 하다. 약 300년 전 3월 보름날 밤 청주성을 급습한 이인좌의 반란 무리들에게 죽임당한 충신들. 벼슬도 없는 백성의 신분으로 반란군을 진압한 청주의 창의군들을 떠올리게 된다.
표충사와 무신창의사적비, 것대산 봉수지를 다녀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