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으로 살기 힘든 세상

2022.09.28 13:50:29

이정균

시사평론가·전 언론인

딸 키우기 힘든 세상이다. 그럼 아들 키우기는 좋은 세상이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살아 온 경험과 벌어지는 현상, 사회를 지탱하는 규범 등을 봤을 때 남성보다 여성이 살기에 더 힘든 세상이라는 생각이다. 생물학적으로 보통의 남성이 보통의 여성에 비해 완력이 센 것은 인류 공통의 현상이므로 태생적 물리력을 기준으로 삼을 일은 아니다. 끊이지 않는 젠더폭력의 사회적 이슈를 대하는 분위기와 제도 개선을 위한 여론 형성 과정에서 여성으로 살기 힘듦을 더욱 느끼는 요즘이다.

*** 끊이지 않는 젠더폭력

최근 많은 국민들을 분노케 한 서울 신당역 역무원 스토킹 살인사건에서 보듯 힘없고 연약한 여성이 국가와 직장으로부터 아무런 보호조치를 받지 못한 상태에서 공포와 불안에 시달리다가 참혹하게 살해당했다. 그것도 직장에서 근무 중에 말이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서울교통공사 입사 동기인 가해자가 피해 여성에게 3년 동안 350회 이상 전화와 문자를 보내 스토킹 했고 역구내에서 촬영한 불법 촬영물을 이용해 협박을 했다고 한다. 견디다 못한 피해자가 경찰에 고소했고 경찰과 검찰이 구속영장을 청구했지만 법원이 "증거인멸과 도주우려가 없다"며 영장을 기각했다. 가해자는 결심공판에서 검찰 구형을 9년 받았고 법원 선고를 하루 앞둔 날 피해자 직장을 찾아가 잔혹하게 살해한 것이다.

구속영장을 심사했던 판사는 가해자가 증거를 인멸하거나 도주할 우려가 없다는 판단을 법률과 양심에 따라 내렸겠지만 가해자는 기소된 후에도 피해자에게 "내 인생을 망칠 거냐"며 합의를 종용하는 연락을 지속적으로 했다고 한다. 결국은 법원이 가해자의 인권과 법적 권리를 보장해 주다가 피해자의 인권과 권리 보호는 고사하고 생명마저 빼앗기는 길을 열어줬다. 원통하고 억울하기 이를 데 없는 피해자와 유가족의 처참한 슬픔을 어느 누가 달래 줄 수 있겠으며 어떤 위로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 사건처럼 범죄 혐의를 수사한 경찰과 검찰이 청구한 구속영장을 법원이 이러저러한 사유를 들어 기각하고 영장 기각으로 불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던 피의자가 사건 고소인이나 피해자를 협박하고 심지어 보복살해 하는 사례가 드물지 않게 보도된다. 특히 여성을 상대로 하는 성범죄와 여타 범죄의 경우 이와 같은 보복범죄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가정과 직장 내 또는 지인으로부터 성폭력이나 괴롭힘을 당하고도 가해자를 고소했다가 나중에 보복당할 것이 무서워 신고나 고소를 하지 못한 채 두려움에 떨고 있을 피해자가 얼마나 많겠는가.

우리나라가 경제 선진국이며 치안이 안정된 나라라는 자랑에 부합될 만큼 여성들이 안전한 나라라는 믿음이 가지는 않는다. 신당역 스토킹 살인 사건을 두고 여성혐오 범죄냐 아니냐는 논란이 한창인데 여성혐오 범죄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딸 키우기 힘들고 여성으로 사는 게 고난인 것만은 틀림없다.

한 때 여성상위 시대라는 표현을 많이 쓰다가 지금은 성평등을 말하고 있다. 여성상위이건 성평등이건 그 내면에는 여성이 차별받고 불이익당하는 세상을 극복하고자 하는 적극적 방향성이 들어있다. 이러한 노력들이 모이고 진화하여 사회 전반적으로 남녀차별 철폐를 넘어 남녀구별 자체를 금지하는 게 일반화 되었다. 정치권에는 국회의원과 지방의원 비례대표 후보 1번 여성 의무화와 비례대표 50% 여성할당제가 실시됐다. 정부와 지자체 예산서에는 성인지 예산제도라고 하여 예산이 여성과 남성에게 미치는 효과를 분석함으로써 국가재원이 보다 성평등한 방식으로 사용될 수 있도록 예산의 배분구조와 규칙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재원 배분과정을 도입해 운영하고 있다. 이 정도면 성평등이 진일보 한 걸까.

*** 철저한 국가형벌권 절실

그럼에도 여성이 살기 힘든 세상이라는 생각이 바뀌지 않는 것은 인하대 성폭력 사망사건, 제2 n번방 사건, 데이트 폭력 사건, 신당역 스토킹 살인사건 등 성범죄 피해자의 절대 다수가 여성이라는 점과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끔찍한 폭력을 국가와 사회가 제대로 지켜주지 못하는 현실을 대할 때마다 재확인되기 때문이다. 여성계에서는 성범죄 사건의 본질을 젠더폭력으로 규정하고 남성의 젠더기반 폭력에 대해 사법부도 사회도 관대했음을 비판한다. 세상의 구조적 성차별 인식을 직면하지 않고 남성을 보호하려는 사회 전반의 태도가 바뀌지 않으면 대책이 무의미 하다고 강조한다. 유엔에서는 '직장 내 성폭력, 스토킹, 가정폭력, 디지털 성범죄' 등을 젠더 폭력으로 규정하고 있다.

사회 곳곳에서 빈발하는 여성 대상 젠더폭력을 철저하고 집요하게 응징하는 국가형벌권이 절실하다. 여성이 살기 힘든 세상은 가정도 힘들고 모두가 힘들 뿐이다.


이 기자의 전체기사 보기 →

<저작권자 충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84건의 관련기사 더보기





충북일보 / 등록번호 : 충북 아00291 / 등록일 : 2023년 3월 20일 발행인 : (주)충북일보 연경환 / 편집인 : 함우석 / 발행일 : 2003년2월 21일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무심서로 715 전화 : 043-277-2114 팩스 : 043-277-0307
ⓒ충북일보(www.inews365.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Copyright by inews365.com, In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