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속리산을 좋아한다. 청주에서 한 시간 거리에 속리산 급의 명산이 있는 건 행운이다. 2023년에 마음먹은 여러 가지 계획 가운데 속리산 문장대와 문경 대야산 등반 각 10회가 있었는데 문장대 11회, 대야산 6회로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 의지가 부족한 사람이다. 2024년에는 횟수를 정하지 않고 한 번이라도 더 가는 걸로 했다. 속리산은 갈수록 더 정이 드는 산이다.
*** 갈수록 정 드는 산
어느 책에선가 고은 시인이 속리산을 가리켜 '남자를 만나 본 경험이 많은 중년 여인의 관능미'를 보이는 산이라고 쓴 걸로 기억하는 데 원본 출처를 찾지 못하겠다. 혹시 문장에 착오가 있으면 양해 바란다. 이런 표현을 보며 고은 시인다운 묘사라 생각했고 속리산 갈 때면 가끔 고은 시인의 감상을 떠올려 보지만 잘 모르겠다.
명산일수록 설화와 전설이 많은 법인데 속리산에도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와 역사적 사실이 풍부한 문화적 보고라 할만하다. 신라시대의 문장가 고운 최치원이 속리산을 이렇게 말했다. "도는 사람을 멀리하지 않았건만(道不遠人) 사람이 도를 멀리하고(人遠道), 산은 속세를 떠나지 않았건만(山非離俗) 속세가 산을 떠났구나(俗離山)" 산이 떠났든 속세가 떠났든 속세로부터 멀리 떠나있는 속리산을 찾으면 누구나 번뇌를 내려놓으려는 수행자가 될 듯하다.
법주사 지구에서 속리산 등산로 시작 지점인 세심정(복천암)에 이르는 세조길은 높은 산을 오르지 않고도 청정한 수원지와 계곡을 따라 울창한 숲길을 편안하게 걸을 수 있어 많은 탐방객의 인기를 끈다. 조선시대 세조 임금이 복천암 신미대사를 만나기 위해 순행했다는 세조길은 경탄이 절로 나오는 아름다운 풍광에 더해 피톤치드와 음이온 발생량이 상당히 높아 심신안정과 건강에 유익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속리산 주능선인 문장대~청법대~신선대~입석대~비로봉~천왕봉 구간은 그 유명한 백두대간 길이다. 민족의 영산 백두산에서 뻗어내려 지리산으로 장쾌하게 내달리는 백두대간이 충북 구간인 소백산~조령산~이화령~대야산~청화산~속리산~추풍령을 거쳐 민주지산~덕유산~지리산으로 이어지는 중간에 속리산이 위치하고 있다. 이 속리산 주능선은 이름도 낭만적인 충북알프스 구간이기도 하다. 보은군에서 야심차게 추진해 1999년 특허청에 출원 등록까지 마친 '충북알프스'는 구병산~형제봉~천왕봉~문장대~관음봉~묘봉~상학봉의 약 44㎞인데 속리산이 중심에 있다. 전국적으로 알려진 영남알프스가 억새를 떠올린다면 충북알프스는 빼어난 암봉과 기암괴석을 상징한다.
속리산을 상시 등반할 수 있는 구간은 세심정에서 문장대 코스와 천왕봉 코스로 갈린다. 문장대 방향으로는 훈민정음 창제에 기여한 신미대사의 복천암을 지나 보현재 휴게소 터, 냉천골 휴게소 터를 거쳐 해발 1천057m의 문장대에 닿는다. 천왕봉 방향으로는 세심정을 조금 지나면 천왕봉 방향과 신선대 방향 갈림길이 나온다. 이곳에서 금강 휴게소 터, 관음암, 임경업 장군이 무예를 닦았다는 전설이 깃든 경업대를 거치면 속리산 주능선 상 해발 1,027m 신선대에 이른다. 또 이 갈림길에서 은폭동 폭포가 숨어있다는 상환암, 상환석문, 상고암 삼거리, 장각동 갈림길(헬기장)을 지나 속리산 주봉인 해발 1,058m 천왕봉 정상에 도달한다.
이 밖에도 속리산 등반은 화북~문장대, 장각동~천왕봉, 대목리~천왕봉, 충북알프스 구간인 묘봉~관음봉~문장대, 백두대간 구간인 밤티~문장대 등 비경을 간직한 루트가 많지만 이 가운데 화북~문장대 코스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비탐방 구간으로 막혀 있어 아쉬움이 크다.
속리산 최고봉인 천왕봉은 삼파수라 불리는 한강, 금강, 낙동강의 발원지다. 천왕봉에 내리는 빗방울이 북쪽에 떨어지면 달천을 통해 한강이 되고, 서쪽으로 가면 대청호에 담겼다가 금강이, 남쪽 낙하하면 상주를 통과해 낙동강이 되는 신비로운 산이 속리산이다.
*** 구도자 심정으로
속리산 품속으로 들어가 산이 허락해 주는 기운을 한껏 받는 즐거움이 측량할 수 없을 만큼 크지만 외부에서 관조하는 속리산도 일품이다. 견훤산성에서 바라보는 속리산 북동사면과 골계미는 가히 압권이다. 눈이 아주 많이 내려 온통 산하를 덮길 기다리는 중이다. 질풍노도의 후삼국 시대 격랑의 한쪽을 담당했던 견훤의 설화가 깃든 견훤산성에 올라 속리산을 마주하기 위해서다. 새해엔 조금이라도 속물을 벗고자 구도자의 심정으로 속리산을 오르고 철학자 흉내 내며 하산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