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 24일 문화재청과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은 일본으로부터 환수한 임진왜란 시기 영의정을 지낸 하회 류성룡 선생이 작성한 《류성룡비망기입대통력》을 공개했다. 《류성룡비망기입대통력》이 주목 받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대통력의 표지에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노량해전 순국 장면을 묘사한 내용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노량해전을 치르며 왜적들의 거센 공격에도 앞장서 진두지휘하는 이순신 장군에게 부장들이 "대장께서 스스로 가벼이 나서면 안 됩니다"고 만류하였으나 듣지 않고 '전투를 직접 독려하다 결국 날아 온 총알을 맞고 죽었다'고 적혀있다. 1598년 음력 11월 19일 새벽 무렵, 지난주 12월 12일이 바로 이순신 장군 순국 424주년 되는 날이다.
*** 장군 죽이려는 어리석은 임금
임진왜란을 일으킨 왜적이 손쉽게 한양도성과 평양성까지 함락시켰으나 마침내 명나라 군대가 참전하고 조선 의병들이 활약하는데다가 바다에서는 이순신 장군이 남해와 서해를 통한 왜적의 병참보급을 저지함으로써 왜적은 남하를 거듭하면서 강화협상을 이어간다. 왜적은 부산포를 중심으로 남해안 주변에 웅거하며 강화협상을 진행하고 이순신 장군은 한산도 삼도수군통제영을 중심으로 제해권을 장악하여 대치 하다가 강화협상이 결렬되자 왜적이 대군을 동원하여 재차 조선을 유린한 것이 1597년 정유재란이다.
정유재란 초기 고니시 유키나가의 반간계에 속아 넘어간 조선왕 선조가 이순신 장군을 시기 질투하는 반대파의 모함마저 받아들여 장군을 죽이기로 작정하고 투옥시켜 형문을 가한다. 장군의 자리인 삼도수군통제사에 원균을 임명했다. 원균은 무리하게 통제영의 조선수군 함대를 모두 출전시켜 왜 수군과 쫓고 쫓기다가 1597년 7월 16일 거제도 칠천량에 머물러 무방비 상태로 잠을 자는 와중에 왜적의 기습을 받았다. 제대로 대항도 못한 원균의 수군은 거북선 3척과 백 수십 척의 조섬함대가 불타고 부서졌다. 다만 경상우수사 배설의 수군만 12척의 판옥선과 함께 후퇴할 수 있었다. 통제사 원균, 전라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 등 많은 수군 장수들과 1만7천여명의 수군 병사 중 대다수가 전사하는 궤멸을 당했다.
궁지에 몰린 선조가 이순신 장군을 풀어주고 다시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하여 조선수군 재건에 나선 장군이 배설의 전선 12척과 다른 배 1척을 더한 13척의 판옥선으로 133척의 왜적을 기적처럼 물리친 전투가 원균의 칠천량 참패 두 달 후인 1597년 9월 16일 명량대첩이다. 명량대첩 이후 장군은 남해와 서해를 거듭 옮겨 다니며 목포 고하도에 머물다가 완도 고금도에 통제영을 설치하고 수군 보충, 전선 건조, 군량 보급, 군수물자 확보에 심혈을 기울인다. 전쟁 수행에 필수불가결한 병력, 무기, 함선, 군수물자를 임금과 나라로부터 지원받지 못하고 오히려 온갖 음해를 이겨가며 장군과 병사들이 자급자족 해야만 하는 기막힌 상황이었던 것이다.
정유재란 막바지 순천 왜성에 고립된 고니시 유키나가는 명나라 장수 진린에게 뇌물을 바치며 탈출을 시도했으나 이순신 장군이 퇴로를 열어주지 않자 사천왜성, 남해왜성, 고성왜성에 웅거하던 왜적들에게 구원을 요청하여 300~500여척의 왜선과 2만5천명의 왜적 구원병이 몰려든다. 이순신 장군은 1598년 11월 18일 밤 60척의 전선과 7천명의 수군을 지휘하여 왜적 구원병들이 순천왜성으로 향하는 길목인 노량해협에 잠복했고 왜적을 기습하여 노량해전이 벌어진다.
*** 풀 자라지 않는 장군 안치소
다음날 정오까지 이어진 노량해전에서 왜선 200척 격침, 100척 나포와 왜적 수만명이 사살되고 일본으로 끌고 가려던 조선인 포로 수백명을 구출했다. 조선수군은 11월 19일 새벽 무렵 이순신 장군이 적탄에 전사하고, 다수의 지휘관 포함 300여명 전사, 전선 4척 격침, 명나라 전선 2척 격침, 명 병사 500명 전사로 아군도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으나 왜적은 훨씬 큰 참패를 당했다. 순천왜성에 포위됐던 고니시 유키나가는 해전 현장을 우회해 부산포로 탈출하여 일본으로 돌아갔고, 사천왜성에서 출동한 구원병 왜장 시마즈 요시히로는 자신이 승선하여 지휘하던 전선이 파손되어 다른 배를 타고 살아남아 그의 영지인 큐슈 가고시마로 귀환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시기에 나라가 망해가는 데 임금은 백성과 도성을 버렸고, 그 잘난 조정 신료들은 제 몸뚱이와 식솔들 챙기느라 허둥댔다. 그러나 계급장 없는 백성들이 조선 팔도 곳곳에서 의병을 일으켰고, 나라 덕 본 적 없는 민초들은 고통 속에서도 나라를 버리지 않았다. 424년 전 오늘은 장군의 시신이 고금도 통제영 월송대에 임시 안치됐던 시기다. 지금도 고금도에 가면 장군의 시신이 모셔졌던 자리에 풀이 자라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