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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출고시간2012.11.28 16:33:21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쌀과 연관된 설화는 많다. 경남 거창군 마리면의 쌀다리는 외다리 지만 지금도 통행이 가능할 정도로 튼튼하다. 인근의 장승백이 다리는 하천보수 공사가 시작되면서 철거 돼 지금은 다리를 연결했던 바위만 남아있다. 고제면의 높은 다리는 하천 공사를 하면서 지금은 찾아볼 수 없지만 옛날 선비들이 쌀다리, 장승백이다리, 높은다리를 거쳐 한양을 과거시험을 보러 가던 모습을 연상시켜준다.

또 석교라는 이름을 가진 지명도 전국에 산재해있다. 남해군 남면 석교리의 석교도 하천 보수공사를 하면서 예전의 다리는 어디로 갔는지 사라지고 지금은 콘크리트 다리가 차지하고 있다.

#쌀다리와 장승백이 다리

한양으로 통하는 삼남대로에 위치한 쌀다리는 무더운 여름철 시원한 그늘과 계곡을 선물해준다.

쌀다리가 위치한 거창군 마리면 고학리는 비가 많이 내리면 깊은 계곡을 건너기 위해서는 상당한 불편을 감수해야 했다.

이 같은 불편함을 보다 못해 이 마을에 살던 오성재 오성화 형제가 백미 천 석으로 인부를 사서 놓은 다리라고 해서 이 돌다리를 쌀다리라고 이름 부르고 있다.

1758년에 가설된 이 다리는 길이 11m, 높이 2m로 양측에 석축을 쌓고 하천 중간에 교각을 세워 한 장의 석판을 상판에 깔아 만들었다.

당시 안의현 현감 이성중이 이 마을을 방문해 이들 형제를 치하했으며 다리 옆에는 이들의 공덕을 기리는 시혜불망비가 세워져있다.

다리를 건너면 시원하고 운치가 있는 정자가 있어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장관을 연출해 보여준다.

2km 정도 내려가면 말흘리 들판에 장승백이라는 다리가 있었다고 전해지나 지금은 하천 보수 관계로 다리는 사라지고 자연암반을 이용해 돌을 올려놓았던 큰 암반만 남아있다.

이 마을 김만복(72) 씨는 "예전에는 큰 바위에 돌을 올려놓아 다리를 만들어 건너다녔으나 하천 보수 공사를 하면서 다리도 사라지고 옆에 세워두었던 장승도 지금은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며 "옛것을 보존하는 노력이 아쉽다"고 말했다.

고제면의 높은 다리의 돌다리는 사라지고 1966년 건설된 높은 다리가 바위와 어우러져 멋진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높은 다리는 쌀다리 장승백이다리를 거쳐서 한양으로 올라가는 중요한 길목에 있었다고 전해진다.

또 경남 남해군 남면 석교리의 돌다리도 수년전까지는 있었으나 차량통행이 많아지고 도로가 넓혀지면서 예전의 석교는 사라지고 현재는 돌다리가 있던 자리조차 없어졌다.

주민 이점순(74)씨는 "예전에는 석교가 있어서 이 마을 이름을 석교라고 불리울 정도로 유명했다"며 "지금은 석교 다리가 없어져 아쉽다"고 말했다.


# 마을 사람들과 한 식구가 된 도마교

벌교읍 도마교는 마을 사람들의 의식속에 잠재돼 있어 지금도 한 식구처럼 인정을 받고 있다.

'순천에 가서 인물자랑하지 말고 여수에 가서 돈 자랑하지 말고 벌교에 가서 주먹자랑하지 말라'는 옛말이 있다.

순천에는 인물이 나서 작은 강남이라고 불리우고 있고 여수는 예로부터 기름진 농토와 남해 해산물의 집산지로 해방직후에는 밀수가 성행했다고 한다. 즉 밀수 한탕만 하면 감옥에 가서 몇 년 살다가 나와도 평생먹고 살 돈을 벌었다고 한다.

벌교의 전동리 마을 들판의 초지마을에는 도마교가 있다.

일명 도매다리라고 불리우는 도마교는 인근의 부용산이 '약마부정'의 형세라는 설에 따라 '도마'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전한다. 돌다리 옆의 도마교비와 중수비는 조선 인조 25년(1645) 낙안군 고읍면에 거주하는 정창락, 장선용이라는 사람이 다리를 가설한 것으로 돼 있다.

1989년 여름 홍수로 인해 절반이 파손된 상태로 다리를 놓는데 사용된 석재는 단단한 화강암으로 네모진 돌기둥을 이용하였으며 바닥은 우물마루(우물 井자)를 짜 맞춘 기법을 사용했다. 이 다리는 17세기 경에 만들어진 다리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다.

마을 주민 김덕만(75)씨는 "도마교는 마을을 지켜주는 지킴이 역할을 해왔다"며 "예전에는 동제도 지냈으나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이 다리가 무너지거나 훼손되면 마을이 불행해 진다는 속설이 아직도 전해 내려오고 있다"고 말했다.


# 빨치산들이 쌀을 쌓았던 벌교 홍교

벌교천 위에 걸쳐져 있는 세칸의 무지개 다리인 홍교.

전체길이가 27m, 폭 3m, 높이 4.5m로 현재 남아있는 홍교중 가장 규모가 크며 보물 제 304호로 지정된 홍교는 소설 '태백산맥'에서는 홍교를 사투리로 '횡갯다리'라고 불렀다.

태백산맥에는 '염상진이 부하들을 이끌고 선근다리쪽에서 공격을 함으로써 벌교를 수비하던 심재모의 계엄군과 경찰 토벌대의 관심을 돌려놓고 고을 뒷산을 타고 내려온 하대치가 부하들을 이끌고 지주들의 집에서 쌀을 빼앗아 횡갯다리목에 쌓은 뒤 방을 붙은 사건이 있었고 이 때문에 계엄사령과 심재모가 곤혹스런 입장에 처한다'는 내용이 있다. 이 쌀을 쌓았던 곳이 바로 홍교다.

벌교는 감조하천인 벌교천 때문에 홍교가 놓이기 전에는 주민들이 설치했던 뗏목다리가 수없이 떠내려가 불편이 많았다고 한다. 이 다리는 지금도 사용되고 있으며 홍교와 맞닿은 곳에는 콘크리트 다리가 새로 놓여져 연결돼 있다.

벌교 홍교는 조선 영조 4년(1728)에 선암사의 초안선사가 보시를 받아 건립했다고 전한다. 당시에는 사람들이 발을 물에 담그지 않고 길을 걷도록 하는 것이 큰 보시였다.

옛날에는 바닷물이 다리아래까지 들어왔으며 일제때는 포구로 많은 배들이 드나들었다. 홍교중간 지점의 천장에는 재앙을 막기위해 조각한 용두석이 강물을 바라보고 있으며 예전에는 이 용두 코끝에 풍경을 매달아 은은한 방울소리가 울려퍼졌다고 한다.

당시 주민들은 다리를 보수 할 때마다 중수비를 세웠다. 현재 다석개의 비석이 홍교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이 다리는 60년 마다 다리위에서 제사를 지냈는데 1959년 홍교 6주갑 제사를 치를 때 제사를 지내는 모습을 보기위해 수많은 인파가 모였다고 한다. 다음제사인 7주갑은 오는 2019년 치러진다.

/김병학기자
이 기획물은 지역발전신문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취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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