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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출고시간2012.11.14 19:21:39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편집자

농촌지역은 선거철이 되면 각종 공약이 남발했다. 청원군 옥산면 환희리의 환희교도 선거를 세 번 치른 후에 다리가 완성돼 일명 '선거다리'라고도 불리우고 있다. 지만교는 전국적으로 분포돼 있고 청원군 현도면 죽전1리와 제천시 송학면 시곡2리의 다리는 건설 당시의 애절한 사연이 있다. 또 문산석교는 대청댐이 서게 될 것이라는 것을 1천년전에 예언을 한 설화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선거다리라고도 불리우고 있는 옥산면의 환희교.

#선거철의 단골메뉴 '선거다리'인 환희교

청원군 옥산면 환희리는 새마을 운동이 끝난 1976년 전기가 들어왔다. 식수는 6.25전까지는 뒷내물(천수천:병천천)을 사용했다. 전쟁전에는 마을에 공동우물이 4개있어 수질이좋아 우물과 뒷내물 모두 식수로 사용했다. 마을 우물은 지하에서 샘솟는 것이어서 가뭄때면 수량이 감소해 뒷내물을 식수로 사용했다.

이후 천수천에 보가 생기면서 집집마다 우물을 파 간이상수도를 이용했다. 2005년 광역상수도가 들어왔다.

환희리는 냇가에 접한 마을로 가뭄과 홍수에 민감했다. 가뭄이 들면 식수가 문제였고 홍수가 나면 마을이 고립돼 일상생활에 문제가 생겼다.

1980년 큰 홍수가 났을 때는 3일간 마을이 고립되기도 했다. 당시 가장 큰 문제는 학생들의 통학이었다. 초등학교와 중학교는 비가 많이 오면 환희리 학생들은 조기 귀가시켰다.

또 주민들이 장보는 것도 문제였다. 큰 장은 조치원장을, 작은 장은 옥산장을 주로 봤다. 과거 조치원 생활권이었던 이 마을은 인근 산에서 나무를 해 지게로 지고 조치원으로 가 내다팔고 생활용품을 구입했다.

환희1리 내안에서 조치원으로 가는 길은 내안 송천 장자골 공북 중봉리 조천교를 거쳐 조치원으로 도보로 3시간 걸려 도착했다.

안동 권씨 집성촌인 환희2리는 뒷내에서 매년 모내기를 하기전 5월초에 경로잔치를 열었다. 이날은 동네 잔칫날이라 주민들이 즐거운 하루를 보냈다. 경로잔치는 천수천보로 인해 수질이 악화되자 마을앞 동구나무로 장소를 옮겨졌으나 젊은이들이 떠나면서 중단됐다.

이 마을 사람들은 다른 마을로 가기위해 뒷내에 다리를 건설하는 것이 가장 큰 일이었다. 한해 농사가 끝나면 마을주민들이 합심해 나무를 베고 가지를 쳐서 떼다리(삽짝교)를 놓았다. 떼다리 이후 철판에 구멍이 뚫린 '아나방'이 나오면서 쉽게 다리를 놓았으나 장마가 지면 이마저도 떠내려가 봄이되면 다리를 철거해 보관했다가 장마가 끝나면 다시 설치했다.

다리를 놓기전 살얼음이 얼면 어른들이 아이들을 업고 맨발로 내를 건너 학교에 데려다 주었다. 이후 '선거다리'가 나왔다.

선거다리라고 불린 이유는 선거때 마다 다리 건설이 공약으로 나왔으나 매번 공약(空約)으로 그쳤고 선거를 세 번치른 후에야 간신히 완성됐기 때문이다.

이 선거다리가 완공된 날 마을사람들은 동네경사라고 해 풍물을 치고 잔치를 벌였다. 그러나 이 다리도 장마때는 일부가 유실되는 등 불편을 겪어오다 1995년 현재의 다리가 완공됐다.

현도면에 있는 지만교는 다리가 노후돼 차량통행을 금지하고 있다. 도로옆에 건립과 관련한 비가 세워져있다.

#주민과 청와대 성금으로 세운 지만교

청원군 현도면 죽전리 옥포천에는 1964년까지 다리가 없어서 비만오면 800여명의 학생중 70%가 학교를 가지못했다. 일부는 무리하게 내를 건너다 물에 빠져 숨지기도 했다.

당시 사친회장이었던 낙산 안승갑 선생은 이같은 참상을 보지 못해 1964년 학생들의 성금으로 목교를 설치했으나 홍수로 유실돼 1965년 3월5일 학부모 총회에서 다리를 놓자고 제안해 학생 1인당 50원씩 5만원과 주민성금 3만950원으로 5월에 공사를 시작햇으나 자금난으로 1965년 10월말 5만원의 빚만 진채 공사가 중지됐다.

그러나 낙산선생은 관계기관에 진정을 하는 한편 당시 옥포국민학교 5학년 아들인 봉춘군에게 서울사대부속초등학교 1학년인 박정희 대통령 아들 박지만군에게 도와달라는 편지를 보내게해 청와대에서 5만원을 하사했다.

이에 청원군에서 보조한 4만원과 주민성금 9만8천320원 등 총 공사비 24만8천320원으로 1966년 1월 6일 새 다리를 완공시켰다.

이 다리는 주민들과 옥포초등학교 학생, 교사, 학부모들이 땀을 흘리며 돌과 흙을 나르며 만들었고 대통령이 보조해 준 역사를 남기기 위해 지만교라고 이름지었다.

그후 지만교가 노후화 돼 청원군은 1980년에 철거하고 길이 36m 폭 5m인 다리를 다시 놓았다.

그후 1993년 ㈜진로가 카스맥주공장과 진로소주공장 진입로 다리를 옆으로 돌려 만들면서 진로교라고 불리며 지만교는 폐쇄됐다.

지만교가 노후화 되면서 철거될 운명에 처하게 되자 이같은 사실을 안타까워 하던 현도면 번영회(회장 오경세)의 추진으로 옥포초에 얽힌 지만교의 역사와 정신을 남기기 위해 유실됐던 지만교 시비를 복원해 사실을 함께 기록했다.

주민들은 현재의 진로교 명칭을 지만교로 변경하기 원하고 있다.

제천시 송학면의 지만교도 비가 내리거나 홍수가 나면 시곡2리 마을의 학생들이 마을앞의 냇가가 넘쳐 학교를 다니지 못했다.

이에 이 마을에 사는 송학초등학교 4학년인 지모군이 박정희 대통령 아들인 박지만 군에게 편지를 보내 다리를 건설해 줄 것을 요청하자 청와대에서 다리를 건설할 비용을 지원했다.

이후 다리가 노후화 돼 2002년 8월 현재의 다리가 다시 세워졌다.

1천년전 대청댐의 예언을 품고 있는 청원 문화재단지내에 있는 문산 석교.

#문산 석교

대청댐에 호수가 생기면서 원래 있던 자리인 미천리에서 청원 문의문화재단지로 이전된 '문산 석교'는 길이가 5.4m, 폭 2.9m의 평교로 초기 가설은 고려말로 추정된다.

수몰지역이 된 미천리에는 설화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천년전인 고려 초기 고승인 일륜대사가 절터를 찾기위해 양성산성이 있는 산 정상에 올랐다. 대사는 산세를 보던중 산 아래 마을에서 이상한 기운을 발견하고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곳은 사방에 영명한 정기가 가득하다. 훗날 문과 의가 크게 일어나 숭상 될 것이다. 육로와 수로가 사방으로 막힘없이 뚫렸으 마을과 인물이 번성하리라. 그러나 어이하랴. 향후 천년뒤에는 마을이 물속으로 잠기고 새 터전을 마련하게 되리다"

이 때부터 이곳은 문의 또는 문산이라고 이름 불렸고 친년후인 현재 대청댐이 생겨 일륜대사의 예언이 맞았다.

또 다른 설화는 신라 문무왕 시절 당나라에서 돌아오던 원효대사가 미천리를 바라보며 "천년후에 산 아래에 물이 차서 호수가 생기고 용이 물을 만나 승천하듯 이 지역이 나라의 중심이 되고 국왕이 머물게 될 것이다"라고.

그로부터 천년후인 지금 청와대라는 대통령 별장이 생겨났고 대청댐이 생겼다.

설화속의 예언이 맞은 것인지 우연인지는 모르나 한때 사람들로 붐볐던 마을이 지금은 물속에 잠들어 있다.

문산석교는 정월이 되면 마을 사람들이 모두 나와 한 해의 평안과 건강을 빌며 다리밟기를 했고 이마을과 저마을을 연결해주는 '소통'의 역할도 했다.

지금은 이 다리가 있는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김병학기자
이 기획물은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취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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