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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출고시간2012.10.17 17:33:59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당재육교

경부고속도로 건설시 최대 난공사 구간이었던 당재육교. 지금은 폐고속도로로 과거의 역사를 대변해 주고 있다.

#당재육교

옥천군 동이면 우산리에 위치한 당재육교는 경부고속도로 건설당시 가장 악명이 높았고, 당재터널 공사에 대한 애환은 잊지 못한다.

공식집계 77명, 비공식적으론 수백 명.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희생된 이들이다.

건국 이래 최대 건설 사업이었던 만큼 희생자도 많았다고 전한다. 충북 청원군 옥산면에서 옥천군 청성면 묘금리까지 이어지는 대전공구 70㎞ 구간이 난공사였다.

경부고속도로 건설에는 ㎞당 평균 1억원이 들었다. 대전공구는 평균 1억2천만원. 대전에서 묘금리 구간은 1억7천만원이 들었다고 전하고 있다.

금강 2·3·4 교와 당재육교, 당재터널 등 난공사가 집중돼 있었다. 경부고속도로 건설시 뒤늦은 장마로 금강1교의 경우 가교만 네 차례 유실됐다.

이런 중에 대전육교 붕괴 사고로 3명이 숨지고, 30여 명이 다쳤다. 대전공구 현장소장이 과로로 사망하는가 하면 직원 한 명은 임시가교에서 떨어져 숨지기도 했다.

당재터널 공사는 그중에서도 악명 높았다. 옥천군 금강휴게소 동남쪽 28㎞ 지점에 있는 당재터널 공사 지역은 토사로 된 퇴적층으로 발파작업을 하면 토사가 쏟아져 내리기 일쑤였다.

처음 20m가량 파고들어갔을 때는 낙반사고로 3명이 숨지고 1명이 중상을 입었다. 사고 당시 인근 주민들이 '신령이 깃들었다'고 믿고 있던 느티나무를 벤 군 책임자가 사고를 당하자 많은 작업자가 공사를 내팽개치고 도망치기도 했다.

모두 13번의 낙반사고가 있은 후 공사를 맡았던 현대건설은 이 구간에서 흑자를 포기했다. 단양 시멘트 공장에서 보통 시멘트보다 20배 빨리 굳는 시멘트를 만들어 200㎞ 떨어진 현장까지 날랐다. 500여 명이 밤낮없이 터널 공사에 매달렸다. 그 결과 3개월이 걸릴 것으로 예상됐던 공사를 25일 만에 마치고, 개통 10일 전인 1970년 6월 27일 당재터널을 완공했다.

금강휴게소의 위령탑에는 경부고속도로 건설과 관련해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다.

'세상에 금옥보다 더 고귀한 것은 인간이 가진 피와 땀이다. 크고 작은 어떤 사업이나 피와 땀을 흘리지 않은 것이 없고 또 피와 땀을 흘리고서 무슨일이고 이루지 못한 것이 없다. 여기 이 서울 부산간 고속도로야 말로 피와 땀의 결정이니 무릇 2년5개월동안 연인원 890만명이 땀을 흘렸고 그중에서도 피를 흘려 생명을 파치신이가 77명이었다.

그들은 실로 조국 근대화를 향한 민족행진의 산업전사요 자손만대 복지사회 건설을 위한 거룩한 초석이 된 것이니 우리 어찌 그들이 흘린 피와 땀의 은혜와 공을 잊을 것이랴. 여기 그들의 혼을 위로하기 위해 정성들여 탑을 세우고 이 앞을 지날적 마다 누구나 옷깃여미고 묵도를 올리리니 혼들이여 내려와 편안히 깃드옵소서 웃으옵소서' 라고.

안터교

안터교 주변에는 고인돌 공원이 있다.

#안터교

옥천군 동이면 석탄리의 안터교는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이 거주하돈 곳으로 고인돌 등 많은 선사유적이 있다.

이곳은 예로부터 '살기좋고 편안한 터전'이라고 하여 안터로 불리었으며 마을이름을 따 '안터교'로 명명하였다.

인근의 고인돌 유적은 선사시대의 많은 유적이 남아있어 사람이 살기에 가장 좋은 곳이었다는 것을 지금도 증명해주고 있다.

안터교는 길이 46m, 폭 9m로 2001년 1월부터 12월말까지 1년간의 공사 끝에 준공이 됐다.

안터교 인근에는 낚시를 즐기는 강태공들이 즐겨찾는 곳으로 유명하다. 또 이곳의 반딧불이는 전국적으로 명성을 얻고 있다.

정수교

정수교는 하수를 맑은 물로 처리해 붙여진 이름이다.

#정수교

옥천군 군북면 이백리의 정수교는 지난 9994년 옥천하수종말처리장 건설시 집입로에 설치한 교량으로 하수를 맑은 물로 처리하여 보내는 곳이라고 하여 '정수교'로 불리워지고 있다.

길이는 45m, 폭은 6.4m다.

옥천 하수종말 처리장을 가기 위해서는 이곳을 지나야 한다.

다리 인근에는 옥천 이지당이 자리하고 있어 한번씩 둘러보는 것도 좋다.

이지당은 1977년 12월 6일 충북유형문화재 제42호로 지정됐다. 조선시대 중엽 옥천읍 옥각리에 사는 금(金), 이(李), 조(趙), 안(安)의 4문중이 합작해서 세운 서당이다.

당초에는 각신동(覺新洞)이라는 마을 앞에 있었으므로 각신서당(覺新書堂)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후학을 가르쳤던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 조헌(趙憲:1544~1592)의 친필로 된 '각신서당'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청석교

강감찬 장군의 설화가 살아있는 청석고는 모기가 없기로 유명하다.


#청석교

옥천의 장계관광단지내에 있는 청석교는 신라문무왕때 만들어 졌다는 이 다리는 초기축조 기록은 없지만 다리의 설계나 판선에 고색창연한 흔적이 있다.

길이 6.9m, 폭 2.2m, 높이 1.75mfh 하천 바닥에 장대석을 깔고 그 위에 교각을 두 개 세워 넓은 상판석 여섯장을 연결해 다리를 놓았다.

원래에는 증약면의 경부선 철길 아래에 있었으나 일제때 경부선 철도 가설공사 옆으로 옮겨진뒤 도로 확장 공사로 또 다시 훼손될 것 같아 문화재청의 승인을 받아 2003년4월 지금의 자리인 장계관광단지로 이전했다. 오랜세월 자리를 지켰던 청석교가 두 번이나 재자리를 잃는 불운을 겪은 것이다.

고려시대 강감찬 장군이 경주로 부임해 가던중 옥천에서 하루를 묵었다. 그날밤 고을 주민들이 강감찬 장군의 명성을 들어 알고 장군의 솜씨로 청속교 일대에 득실거리는 모기떼를 없애달라는 부탁을 했다고 한다.

장군이 고을 주민들의 말을 듣고 실제로 청석교에 가보니 수많은 모기떼가 기승을 부려 다닐 수가 없었다고 한다.

이를 본 장군은 모기떼를 향해 '이놈 모기들아! 아무리 말을 못하는 미물들이라 하여도 백성을 괴롭히는 죄는 용서할 수 없다. 당장 내 앞에서 물러나지 않으면 너희 종족을 멸망시킬 터이니 썩 물러가거라' 라고 소리쳤다.

장군의 목소리가 얼마나 크고 위엄이 넘치는지 인근의 모기떼는 물론이고 수십리안의 모기들이 벌벌 떨면서 모두 도망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이 같은 전설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지금도 이 다리 주변에는 고려때부터 모기가 없기로 소문 나 주민들이 매우 신기해 하고 있다.

옥천군에는 이외에도 또 다른 청석교가 있다. 정지용 시인의 생가 싸릿문 앞에 길이 6m, 폭 1m 정도의 판석이 놓여있다. 집앞 하천에 있던 것을 도로가 확장되면서 이곳으로 이전했다.

/김병학기자

이 기획물은 지역발전신문위원회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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