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빠코챠

2025.02.04 13:42:48

김나비

시인, 한천초등학교병설유 교사

암스테르담행 비행기에 올랐다. 오랜만에 나선 여행이라 설렘과 두려움이 몰려왔다. 14시간 15분을 날아 도착한 암스테르담에서 6시간을 대기하여 다시 리마행 비행기에 환승했다. 그리고 12시간 30분을 더 날았다.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편 책을 읽다 무심코 좌석 앞에 있는 패드를 검색했다. 거기엔 한국영화가 탑재되어 있었다. <우주인>을 비롯한 6편의 한국영화를 덴마크 비행기 안에서 보며 우리 문화의 힘을 새삼 느꼈다. 기내식을 4번이나 먹는 기나긴 시간이었지만 우리 말로 된 한국 영화를 보며 왔기에 지루함이 반감되었다.

공항을 나오자 페루의 훈훈한 바람이 얼굴을 쓸어주었다. 입고 있던 패딩과 두꺼운 청바지를 벗고 가벼운 차림으로 걸었다. 남미는 우리나라와 반대인 남반구에 있지만 왠지 친밀감이 든다. 지난 학기 동안 나는 네루다와 마르케스의 작품을 비롯한 남미 문학에 빠져 살았다. 그들의 역사가 열강의 지배를 받아온 아픈 시간이 많았기 때문에 어쩌면 동질감을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잉카문명의 신비함과 남미의 환상 문학은 나를 유혹하기에 충분했다. 산마르틴 광장을 비롯한 구시가지를 돌고 신시가지로 갔다. 사랑의 공원에 서서 거대한 태평양 바다를 보며 생각에 잠긴다. 칼세이건이 말한 '창백한 푸른 점' 지구에서 나는 먼지처럼 떠돌고 있다. 먹먹하게 젖어 드는 파도 소리를 듣다가 오가는 사람들에게 시선을 주었다. 백인과 메스티조인, 아시아인 등 다양한 인종이 활보를 하고 간간이 원주민인 인디오도 스쳐간다. 원주민들은 언젠가 다큐멘터리에서 보았던 미라 소녀 라돈체라의 옷과 비슷한 것을 입었다.

웅크린 한 생애가 환하게 깨어난다

고산의 만년설 속 단잠에 빠진 소녀

동굴속 어둠에 안겨 어떤 꿈을 꾸었을까

제물이 되기위해 설산을 오르던 밤

코카잎 입에 넣고 두려움을 씹을 때

두고온 라마의 울음 귓전에 술렁였겠다

박물관 불빛 아래 파헤쳐진 깊은 잠

꽁꽁 언 기억이 부스스 녹아내리면

수백년 건너온 침묵 한올한올 풀어진다

* 카빠코챠: 잉카지역의 인신공희 풍습으로 기근과 황제 승하 제사 시 행해졌으며, 500년 된 미라가 발견되었다.

- 김나비 「카빠코챠」 전문

그들은 스페인의 침략과 지배를 받으며 얼마나 아픈 시간을 지나왔을까. 깨지는 파도의 포말이 눈물처럼 하얗게 번진다. 바다에서 눈을 거두어 쇼핑몰 쪽으로 향하는데, 길에 보따리를 펴고 앉아있는 작고 까만 원주민 여인이 동공에 들어온다. 그녀는 실로 모자를 쉼 없이 짜고 있다. 옆에는 네 살쯤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와 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함께 앉아있다. 엄마를 따라 행상을 나온 듯한 아이들의 해맑은 모습과 그녀의 분주한 손놀림이 대조를 이루며 생의 무게가 느껴졌다. 아이를 거리로 데리고 나와 생을 이어 가야 하는 그녀의 마음을 짐작해 본다. 눈이 마주치자 그녀가 먼저 "hola!" 라고 인사를 한다. 나도 "올라!"라고 대답하며 다가갔다. 펼쳐진 좌판 위에서 분홍색 모자를 골랐다. 돈을 내고 머리에 쓰자 그녀는 "Gracias!"라고 감사의 인사를 한다. 가슴 속에서 파도가 일렁인다. 열심히 살아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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