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노드라마

2024.04.08 14:53:50

김나비

시인, 한천초등학교병설유 교사

연극의 3요소는 희곡, 배우, 관객이다. 보통 배우는 희곡, 즉 대본을 보고 출연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결정한다. 그러나 나는 희곡을 보지도 못한 채 배우로 캐스팅되었다. 그런데 이번 생의 배역은 좀 묘하다. 고요가 몸을 불리는 밤이면 골방에 박혀 모국어로 나를 찾다가도, 소리가 키를 세우는 낮이 오면 외국어를 쓰는 아이들 속에서 나를 잊는다. 그러나 그 어떤 시간에도 나는 혼자다.

오늘도 분장을 하고 무대에 오른다. 연극이 3막이나 4막으로 이루어지듯 나의 모노드라마 또한 대체로 4막이다. 간혹 시 창작 강사 역할이 주어지는 날이면 5막을 올리기도 한다. 오늘은 4막이 있는 날이다. 막이 오르는 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 새벽 6시 50분에 자동차 시동을 건다. 청주에서 진천으로 한 시간 이십여 분을 달려 무대에 도착한다. 8시 15분쯤 도착하면 1막이 시작된다. 1막의 관객은 12명의 아이들이다. 한국 아이가 단 한 명도 없다. 엄마 아빠가 모두 외국인인 아이가 9명이고 한쪽 부모만 외국인이 아이가 3명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러시아 1명, 우크라이나 1명, 우즈베키스탄 4명, 카자흐스탄 3명이다. 즉 중앙아시아 계열의 외국인이 9명이고 필리핀 다문화 1명, 베트남 다문화 1명, 캄보디아 다문화 1명으로 동남아 계열 다문화가 3명이다. 1막을 마치고 다시 한 시간 이십 분을 달려가면 2막이 시작된다. 2막의 관객은 가족들이다. 나는 분장을 지우고 앞치마를 입고 푸시시한 엄마 역할을 수행한다. 저녁을 하고 빨래를 하고 청소를 끝낸 뒤, 관객들이 각자의 방으로 들어가면 3막의 커튼을 연다. 3막엔 서재로 들어가 밀린 원고를 쓴다. 3막의 관객은 책상 위의 조명과 적막과 어둠이다.

새들도

사람들도

박제로 걸려있다

끝없이 펼쳐지는 마술사의 풍경들

시간이 똬리를 튼 채 바삭하게 멈췄다

홀로 걷는 그녀가 햇살을 튕겨본다

멈춰진 사람들은 그녀를 외면한다

변하지 않는 곳에서 변한 것은 그녀뿐

아무리

흔들어도

모두가 그대로인 곳

그녀는 날 선 몸을 바다로 던진다

누군가 구름을 찢어 눈물을 닦아준다

-김나비, 「모노드라마」전문

동생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린다. "언니 언니는 죽으면 몸이 눈사람처럼 스르르 녹아내릴 거 같아. 도대체 몇 명 역할을 하는 거야?" 그러나 그건 모르는 소리다. 난 제대로 된 똘똘한 배역을 맡지 못해서 하루에도 서너 가지 배역을 흘낏거리며 사는 것인지도 모른다. 야무진 하나의 배역만을 받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그러나 그건 가끔 하는 하품 같은 것이다. 난 이렇게 여러 배역을 넘나드는 것이 좋다. 힘겹게 역할을 소화해 내는 짜릿한 기쁨이 있다. 쉬운 건 매력이 없다.

이제 마지막 4막이 남았다. 수면 잠옷으로 갈아입고 역할 속으로 들어간다. 이번 역은 잠멍을 때리는 아줌마다. 불멍, 물멍처럼 나는 잠멍을 즐긴다. 남들은 자는 동안 다양한 꿈을 꾼다는데, 난 거의 모든 잠 속에서 꿈이 없다. 기절한 것처럼 멍때리다 눈을 뜨면 새벽이다. 그러니 잠멍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다시 내일의 연극을 위해 눈을 감는다. 언제나 내 삶은 모노드라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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