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을 오리다

2020.07.06 17:15:06

김나비

수필가,원봉초등학교병설유교사

테라스로 나간다. 포트에 물을 올리고 금준미를 다기에 담는다. 새소리가 귀를 저미며 날아든다. 간간이 바람이 분다. 바람의 지휘에 맞춰, 처마 밑 풍경은 쨍그랑 쨍그랑 발성 연습을 한다. 여인의 치마 속처럼 산들이 빼곡하게 둘러쳐진 작은 집에 안겨 찻 잔을 손에 감는다. 이 깊은 산골에도 계절은 피고 진다. 시야에 닿는 곳 여기저기에 케스터네츠같은 작은 망초들이 속살거리며 꽃을 피우고 있다. 개울 건너 검은 기화 집 담벼락에는 접시꽃이 심벌즈처럼 함박웃음을 터뜨리고 있다. 옆으로 몸을 트니 절벽 위 담쟁이들이 등뼈를 길게 늘리며 산으로 산으로 오르고 있다. 마치 아득하게 퍼지는 오카리나 소리 같다. 온힘을 다 쏟고 있는지 푸른 힘줄이 가득하다. 햇살은 온 세상을 따듯한 혀로 조심스럽게 핥고 있다. 커피를 마시다 주변에 눈을 떼어주다 책장을 넘기기를 반복한다.

별안간 후두둑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한다. 바람은 전력 질주를 해서 달려오고 풍경은 진저리치며 괴성을 지른다. 풍경 속 물고기가 화들짝 놀라 허공에 널을 뛴다. 보던 시집을 덮고 눈을 먼 하늘에 건다. 굵은 빗방울이 하염없이 내린다. 하늘과 땅을 잇는 비에 맞은 사물들이 타닥이며 합창을 한다. 빗줄기는 허공을 분할하며 떨어진다. 느닷없이 가슴이 예리한 칼날로 베인 듯 하다. '나는 누구? 여긴 어디?' 갑자기 몰려드는 생각들이 쓰름쓰름 머릿속을 갉는다. 생각에 생각이 겹겹이 쌓인다. 답은 없고 머리만 지끈 거린다.

여름이 익고 있다. 송두리 째 도려내진 봄의 뒷모습이 아스라이 멀어지고 어느새 여름이 성큼 다가왔다. 코로나 19로 인해 2020년 봄이 일상에서 싹뚝 잘렸다. 아무도 예상 못했던 시간들이었으리라. 학교에도 봄은 잘려 소리 없이 절룩거렸다. 예년 봄 같으면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흐드러지게 교정에 피고 아이들의 발 소리가 바람 결에 실려와 귓전에서 울렸을 것이다. 그러나 올 봄의 학교는 정적 그 자체였다. 벚꽃도 소리 없이 홀로 피었다지고, 목련도 하얀 손을 허공에 흔들다 힘없이 고개 숙이곤 했다. 아이들의 재잘거리는 소리 아이들의 뛰어노는 소리들이 계절의 소리와 버무러져 행복한 풍경이었음을, 아이들이 없는 운동장을 보며 새삼 깨달았던 계절이다. 아무리 예쁜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었다고 한들 함께 나눌 아이들이 없다는 것은 연주자 없는 음악회와 같았다.

지금은 등교 개학을 한 지 한 달이 흘렀다. 달라진 일상에 멍한 여름이 어느덧 무르익고 있다. 언제쯤 코로나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입에는 마스크를 하나씩 쓰고 개인 물병을 하나씩 들고 전사처럼 교정에 돌아온 아이들. 교실에서도 운동장에서도 거리 두기를 하면서 씁쓸한 기분이 드는 것은 왜일까. 손을 잡고 반가워하는 아이들을 제지하며 세상이 참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생각이 머리를 뚫고 들어온다. 급식소는 칸칸이 가림막을 치고 밥을 먹을 때도 아이들은 가림막 속에서 홀로 침묵하며 수저를 든다. 서로 부딪기고 안고 하면서 정이 드는 법인데, 사람 사는 재미가 점점 사라지고 삭막해지는 것 같아 안타깝다.

찻잔을 내려다본다. 연한 녹색의 향이 코끝에 와서 부서진다. 입에 한 모금 넣고 굴려본다. 입안에 아이들의 목소리가 확 퍼지듯 청량한 기운이 퍼진다. 가을에는 코로나가 물러나서 아이들이 다정하게 어깨동무하고 책을 함께 볼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도해 본다. 아이들의 웃음소리에 버무려진 상쾌한 계절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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