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포케(epoch)

2019.07.07 15:47:39

김나비

시인, 주성초등학교병설유교사

벽이 있다. 어떤 사람은 벽을 넘고, 어떤 사람은 돌아서 다른 길을 가고 또 어떤 사람은 벽을 부순다고 했던가. 나는 과연 벽을 만나면 어떻게 할 것인가. 나는 누군가와 논쟁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사람은 누구나 생각이란 게 있고, 나도 내 나름대로 사고를 하는 독립적인 존재이니까.

책 읽기 모임에서 만난 어떤 이가 다짜고짜 내게 물었다. "선생님은 좌파입니까 우파입니까· "나는 대답했다. "저는 양파에요." 그러자 그녀가 다시 묻는다. "까도 까도 또 뭔가가 있는 양파라는 말씀인가요·" 나는 답했다. "아니요 까도 까도 아무것도 없는 양파죠. 양파는 까면 깔수록 아무것도 없어요. 다 까고 나면 허공만 남지요. 저는 그런 양파입니다. 그래서 저는 알면 알수록 알아갈 게 없는 허무한 사람이지요."

그녀는 다행이라고 했다. 자신은 우파인데 내가 혹시 좌파이면 모임이 힘들 것 같다고 했다. 나는 정치는 모른다. 별로 알고 싶지도 않다. 이 나라에 발붙이고 사는 한 최소한의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 아니냐고 누군가가 말할 때 마다 난 대답했다. 무관심도 관심중의 하나라고.

그런데 그녀는 나를 볼 때 마다 좌파라 했다. 난 그때마다 아무파도 아니라고 항변했다. 그러나 그녀는 내게 자신도 모르게 좌파의 물이 들어 있는 사람이라고 물마시듯 말했다. 난 그녀를 보며 말했다. "좌파건 우파건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요· 스스로의 철학을 갖고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하면 되는 거 아닌가요·" 라고.

오늘은 그녀가 유명한 앵커에 대해 입을 열었다. 그녀는 그 앵커를 정권의 개라고 했다. 이 정권이 기울면 바로 감옥행이라고. 나는 그 앵커는 잘 모르지만 그의 목소리와 반듯한 외모를 좋아한다고 했다. 그러자 그녀는 그간 앵커의 보도에 대해 이야기 했다. 모두가 편파적인 보도였다고. 완전 쓰레기라고. 나는 설마 그랬겠냐며 일부러 그녀의 맘을 건드렸다. 간혹 그런 보도도 있지 않았겠냐고. 왜 그렇게 세상을 좌 아니면 우로 보냐고 했다. 왜 한 쪽 눈만 뜨고 세상을 보냐고. 양쪽 눈을 다 뜨고 세상을 보라고. 본인의 생각과 같지 않다고 그 사람이 틀리다고 말하는 건 유아적 발상 아니냐고. 이런 저런 다양한 시각이 존재하는 것이 진정한 민주주의 아니냐고. 내가 정치에 관해 무지한건 맞는데 적어도 한 눈 뜨고 세상을 바라보지는 않는다고. 그렇게 굴절된 시각으로 보니까 세상이 다 비뚤어진 것이라고. 그동안 눌러왔던 이야기를 다 퍼부었다. 그녀는 뾰족한 내 눈빛을 보며 calm down!이라고 했고, 나는 일그러지는 그녀의 미간을 보며 에포케(epoch)!라고 했다. 그리고 그녀와 나 사이에 침묵이 간지처럼 삽입되었다.

문득 영화 아쇼몽을 떠올렸다. 똑같은 살인사건을 가지고 그 장소에 있던 사람들의 견해가 다 달랐다. 아내는 아내의 시각으로 사건을 봤고, 사무라이는 그의 시각으로 사건을 봤다. 그리고 도적은 도적의 시각이고, 심지어 그것을 목격한 나무꾼조차도 다 다른 이야기를 했다. 이는 기억의 가변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또 관점의 차이로 볼 수 도 있을 것이다. 모두가 자신의 생각과 사고로, 자신이 보고 싶은 대로 보기 때문에 그런 결과가 온 것이리라.

벽을 보았다. 사람의 벽에 막혀 잠시 걸음을 멈춘다. 그리고 생각을 한다. 벽을 넘을 길이 없을 것 같다. 그 벽을 허물어뜨리는 것은 더더욱 힘든 일이리라. 난 돌아가기로 했다. 조용히 벽이 없는 길로 가리라. 그리고 판단을 유보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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