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보러, 일보러

2018.09.16 19:36:15

김희숙

수필가, 원봉초병설유치원교사

물과 간단한 음식만을 챙긴다. 문명의 도구는 당분간 기억에서 지우기로 한다. 핸드폰도 안경도 책도 배낭에 넣는다. 고비 사막을 향한 11일간의 여정 중 두 번째 맞는 날이다.

달리는 차창 밖으로 말들이 나타났다 멀어진다. 가도 가도 비슷비슷한 풍경이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창밖에 눈을 떼어 주거나 상념에 젖는 것 뿐이다. 그도 지루해 지면 눈을 감는 일이다. 얼마나 달렸을까. 방광이 그득하게 부푼다. 달리던 차를 세운 나는 우산을 들고 초원으로 향하며 일행들에게 말보러 가자고 소리친다.

몽골 사람들은 화장실을 갈 때 '말보러 간다'고 한단다. 예전부터 말은 게르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말 떼 속으로 들어가 볼일을 보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그런 말이 생겼다고 한다. 나는 초원에 길을 내며 들어가 우산을 펴고 기본적인 욕구를 해결한다. 일행들도 쭈뼛거리며 우산을 펴기 시작한다. 대대적인 노상방뇨가 시작된다. 일생동안 이런 방대한 집단 방료행위는 처음 본다. 나는 묘한 동지애를 느끼며 그녀들의 하얀 엉덩이를 본다. 말을 보고 온 후 우리는 더 친밀감을 느끼며 조였던 마음은 끈을 푼다. 멀리서 말 떼가 우리를 쳐다보고 있는 듯하다. 아무리 너희들이 호모파베르라고 해도 문명을 벗어나면 별 수 없다는 듯 끌끌거리는 것 같다.

또 달린다. 저만치 앞의 풍경이 당겨진다. 누군가 뒤에서 풍경이라는 롤 스크린을 자꾸 당기는 것 같다. 말떼는 퇴장하고 이제는 양과 염소 떼가 등장 한다. 목초지에서 사는 동물들은 풀의 크기에 따라 분포를 달리한다. 말은 이가 위아래 다 있어서 너무 아래에 있는 풀은 먹을 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 풀이 좀 큰 쪽에 산단다. 소는 혀로 풀을 감아먹기 때문에 아래의 풀도 먹을 수 있고 양 염소는 아주 짧은 풀도 다 먹을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풀이 긴 곳에서는 말을 짧은 곳에서는 양과 염소만 볼 수 있다. 세 시간을 달리고 우리는 다시 말을 보러 간다. 이제는 자연스럽게 우산을 펼치고 일을 본다. 일을 보는데 싱싱한 냄새가 코끝으로 스민다. 야생 부추다. 서 너 가닥을 뜯어 입에 넣는다. 톡 쏘는 알싸한 맛이 상쾌하게 입안으로 퍼진다. 배설의 즐거움 뒤에 맛보는 풀 향기의 청량한 맛은 정신까지 맑게 해 준다. 기본적인 욕구 충족이 얼마나 큰 행복감을 주는지 문명을 떠나와서 새삼 느낀다.

다시 달린다. 해발 1768m정도의 높은 고도의 화강암지대다. 바위로 된 산이 겹겹이 쌓여있다. 돌 때문에 차는 가다 서다를 반복한다. 한 시간여 곡예운전이 끝나고 저만치 숙소인 '바가 가자린 촐로' 게르의 하얀 지붕이 눈에 들어온다. 게르는 자가발전으로 전기를 쓰고 있어서 밤 열시 이후는 전기를 사용할 수 없다. 샤워도 공용 시설에서만 가능하다. 나는 핸드폰을 충전하는 일도 샤워를 하는 일도 일기를 쓰는 일도 생략한다. 그동안 나는 얼마나 문명에 길들여진 것일까. 문명에서 떠나와 겨우 이틀도 지나지 않았는데 머리카락은 끈적이고 땀에 절은 옷은 냄새가 난다. 온몸에 날개가 돋으려나 스멀스멀 몸이 가렵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도 좀 지나면 익숙해 질 것이다.

'인간은 도구를 만들었을 뿐 아니라, 그를 통해 자신을 둘러싼 환경을 변형시키고 결국 자기 자신도 만들어 가는 존재'라고 베르그송이 말했던가. 그러나 오늘 나는 호모파베르이기를 거부한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아무것도 변형시키지 않고 그냥 그 속에 젖어 들고 싶다. 오롯이 나라는 존재를 잊고 자연 속에 침잠하고 싶은 날이다. 별이 밝다. 너는 누구냐고 내게 조근 조근 묻는 듯하다. 나는 별빛에 내 눈빛을 포개며 이국의 밤이 익어가는 것을 본다. 고요한 밤, 소리를 죽이며 말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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