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다리

2024.07.08 14:03:43

김나비

시인, 한천초등학교병설유 교사

농다리로 차를 몰았다. 진천에 발령을 받은 후 일 년 반이 흘렀지만,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 아니, 갈 수가 없었다. 새벽 여섯 시 사십 분에 집을 나와 장거리 운전으로 출근하랴, 외국인 아이들에게 적응하랴 정신 줄을 놓고 살았다. 한국 아이가 단 한 명도 없는 교실에서 수업을 한다는 것은, 고구마를 다섯 개쯤 먹은 후 냉장고를 열었는데, 물이 한 방울도 없는 것을 알았을 때 심정이다. 퍽퍽 가슴을 치며 문을 닫고, 그 난감함에 기대어 세 학기를 지냈다. 이제야 물이 없어도 조금씩 침을 삼켜가며 고구마를 넘길 수 있을 만큼 적응이 되어간다. 서서히 숨이 쉬어지는 것 같다. 숨을 쉬고 나니 세상이 보이고 주변이 눈에 들어왔다. 하여 진천의 명물이라는 농다리를 가보고 싶어졌다.

다리에 도착했을 때 노을이 사방에 번지고 있었다. 노을이 지는 시간, 하루 중 내가 제일 좋아하는 순간이다. 그 처연하게 세상을 물들이는 색감이 좋다. 서서히 내려오는 붉음을 보고 있노라면 누군가 색을 빌려 먹피 같은 말을 하는 것 같다. 가슴을 옥죄는 듯한 그 붉은 언어가, 에밀레종의 마지막 타전 후 날아드는 소리처럼 아득한 울림을 준다. 말없이 말을 건네는 먹먹하고 진한 느낌을 온몸으로 듣는다. 점점 붉어지는 하늘이 마치 사과 껍질 같다. 여름날의 비바람과 뙤약볕을 견딘 후 시리고 아린 상처 난 붉은 기억을 붕대로 돌돌 말아 감싸고 있는 사과.

땡볕과 소나기 질펀하게 뒹굴다 간 곳

뱃속에 하얀 살점들 뭉근하게 익으면

저녁놀 한칼을 베어 온몸에 두른다

- 김나비 「사과」 전문, 나래시조 2023 겨울호.

노을 아래, 사람들이 옹기종기 다리를 건너고 있다. 나도 다리의 몸통을 밟고 서서 눈을 감는다. 흐르는 물소리 위에 길게 누워있는 다리가 마치 오래전 그날로 나를 이끄는 것 같다. 고려 초에 축조했다는 천년이 넘은 돌다리는 하늘의 28수 별자리를 따라 28칸 돌 교각으로 조성되었다고 한다. 또 다리가 지네 형상이라서 지네 '농(籠) '자를 붙여 '농다리'라 불렀다고 한다. 눈을 감고 시각을 차단하니 청각이 날을 세운다. 물소리가 더 크게 귀를 파고든다. 잘살고 있는 거냐고 물이 돌돌 거리며 내게 묻는다. 어떤 게 잘 사는 것인지는 도무지 알 수 없어서 홀로 낯선 땅에 서성이고 있노라고 나직이 답한다.

등을 밀어주는 저녁 바람을 느끼며, 다리를 건너 미르길을 향해 올라간다. 얼마나 갔을까. 용의 형상과 여의주를 마주한다. 허공에 걸려있는 여의주를 만진다.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글자가 옆에 쓰여 있다. 동그란 여의주를 만지며 눈을 감는다. 아무 탈 없이 하고 싶은 일 하며 조용히 살게 달라고 소원을 빌어 본다. 내려오는 길, 한 번 더 여의주를 만지며 눈을 감는다.

시를 생각하며 농 다리에 한 발 한발 발을 딛는다. 발소리 뒤로 멀어지는 다리를 돌아본다. 언제 다시 올지 모르지만, 불그스름한 돌다리에 내 발자국을 슬쩍 숨겨 놓는다. 차의 시동을 묵묵히 누워있는 다리를 놓고 달린다. 싸이드 미러를 본다. '사물이 거울에 보이는 것보다 더 가까이 있음'이라고 쓰여 있다. 가까이 내려온 하늘이 충혈된 눈으로 나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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