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양연화(花樣年華)

2022.04.12 15:28:37

김나비

주성초등학교병설유교사·시인

풍경소리 번지는 마당으로 발을 딛는다. 소소리바람*에 나뭇가지들이 파르르 떤다. 떨고 있는 잔가지를 어루만지듯 가지 사이로 볕뉘가 비친다. 수없이 뻗어있는 가느런 가지 끝, 껍질을 깐 삶은 달걀 같은 하얀 봉우리들이 가득하다. 겨우내 못다 한 이야기를 하려는지 입을 살짝 다문 잎들이 한껏 부풀었다. 나무 밑동을 본다. 나무가 살아온 세월을 말해 주는 듯 푸른 이끼를 달고 있는 울퉁불퉁한 껍질이 꼭 노인의 몸피 같다. 손을 대자 거친 감촉이 가득 만져진다. 거무튀튀한 나무껍질이 한 톨 떨어진다. 굴러떨어지는 나무껍질을 따라 시선을 떨군다. 바닥엔 맥문동이 쥐똥 같은 씨앗을 달고 납작하게 누워있다. 지난해에 여물었을 검은 씨앗이 겨울의 세찬 바람 속에서도 잎을 꼭 쥐고 붙어있다. 씨앗을 따서 이리저리 살핀다. 씨앗 위를 새소리가 덮는다. 눈을 드니 직박구리가 부푼 꽃들 사이에서 노래를 부르다 허공으로 사라진다. 소리 따라 허공으로 시선을 던진다. 바람의 입김에 움찔 가지가 물결친다. 내 마음도 따라서 움찔거린다. 벌써 봄이 성큼 다가왔다. 벙글어가는 하얀 목련꽃을 보자 그녀의 뽀얀 얼굴이 스친다.

늘 목련처럼 환하게 웃는 그녀. 그녀가 오랜 도전 끝에 이직을 했다. 그토록 간절히 원하는 직업이었기에, 요즘 그녀의 날씨는 아주 맑음이란다. "나에게 이런 일이 생겨도 되나?" 싶을 정도로 너무 행복한 나날이라고 한다. 작은 일에도 감사할 줄 알며 뽀얀 미소를 날리는 그녀가 한없이 귀엽다. 그런데 직업이 바뀌고 나니 주변 사람들이 대하는 태도와 표정마저도 바뀌었다고 한다. 전에는 서류를 갖다 내면 "거기 두고 가세요!"라고 하며 한겨울 북풍처럼 눈도 마주치지 않던 직원들이, 요즘에는 "도와줄 것 없으세요?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씀하세요."라며 오뉴월 햇살처럼 따사로운 미소를 날린다고 한다. 만나는 아이들마저도 불과 한 달 전만 해도 억새처럼 뻣뻣했었는데, 이제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면 "네." 하고 엿가락처럼 말랑해졌다고 한다.

매일 뜨는 태양도 자신을 위해 떠오르는 것 같고, 새들도 자신을 위해 노래하는 것 같단다. 출근하는 발걸음이 날아갈 것 같다고 한다. 나는 그녀에게 말한다. "사람들이 변한 게 아니고 너의 마음가짐이 변한 거 아니야? 기억의 필름을 되돌려봐~!" 그러자 그녀는 "그런가?" 하며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다른 사람이 너를 대하는 태도나 시선에 마음을 두지 말고 네가 하고 싶은 일에 지향점을 가져보라 말한다. 나는 나 자신에게 하고픈 이야기를 그녀에게 말하면서 내 마음을 또 한 번 다져 본다. 누구나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우리는 늘 타인과 더불어 살아야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리라.

그런 그녀를 보며 화양연화(花樣年華)를 떠올린다.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시간이라는 화양연화. 누구나 인생에서 빛나는 순간이 있을 것이다. 사람에 따라 그 시기는 다 다르게 올 수 있지만 한 번 쯤은 그런 시기가 있을 것이다. 화영연화를 유년기에 맞을 수도 있고, 학창시절에 맞이할 수도 있으며 어쩌면 노년기에 그런 순간을 맞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녀에게 화양연화는 지금이 아닐까. 43세에 결혼을 하고 45세에 아이를 낳고 그리고 46세에 평생 직장을 갖게 된 그녀. 그녀의 화양연화는 40대인 것 같다. 그러니 얼마나 행복하랴. 그녀가 행복해 하니 나도 덩달아 구름을 탄 것 같다. 그녀의 화양연화가 오래 지속되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고운 미소로 주변을 더 밝게 물들였으면 좋겠다.

아직은 이른 봄, 싸늘한 바람을 다독이며 햇살이 따사롭게 내리 쬔다. 금방이라도 터질 듯 하얗게 벙글어가는 목련 위로 풍경소리가 쨍그랑거리며 떨어진다. 마치 그녀의 청량한 웃음소리처럼.

* 이른 봄의 맵고 스산한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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