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과 봄 사이

2019.03.03 15:38:19

김나비

시인, 주성초등학교병설유교사

덕수궁 돌담길을 걷는다. 새들도 재잘거리며 내 걸음에 박자를 맞춰준다. 새소리를 귀에 담으며 정동길을 눈에 담는다. 하루가 알레그로 템포로 열린다. 이영훈 작곡가의 노래비가 보이고 나는 어느새 "이젠 모두 세월 따라 흔적도 없이 변하였지만~"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다. 햇살을 가르며 불어오는 바람이 아직은 차다. 어깨를 움츠리고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는다. 초콜릿과 사탕이 한아름 만져 진다. 옆 좌석에 탔던 아주머니의 미소가 머릿속으로 스친다.

 

새벽 6시 40분 동서울 행 버스를 탔다. 5시에 일어나 눈꺼풀을 비비며 택시를 타고 터미널로 가서 정신없이 버스에 오른다. 창가에 자리 잡고 잠시 숨을 돌리고 있는데 소박한 모습을 한 아주머니가 옆에 앉는다. 오창 정도 지났을까. 아주머니는 가방에서 텀블러를 꺼내더니 커피를 따른다. 그리고 내게 내민다. 얼떨결에 받아 마신다. 따듯한 온기가 입안에 감긴다.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까무룩 잠속으로 들어간다. 버스에서 내릴 무렵 아주머니는 내 손에 초콜릿과 사탕을 쥐어 준다. 비록 작은 것이지만 조건 없는 호의가 전해지면서 아침부터 상쾌함이 몰려온다. 강변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시청역에서 내려 2번 출구를 향한다. 정동길을 걸으며 사탕을 하나 꺼내 입에 물고 핸드폰을 꺼낸다. 핸드폰 네비게이션을 켜고 피어선 빌딩을 친다. 핸드폰은 "안내를 시작하겠습니다." 라는 낭랑한 여자의 멘트와 함께 길을 보여준다. 네비를 겨고 걷는 내 모습이 이상했는지 누군가 자꾸 쳐다본다. 난 빙긋이 웃으며 시골에서 올라와  길은 몰라서 그런다고 하자 그는 어디를 가냐고 묻는다. 서울은 코도 베어간다지만 착하게 생긴 표정에 맘을 놓는다. 피어선 빌딩에 간다고 하자 본인도 그곳에 간단다. 본인은 목사인데 졸업식장에 가는 길이라며 그곳엔 왜 가냐고 묻는다. 심사위원으로 신문사에 가는 길이라 하자 어쩐지 분위기 있어 보인다며 진심 같은 빈말을 한다. 네비를 끄고 그의 발자국을 따라 나선다. 친절한 그 덕분에 길을 쉽게 찾아 가 시간을 번다.

 

새벽부터 움직인 탓에 일찍 도착한다. 투고된 작품들이 박스 가득이다. 얼핏 보기에도 500편은 넘어 보인다. 설핏설핏 원고들을 보며 다른 사람들이 오기를 기다린다. 예심위원들이 하나 둘 도착하고 봉투를 개봉한다. 투고된 날짜별로 번호를 매기고 목록을 작성하고 겉장의 신상을 다 떼어내고 오직 작품만을 본다. 작품들을 하나하나 넘기며 그들이 지새웠을 밤들을 생각한다. 시를 쓴다는 것은 얼마나 오랜 시간 자신의 알몸과 대면하면서 고통의 순간을 보내야 하는지를 알기에 가슴이 뭉클하다. 보고 또 본다. 본심으로 갈 작품 20편을 고르고 나서야 저녁 같은 점심을 먹는다.

 

 어둠이 거리를 적신다. 다시 전철에 몸을 싣는다. 강변역에 내려 어둑해진 하늘을 머리에 이고 터미널로 향한다. 차가운 길바닥에 누군가 추위에 떨며 앉아 있다. 한쪽 다리에는 기다란 검은 고무를 끼고 바구니를 앞에 놓고 애처로운 시선으로 나를 본다. 이렇게 추운 날 살기위해 거리로 나와 있는 그가 고맙다. 다리 하나가 없이도 살아내려고 애쓰는 모습. 두 다리를 멀쩡히 갖고도 열심히 살지 않은 나를 반성한다. 주머니를 뒤진다. 지폐와 초콜릿을 꺼내주고 청주행 버스에 몸을 싣는다. 검게 파도치는 창밖을 보며 오늘을 돌아본다. 많은 사람들과 많은 일들이 나를 훑고 간 하루다. 따듯한 눈길의 아주머니와 길을 가르쳐 주었던 목사님, 투고된 글로 만난 사람들, 그리고 내 삶을 되돌아보게 해준 거리의 천사, 모두 고마운 사람이다. '남에게 무엇인가를 줄 때는 대가를 바라지 말고 남에게 무엇인가를 받았다며 그 마음을 잊지 말라'는 말이 뇌리를 스친다. 그 마음을 잊지 않겠다. 따듯한 손으로, 작은 친절로, 절절한 글로, 애절한 눈빛으로, 내게 다가왔던 사람들의 마음을 기억하리라. 열심히 헛되게 살지 않겠다. 열심히 참되게 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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