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밤이다. 은은한 간접 조명 아래서 잠든 아가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쌕쌕 고른 숨소리가 듣기 좋다. 느닷없이 빙긋 웃는다. 사랑스럽다. 배냇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이런 내 마음이 전해졌나 싶어 행복하다. 이제는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고 턱을 쭉 치켜들다가 들숨 크게 한번 마시고는 흐느낀다. 세상살이 며칠이나 됐다고, 슬픈 꿈이라도 꾸는 걸까? 가슴에 손을 얹고 토닥이니 다시 천사의 얼굴로 돌아간다.
손주를 보는 중이다. 새벽에 모유 수유한 딸은 잠자라고 들여보내고, 부족한 양만큼 분유 타서 보충해주고, 트림시키고, 기저귀도 갈아주고, 막 재워 뉜 참이다. 내게 처음 할머니 노릇을 하게 해준 첫 손주다. 아기는 뭐가 그리 급했는지 예정일보다 보름이나 빨리 세상에 나왔다. 예상하지 못 한 조기 분만이었지만 산모도 아기도 모두 건강해서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많이 아프고 무서웠을 텐데 힘든 산통을 잘 견뎌낸 딸이 대견하고 고맙다.
요즘 육아 풍경은 옛날과는 사뭇 다르다. 예전에는 아기를 따뜻하게 싸매서 키웠던 것 같은데 지금은 안 그렇다. 우선 방바닥이 아닌 아기 침대가 따로 있고, 질식사 위험 때문인지 바닥도 매트 위에 얇은 요만 깔아 둔다. 방안의 온도는 24도 내외, 거기에 배냇저고리만 입은 아기는 겉싸개만 덮어 재운다. 아무래도 내 생각에는 약간 추운 듯하다. 하지만 전문가들이 그렇다 하니 어쩌겠는가. 나는 노파심에 자꾸 벗겨지는 발싸개를 찾아 신겨줄 뿐이다.
육아용품도 다양하다. 기저귀갈이대는 기본이고, 수유 보조 받침, 모유 수유 쿠션 등 산모가 수유할 때 무리 가지 않도록 도와주는 용품이 잘 나와 있다. 트림을 못 시켰을 때 눕히는 역류 방지 쿠션도 있다. 분유 포트는 물 온도와 용량을 미리 설정해두면 급하게 분유를 타야 할 때 버튼 하나로 해결할 수 있어 유용하다. 내 눈에는 모든 게 신세계다. 이 정도면 아기 키우기 수월할 듯싶은데 초보 엄마 아빠는 아기가 트림을 빨리 안 해도, 울어도, 꼴깍 올려도, 용을 쓰며 찡그리기만 해도 매번 당황하고 쩔쩔맨다. 그러면 나는 옆에서 한마디만 한다.
"괜찮아, 다 자라는 과정이야."
딸은 산후조리원에 들어가지 않고 집에서 조리하는 걸 선택했다. 아기와 떨어지는 게 싫고 모유 수유를 꼭 하고 싶다는 게 이유다. 물론 산후조리 도우미가 매일 집으로 오기는 해도 밤이나 주말에는 누군가 도와줄 사람이 필요하다. 그래서 내가 딸네 집으로 왔다. 나도 너무 오래전 일이라 다 잊어버려서 잘할 수 있을지 걱정은 되지만, 그래도 하다 보면 생각도 날 테고 모르는 건 배워가면서 하면 될 것이다.
아기는 깊이 잠든 것 같다. 팔다리가 완전히 이완되어 편안한 자세다. 어떻게 이런 작고 예쁜 아기가 내게 왔을까. 전생에 어떤 인연으로 스쳤기에 지금, 이렇게 같은 시공간에서 할머니와 첫 손자로 만나고 있을까. 그 심오한 연결고리는 모르겠지만, 이번 생에서만큼은 참으로 귀하고 소중한 인연이 아닐 수 없다.
아기에게 이제 고래라는 태명 말고 진짜 이름이 생겼다. 내일 사위가 출생신고를 하러 간다고 한다. 하진아! 그러면 너는 주민등록번호를 가진 엄연한 이 나라 국민의 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앞으로 네게 더 좋은 세상을 만들어 줄 수 있도록 할머니와 네 엄마 아빠는 정말 정말 열심히 살 거란다. 장하진. 어느 시인의 말처럼, 너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너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