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와 기억 사이

2020.03.01 16:28:15

김나비

시인, 주성초등학교병설유교사

어쩌면 우리는 지구라는 주전자 안에 담겨있는 작은 차 조각은 아닐까. 하늘에서 시간이라는 찻물을 내리면 작았던 아이들이 시간 속에 점점 자라고 어른이 되어 주변을 향으로 물들이는 것은 아닐까. 나는 어떤 향을 갖고 있을까. 어떤 향으로 시간 속에 부풀어서 주변을 물들일 수 있을까. 그녀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와 차를 우린다. 포트에 물을 붓고 끓이는 동안 다기를 준비한다. 차호를 꺼내 뚜껑을 연다. 잘 마른 찻잎이 나를 보고 있다. 차시로 찻잎을 덜어서 찻주전자에 담는다. 물을 주전자에 넣고 6분을 기다린다. 말랐던 찻잎에 물기가 돌고 쪼그라들었던 잎이 활짝 열린다. 부풀어가는 찻잎을 보며 문득 생각을 부풀린다.

신탄진에서 그녀를 만났다. 오 년 만의 해후였다. 소도시라 그런지 아무리 둘러보아도 찻집이 잘 보이지 않았다. 한참을 두리번거리다 커피숍을 발견했다. 모비딕에 등장하는 일등항해사 이름을 따서 만들었다는 스타벅스가 눈에 들어왔다. 선택의 여지 없이 그곳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나를 보며 던진 첫마디는 "똑같다 하나도 안 변했어!"였다. 난 그녀를 보며 "넌 벤자민 버튼 같아. 나이를 거꾸로 먹는 거 같은데!"라고 하자 그녀는 염색을 했다고 했다. 문득 커피잔을 내려다본다. 하얀 커피잔에 초록으로 긴 머리 휘날리는 세이렌이 그려져 있다. 세이렌의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 쥐며 그녀는 입을 연다. "나도 한때는 이 세이렌처럼 기름진 머릿결로 팜므파탈의 매력을 불살랐던 때가 있었단다." 우리는 서로를 쳐다보며 웃었다. 저녁을 먹고 기차역 근처로 자리를 옮겼다.

우리는 초등학교 동창이다. 우리가 처음 서로를 알고 나서 강산이 네 번 정도 변한 것 같다. 이렇게 오 년에 한 번 혹은 삼 년에 한 번 비정규적인 만남을 갖곤 했다. 이번에는 성남에 살던 그녀의 엄마가 신탄진 오빠 집으로 거처를 옮겨서 엄마를 보기 위해 신탄진에 들렀다고 했다. 자신의 기억 속에 유년 시절의 즐거운 기억은 몇 컷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 몇 컷 되지 않는 유쾌한 그림 속에 내가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고 했다. 나는 그녀를 보고 "추억은 그날 보다 아름다운 법"이라고 말하며 웃었다. 정작 그날에는 평범했던 날들도 돌아보면 아득하고 아름답게 느껴지는 법이라고.

한 때 청주 소재 학교에 근무하던 그녀. 아이를 둘 낳고 남편을 한의대에 편입시키고 가장 역할을 했었다. 어려서부터 성남에 살던 그녀는, 내가 청주에 살았기에 청주로 임용고시를 보게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남편이 졸업 후 서울에서 한의원을 차리자마자 사표를 던지고 필라델피아로 홀연 떠났었다. 그리고 삼 년 후 돌아와서는 현모양처가 되는 것이 꿈이라며 살림만 했었다. 이제 아이들도 다 커서 대학을 가고 보니 시간을 감당하기 힘들었단다. 그녀는 다시 공부했고 임용고시를 거쳐 올해 서울에 발령이 났다 했다. 스스로 돈을 벌어 자신의 용돈도 쓰고, 무엇보다 엄마에게 본인이 번 돈을 드리니까 너무 기분이 좋다고 했다. 그런 그녀에게 나는 잘한 결정이라고 했다. 누군가에게 자신의 삶을 위탁하는 일은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라고. 그것이 설령 남편일지라도 편하지만은 않은 일이라고. 자신의 삶은 자신 스스로 살아내야 하는 것이라고.

차를 따라 그 푸른 물을 눈으로 먼저 마신다. 찻잔을 들어 향을 코로 마시고 다시 입속에 넣어 굴린다. 풋풋한 향이 입 안 가득 맴돈다. 마치 내 머릿속 가득 남아있는 그녀의 향기처럼. 생의 갈증이 올라와 헛헛할 때쯤이면 나를 찾아오는 그녀. 느슨해진 내 삶에 활력이 되는 향을 뿌리는 그녀. 그녀를 볼 때면 잘 우려진 찻잎이 떠오른다. 향기롭게 살아가는 그녀가 세이렌의 푸른 유혹처럼 기억의 심연으로 나를 끌어당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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