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다는 것은 세상과 대면하는 일이다. 나를 둘러싼 세상으로 나가 나 자신을 찾아가는 일이다. 나의 세상은 다양하다. 교사로서의 세상, 작가로서의 세상, 편집인으로서의 세상, 강연자로서의 세상, 산골 아낙으로서의 세상 등이 있다. 많은 세상의 경계를 넘나들다 보니 가끔은 버겁기도 하지만 여러 가지 세상과 만나는 것은 두근거림을 안겨준다. 다양한 사람들과 접하면서 내가 모르던 나의 모습도 발견하게 되니 어느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 세상 속에서 만남과 이별은 수시로 찾아온다. 모든 만남과 이별은 귀하지만 그 정도의 차이는 분명 존재한다.
이 가을 저린 이별이 나를 노크한다. 그녀와의 만남을 거슬러 올라간다. 십여 년 전 월문리 산골에 컨테이너를 갖다 놓고 산골 생활을 시작했을 때였다. 나보다 먼저 산골에 정착한 그녀가 손을 내밀어 주었다. 그 후 우리는 서로의 집을 오가면 함께 밥을 먹고 차를 마시며 주말을 나누어 가졌다. 바느질 솜씨가 좋은 그녀는 손바느질로 안경집을 만들어주고, 앞치마도 만들어주고, 벨트도 만들어주고 브로치도 머리핀도 만들어주었다. 난 살림에는 도통 재능이 없었기에 그녀에게 늘 받기만 했다. 가끔 텃밭에 있는 고추나 부추 단호박을 따다 주는 것으로 고마운 마음을 대신했다. 청천 하면 그녀의 얼굴이 자동으로 떠오를 정도로 그녀는 내게 깊게 각인되었다. 그녀가 없는 청천은 상상할 수조차 없다. 그런 그녀가 이천으로 이사를 간다고 한다. 찬바람이 일렁인다. 이천이 먼 곳은 아니지만 도간을 넘나드는 물리적인 거리는 나의 심리적 거리도 멀게 할까 봐 저어된다. 그녀는 그곳에 가서도 지금처럼 누군가의 가슴에 꽃을 심을 것이다. 산골의 가을이 텅 비어 간다. 그녀가 없는 나의 세상은 얼마나 추울까.
마당을 두드리며 걸어오는 비의 맨발
쏟아지는 발소리가 마른 귀를 적시면
떨어진 발자국마다 당신 얼굴 고인다
발의 온기 담겨있는 주인 잃은 신발 위
쌓이는 빗소리는 시린 가슴 풀어 헤친다
벗어 둔 덩그런 이별, 피어나는 소연연*
바래 버린 시간 속에 그리움만 길어지고
에두른 깔깔한 슬픔 빗소리로 닦아낼 때
멍울진 회색 하늘에 햇살 한 줌 피어난다
* 마음이 생기기 위해서는 색깔·형태·소리·냄새 등 감각 대상이나 개념·관념과 같은 사유 대상이 있어야 한다. 대상이 없이 마음이 생겨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러한 인식 대상들을'소연연'이라 불러 마음의 생성 원인에 끼워 넣는다.
- 김나비 ·빗소리 현상학 2· 전문
꽃을 좋아해서 마당 가득 화원처럼 꽃을 키우던 그녀, 항아리며 신발에 꽃 그림을 직접 그리고, 앞치마에는 꽃수를 놓아 입던 그녀, 꽃처럼 아름다웠던 그녀. 오늘 그녀는 구절초, 바늘꽃, 해국, 벌개미취꽃 등 가을꽃을 한 아름 따서 내게 안겨 주었다. 어쩌면 이것이 그녀에게 받는 마지막 꽃이 될지도 모르겠다. 식탁 위 화병에 꽂힌 꽃이 환하게 웃으며 나를 보고 있다. 마치 나를 보고 웃던 그녀처럼.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본다. 겨울을 재촉하는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내 마음엔 아쉬움이 축축하게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