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발 선인장

2018.12.09 15:31:54

김희숙

수필가,원봉초등학교병설유교사

 교회 첨탑 위 십자가가 장검처럼 꽂혀있는 아침이었다. 리어카에 가득 실린 종이 상자는 노인의 키를 훌쩍 넘고 있었다. 노인의 머리엔 오랜 세월 함께 온 듯한 빛바랜 빨간 챙 모자가 얹혀있고 그 아래 고동색 점퍼가 흐늘거리고 있었다. 점퍼 속엔 검붉은 티셔츠를 입은 듯, 허리춤으로 셔츠 단이 닭 벼슬처럼 삐져나와 있었다. 점퍼 몸통에서 연장된 팔 끝에는 하얀 목장갑이 리어카를 그러쥐고 있었고 그 아래는 얄팍한 검정바지가 바람에 몸을 떨고 있었다. 떨고 있는 바지 단과 슬리퍼 사이에 양말도 신지 않은 붉은 발이 설핏 보였다.

 출근 길, 신호등아래 서있던 내 옆에 폐지를 가득 실은 노인이 멈춰 섰다. 회색 칸막이를 친 하늘이 그를 음울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도로에는 바쁜 아침을 지나는 각양각색의 차들로 빼곡했다. 차들은 보이지 않는 끈을 뒤꽁무니에 매단 듯 계속해서 따라오는 차들을 끌고 앞으로 앞으로 질주하고 있었다.

 길옆에는 들깨 칼국수 가게와 횟집이 꼭 다문 입처럼 셔터를 내리고 서있었다. 아직 문을 열 때가 아니라는 듯 굳게 닫힌 입술들의 결심은 견고해 보였다.

 나는 신호등이 보이는 하얀 사다리 앞에 서서 난로의 불처럼 빛나는 빨간 불이 파란색으로 바뀌길 기다렸다. 그리고 무심한 듯 노인을 봤다. 그런데 멈춰선 노인의 발이 내 눈을 떼어갔다.

 양말도 신지 않은 맨발을 보며, 그가 걸어왔을 시간들을 생각해 보았다. 한 때는 푸른 날들이 있었으리라.
 자식도 아내도 그의 곁을 졸망하게 지켰으리라. 이제는 한 겨울 빙판 속에 붉게 언 채로 서성이지만 저 맨발의 힘으로 가족들을 따듯하게 데워줬을 것이다.

 퇴근 후에도 노인의 발이 머릿속에서 새빨갛게 맴을 돈다. 커피를 타서 베란다로 향한다. 문득 창가에 있는 게발 선인장이 눈으로 길을 내고 걸어온다.

 언제부터였는지 선인장은 빨갛게 웃고 있다. 따사롭던 봄, 싱그러웠던 여름, 스산했던 가을을 묵묵히 지낸 선인장이 하필 차가운 겨울에 붉은 미소를 소리 없이 짓고 있다.

 물도 제대로 주지 못했는데 꽃을 피웠다. 마지 노인의 붉게 튼 맨발처럼 찬 겨울바람을 맞으며 다리 끝에 꽃을 달고 있다.

 가늘게 연결돼 늘어진 마디마디가 끊어질 듯 위태해 보인다. 노인의 얇은 몸처럼 마디가 아슬하게 연결돼있는 줄기, 꽃게의 발처럼 생긴 줄기 끝에 빨갛게 매달린 작은 웃음이 말갛다.

 얄팍한 선인장의 다리에 깃든 생명력에 가슴이 먹먹해 진다. 화분을 자세히 본다. 토분 속에 몸을 묻은 선인장은 힘없어 보이는 다리를 분수처럼 늘어뜨리고 있다. 초록 분수 위에 시간을 통과해 온 먼지가 하얗게 끼어있다. 물티슈를 뽑아서 먼지를 닦아주며 상념에 젖는다.

 겨울이다. 나는 늘 인생이라는 빙판길을 서성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디로 미끄러질지 모르는 시간 속에 한 걸음 한 걸음 최선을 다하며 걷는 것이 인생에 대한 예의가 아닐까.

 추위에도 소리 없이 꽃을 피우는 게발 선인장처럼 찬 바람 속에서도 스스로 붉은 미소 피울 수 있는 그런 내가 되길 기도해 본다.

 사는 날 까지는 내게 주어진 길을 묵묵히 걸으며, 미끄러질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담담히 걸을 수 있는 내가 되고 싶다.

 눈을 들어 검은 도화지를 펴 놓은 듯한 창밖을 본다. 멀리 교회의 십자가 들이 장검에 보석을 박은 듯 검은 도시의 여기저기 붉게 빛나고 있다. 저 붉은 장검으로 낮은 곳에 떨고 있는 사람들의 추위를 다 베어버렸으면 좋겠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추위를 잘라내고 따듯한 겨울을 보내길 빌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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