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우의 그림 이야기 - 미술가와 술

2024.12.25 15:04:56

지난 2023년 4월 대구 동구 아양아트센터 아양갤러리에서 열린 ‘고흐, 향기를 만나다' 전시회를 찾은 시민들이 작품을 관람하고 있다.

ⓒ뉴시스
우리나라 사람들이 제일 좋아하는 외국 화가는 빈센트 반 고흐(1853~1890)다. 파란만장하게 불꽃처럼 살다가 요절한 전설 같은 그의 삶이 관심을 끌고, 누룽지나 온돌방 아랫목 같은 누런 색의 그림이 우리 정서와 닮아서 좋아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의 그림을 보면 원래 노란색인 노란집, 해바라기, 밀밭 등의 풍경 이외에도 노란색으로 그려진 것들이 많다.

그렇다면 고흐의 화풍은 유독 노란색을 좋아하는 그의 독특한 취향에 따른 것일까? 그런데 최근 자료를 찾다 보니 말년을 '산토닌 중독'이라는 정신질환으로 보낸 고흐가 '황시증'으로 노란색 물감을 많이 사용해 그림을 그렸다는 흥미로운 내용을 접할 수 있었다. 빛깔이 없는 곳에서 빛깔을 느끼거나, 본래의 빛깔이 변색해서 보이는 것을 '색시증(色視症)'이라고 하는데, 그 중에서 물체가 황색으로 보이는 것이 황시증이다. 산토닌 중독 증세는 처음에 자색으로 보이다가 점차 황색으로 보이는 것이라고 한다. 아마도 자색을 지각해야 할 망막의 기능이 처음에는 좋았다가 점차로 저하되기 때문이라고 추정한다. 산토닌 중독의 원인 중 하나는 '압생트(absinthe)'이다.

고흐 자화상.

ⓒ뉴시스
프랑스 아를 지방이 산지인 압생트는 쓴 쑥을 원료로 만든 70도에 달하는 녹색의 독주다. 잔에 따르면 은은한 초록색이 감도는 술로 일명 '녹색요정'으로 불렸고 너무나 독한 탓에 일종의 환각 효과까지 있어 파리의 예술가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르누아르, 피카소, 마네도 압생트의 열열한 애호가였다고 한다.

이 술에 함유된 '산토닌'이라는 성분이 세상이 모두 노랗게 보이는 '황시증(黃視症)'을 유발시킨 것이다. 물론, 고흐도 이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알코올 중독에 신음하면서도 "궁극의 노란색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나 스스로 속일 필요가 있다"는 유명한 말로 합리화했다. 후에 이 술은 많은 부작용으로 판매가 금지됐다. 고흐는 폭음, 과로, 부실한 식사, 과한 흡연 등으로 병원치료를 받다가 머리에 총을 쏴 생을 마감한다.

마시는 술과 같은 글자는 아니지만 예술(藝術)에 '술(術)', 미술(美術)에 '술(術)'자가 들어가서인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술을 좋아하는 미술가들이 많았다. 취흥(醉興)에 흠뻑 빠져 불후의 걸작을 완성했고, 실수가 엿보이는 애교있는 작품을 남기기도 했다. 오래전 화제를 모았던 영화 '취화선(醉畵仙)'을 보면 최민식이 연기한 오원 장승업은 아예 술독을 끼고 산다. 장승업은 술에 취해야 붓을 잡을 수 있는 것으로 묘사돼 있다. 이쯤 되면 술을 좋아하는 정도가 아니라 '알콜중독' 상태로 봐야 되지 않을까?

김홍도 씨름도.

ⓒ뉴시스
조선시대 최고 화가로 꼽히는 단원 김홍도(1745∼1806)도 지독한 애주가였다. 스스로 취화사(醉畵師)라는 호를 붙였을 정도로 취중에 그림을 많이 그렸다. 김홍도 같은 천재도 술에 취해 실수를 한 적이 있다. '송하담소도(松下談笑圖)'는 단원의 친구 이인문(1745∼1821)이 그림을 그리고, 단원이 화제(畵題)를 쓴 작품이다. 단원은 당나라 시인 왕유(王維)의 시 한편을 3, 4행과 5, 6행의 순서를 바꿔 쓰고, 글자 한 자를 빼먹었다가 뒤늦게 덧붙였다고 한다. 그의 대표작인 '씨름도'를 보면 오른쪽 아래 남자 오른손이 반대로 그려진 것을 볼 수 있다. 이 또한 술 한잔 먹고 그리면서 실수한 것이 아닐까 생각되는데, 이런 행동들이 너무나 인간적이지 않은가? 그래서 대가가 실수한 작품은 미술시장에서도 더 높은 대접을 받고 있다.

그리고 단원이 정상적으로 이해 안 되는 풍류를 즐긴 일이 전해지고 있다. 어느 날 마음에 드는 아름다운 매화를 본 김홍도는 2천 냥이라는 거금이 없어 사지 못하고 있었다. 마침 그림을 그려달라는 사람에게 3천 냥을 받고 그림을 그려준 후 2천 냥에 매화를 구매하였다. 그리고 술집에 800냥을 주고 잔치를 준비해 친구들을 불러 매화를 감상하며 술을 마셨다. 집에는 생활비로 3천 냥 중 200냥만 보낸 것을 봤을 때 무책임한 가장이자 폼생폼사의 자유인이었다.

조선 17세기 화가 김명국의 선객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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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마도'를 남긴 김명국(1600∼미상)도 못 말리는 주당이었다. 그 역시 취옹(醉翁)이란 호를 사용했다. 그는 그림을 구하는 사람이 있으면 술부터 찾았고, 취기에 오르지 않으면 재주가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달마도'는 힘차게 그은 몇 개의 선으로 달마대사의 모습을 표현한 걸작인데, 그림을 완성하는데 1~2분이 채 걸리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술에 취한 채 일필휘지로 붓을 몇 차례 휘둘렀음이 분명하다.

호생관(毫生館) 최북(1712년경∼1761년경)도 술 쪽으로는 빠트릴 수 없는 화가였다. 한쪽 귀를 스스로 잘라버린 빈센트 반 고흐(1853∼1890)처럼, 제 손으로 오른쪽 눈을 찔러버린 미치광이 화가였다. 고흐가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독주 압생트를 마시면서 발작적인(?) 그림을 그렸다면, 최북도 늘 술병을 끼고 그림을 그렸다. 오랫동안 끼니를 거르다가 마신 술에 만취해 눈밭에 쓰러져 이 세상 소풍을 끝냈다고 전해진다.

호생관 최북 단구승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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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1950년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을 다니셨던 L은사님의 말씀에 의하면 동심의 화가 장욱진은 강의(실기)시간에는 별 말이 없다가 방과 후 술집에 나타나 신고 있던 군화나 고무신에 막걸리를 따라 학생들에게 권했다고 한다. 한번 술을 시작하면 열흘이나 보름씩 밥도, 안주도 거부하고 줄기차게 마셨다고 한다. 술을 먹는 것도 황송한 데, 밥을 어떻게 먹으며, 더군다나 안주는 미안해서 먹을 수 없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림을 그릴 때도 술을 먹을 때처럼, 다른 모든 것을 외면한 채 때로는 식음조차 전폐하고는 그림 그리기에만 빠졌다. 어떤 때는 몇 년 동안 술을 입에 대지 않고 그림에만 몰두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림을 다 완성하면 몇 달을 앓아눕기도 했다. 그에게 있어 그림은 살아가는 의미이고, 술은 휴식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에게 있어 술과 그림은 인생 그 자체였던 것이다.

이동우

미술관장·화가

요즘 화가들도 옛 화가들의 후예답게 술을 즐기는 이들이 무척 많다. 필자도 예외가 아니어서 술로 남에게 진 적이 없다는 것을 큰 자랑거리로 여기며 30여 년을 살아왔다. 그러다 3년 전 술과 이별했다. 술과 결별하게 된 계기는 모발이식 후 6개월간 금주하라는 의사의 조언을 따른 것이 시작이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술 잘 마시는 것이 특별한 재능인 양 남보다 많은 술을 마시다 보면 제 명을 채우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과감하게 끊었다. 술을 끊으니 새로운 인생이 시작됐다. 얼굴 혈색과 표정이 많이 좋아졌다는 얘기를 주위에서 들을 수 있었고, 남들이 못하는 어려운 것을 해냈다는 자신감과 자존감이 많이 생겼다. 그리고 아침에 피곤한 것이 사라졌고, 산책, 명상, 독서, 그림 그리기, 가족들과 보내는 시간이 많이 생겼다. 그림에 몰두하다 보니 대작 위주로 작업하는 대형작가가 되었다. 우리는 몇 시간의 알딸딸한 취기를 위해 너무나 많은 것을 낭비하고 있다.

술을 좋아하는 재능 많은 친구 M작가에게 술로 요절한 선배들의 전철을 밟지 말라고 계속해서 얘기하고 있다. 언젠가 필자와 같이 술과 이별하고 또 다른 새로운 인생을 함께 살아가기를 기대한다. 술이 무조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고 술은 적당히 마시면 약(藥)이지만 과음은 독(毒)이다. 한번 밖에 없는 인생, 술로 시간을 허비하고 건강을 해치는 우(愚)를 범하는 사람들을 보면 안타까운 맘이 든다. 이 세상에는 취흥(醉興)보다 더 재미있는 일이 널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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