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쪽바리', '왜놈'이라는 말이 익숙할 정도로 우리나라 사람들은 일본인들을 업신여기고, 일본과의 스포츠 경기에서는 꼭 이겨야만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왜색(倭色)이라고 일본 문화나 문물의 영향을 받은 양식을 얕잡아 보는 경향도 있다.
해방이 되자 미술계에서는 동양화의 한 종류인 채색화가 일본화로 인식돼 채색화나 그것을 그리는 화가들은 경시했고, 수묵화나 옅은 색채를 사용하는 수묵담채화가 전통 회화의 주류로 떠오르게 됐다. 이런 분위기에서 일본 현지에서 일본화를 배워와 활동하다가 해방이 되자 왜색화가로 많은 괄시를 받은 대표적인 화가가 내고 박생광(1904~1985)이다.
박생광은 일본 냄새가 덜 나는 어설픈 수묵화나 수묵담채화를 그리지 않았고 평생 작업한 채색화로 정면 승부했으며 특히 세상을 뜨기 전 8년 동안 놀랍고도 대담한 예술적 변신을 한다. 그는 토함산 해돋이, 탈, 단군, 십장생, 창, 불상, 단청, 부적, 무당 등 지극히 한국적인 주제를 선택해서, 강렬한 오방색의 채색을 구사하는 독창적인 기법을 선보였다. 강렬한 색채와 자유로운 화면 구성은 한국의 토속적인 정서와 민족적 생명력이 들끓어 오르는 듯했다. 이른바 한국 현대미술사의 새롭고 독창적인 장르를 구축해낸 채색화의 거장으로 인정받은 것이다. 박생광은 1985년 파리 그랑팔레 '르 살롱전' 특별전에 출품해 비평가들로부터 '한국의 피카소'란 평가를 받기도 한다.
박생광은 1904년 진주시에서 태어나 진주농업학교를 다니던 중 1920년 17세의 나이로 일본 교토로 건너갔다. 다치카와미술학원과 교토시립회화전문학교에서 신일본화(新日本畵)를 배워 일본에서 1945년까지 활약했다. 해방 후 국내 화단에 일본 화풍을 배척하는 분위기가 완연해지자, 박생광은 고향 진주에서 은둔 작업 활동을 하며 자신만의 화풍을 찾기 위한 다양한 실험을 모색한다. 1967년 상경해 천경자의 소개로 홍익대학교에 출강하면서 작품 활동을 한다. 이 시기에 비로소 한국 민속적 소재를 이용해 화면의 변화를 꾀하기 시작했다.
이때 박생광과 천경자로부터 채색화를 배운 홍병학, 이경수 교수에게 필자는 채색화를 배워 한동안 채색화를 그렸었다. 박생광 화백을 직접 만나 지도받은 적은 없어도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는데, 그의 예술적 열정을 본받고 싶어 필자의 작업실에는 진품은 아니지만, 1985년 호암갤러리에서 개최된 박생광 전시회 포스터가 액자에 담겨 벽에 걸려 있다.
내고 박생광을 널리 알리는데 큰 한 사람은 용인에 있는 이영미술관 김이환 관장이다. 팬으로 시작된 내고와의 인연 덕분에 김 관장은 그의 작품을 가장 많이 소장한 컬렉터가 된다. 팔리지 않는 내고의 그림에 화상들이 냉담할 때 공무원이던 그는 박봉을 털거나, 혹은 양돈농장 운영으로 생긴 수입으로 내고에게 많은 도움을 줬다. 인도여행과 1984년에는 문예진흥원 개인전을 주선했고,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특별 회고전을 열어 주는 등 박생광 화백을 알리는 데 주력한다. 김 관장은 환갑의 나이로 대학원에 다니면서 미술공부를 하고 양돈축사를 개조해 대규모 사립미술관을 개관하는 열정을 보여줬다.
박생광, 무녀, 종이에 채색, 136x140cm, 1980.
ⓒ뉴시스
박생광 화백이 세상을 뜨자 김 관장은 1977년 박 화백과 첫 만남부터 사후까지 인연을 모두 기록한 '수유리 가는 길'이라는 책을 내기도 한다. 그 책에서 박생광을 처음 만난 날을 "수소문 끝에 수유리의 페인트칠 벗겨진 맞배지붕 집을 찾아갔죠. '선생님, 흑모란이 갖고 싶어 왔습니다'하니 씨익 웃으며 '기리(그려)주지'하더군요. 세평 남짓한 좁은 방에 온갖 화구를 늘어놓고, 키 160㎝도 안되는 작은 체구의 화가가 살아가는 모습을 보니 칠십 평생 한길을 걸어온 것에 절로 존경심이 들었습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가 소장하고 있는 내고의 작품은 모두 100여 점, 내고의 사후에도 10여 점을 모았다. 그는 작품 '명성황후'를 얻은 순간을 잊지 못한다고 했다. 명성황후를 완성하고 "됐제, 됐제, 이만하면 됐제?"하고 묻던 내고의 모습이 떠오른다고 한다.
박생광의 성격을 엿볼 수 있는 일화 하나가 전해지고 있는데, 천경자는 생전에 박생광에게 "'토함산 해돋이'를 저 주시고, 제 그림 중 선생의 마음에 드시는 게 있으면 다 가져 가세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에 박생광은 "천 여사님, 내 그림이 아직 천 여사 그림보다 모자라는 데 그랄수야 없지요. 내가 공부를 더 많이 해서 잘 기리면 그 때 가서 바꿀 수 안 있겄소."라고 겸손함을 보였다고 한다.
박생광, 노적도, 종이에 수묵채색,138.5x140cm, 1985.
ⓒ뉴시스
박 화백은 말년에 피리 불며 즐겁게 길을 떠나는 노인을 그린 '노적도'를 그리던 중 1985년 7월 18일 81세의 일기로 수유동 자택에서 후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박생광은 늘 입으로 붓을 빨았다고 한다. 도장 찍을 때나 부적을 그릴 때 많이 사용하는 주사라는 빨간색 안료가 있다. 김이환 관장은 주사가 수은성분이 많아서 해롭다고 충고했으나 박생광은 "개않다"고 웃었다고 한다. 그는 붓 빨기를 통해, 가벼운 색정적인 느낌과 천진성이 배합된 독톡하고도 아름다운 세계를 만들어 냈던 것이다. 뒷날 그가 후두암 진단을 받았을 때 김이환은 '그 놈의 주사가 원수'라고 수없이 한탄하고 원망했다고 한다.
채색화는 그림을 그리는 표현기법 중 하나에 불과하다. 일본사람들이 많이 그린다고 해서 왜색(倭色)이라는 이름으로 괄시해서는 안 된다. 일본화의 뿌리는 우리나라 고구려 고분(무용총, 쌍영총)벽화와 우리나라 절에 가면 볼 수 있는 불화(탱화)가 일본으로 건너가 발전한 것이다. 왜색(일본문화)이 무조건 싫다면 일제강점기에 일본사람들에 의해 지어진 서울역, 한국은행, 서울시청 건물이나 군산과 목포에 가면 많이 볼 수 있는 적산가옥들도 다 철거돼야만 하는 것인가?
도올 김용옥은 "세상에 박생광 만한 화가가 있으면 어디 나와보라고 말하고 싶네요. 아직 내고를 일본 채색화의 아류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는데, 그럼 독일에서 공부한 사람은 독색(獨色)이고, 프랑스에서 공부한 사람은 불색(佛色)이던가요?" 라고 말한 적이 있다.
과거에 일본이 우리에게 한 행동들이 밉다고 그들의 문화를 무조건 배척할 것이 아니라 넓은 가슴으로 받아들일 것은 수용하고, 경제적, 문화적으로 그들보다 앞서는 것이 멋지게 앙갚음하는 방법이다. 요즈음 분위기로 봐서 그날이 멀지 않았음을 느낀다. 대단한 나라 대한민국은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