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일보] 요즘은 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유학파도 대학 시간강사 자리 하나 잡기가 어려운 시대다.
그런데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만, 초등학교 학력에 청각장애 화가가 대학교수를 한 경우가 있었다.
그 화가의 이름은 '운보 김기창(雲甫 金基昶·1913~2001)'이다.
게다가 그는 2만 평 저택에서 말년을 보내는 호사를 누리기도 했는데 아마 동서양 미술가들을 통틀어 가장 큰 집에 산 화가가 아닐까 생각한다.
운보가 초등학교 학력과 청각장애인임에도 불구하고 대학교수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뛰어난 재능과 특수한 시대적 상황 덕분이다.
1945년 해방이 되면서 서울대, 홍익대, 이화여대, 조선대 등에 미술과가 생기면서 서양화과와 조소과는 일본이나 미국에서 공부하고 온 작가들로 교수진을 확보할 수 있었으나 동양화 분야는 일본으로 유학 가 일본화를 공부하고 온 일부 작가와 국내에서 도제식 교육을 받은 작가들을 교수로 영입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대표적인 인물로는 운보 김기창 외 월전 장우성, 청전 이상범 등이 있다.
운보는 1913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호는 원래 어머니가 지어준 아호 운포(雲圃)를 사용하다가 해방 직후 일제의 굴레에서 벗어난다는 의미로 '포(圃)'의 '겉 획(□)'을 떼어버리고 운보(雲甫)로 바꾼다.
1920년 승동보통학교에 다닐 때 장티푸스에 걸려 후천성 청각장애인이 되어 이때부터 운보는 평생 청각장애인으로 살게 된다.
고열에 시달릴 때 한방요법으로 외할머니가 끓여준 인삼을 먹고 더 열이 올라 결국 귀가 멀게 된 것이다.
어린 나이에 청각장애인이 되면서 말하는 방법을 잊어버렸으나 어머니와 부인 박래현 화백의 피눈물 나는 노력 덕분에 구화와 필답을 할 수 있게 된다.
청각장애인 특유의 어눌한 발음이긴 했으나 일상생활에 큰 불편함 없이 의사소통하게 된 것이다.
운보는 두 여인에게서 큰 은혜를 받은 셈이다.
1930년 보통학교 졸업 후 어머니의 주선으로 이당 김은호(1892~1979)에게서 그림을 배우기 시작한다.
입문한 지 6개월 만에 스승 김은호의 영향과 총애를 받아 1931년 '10회 선전'에서 '판상도무(板上跳舞)'를 출품해 입선하여 두각을 나타낸다.
아버지는 청각장애가 있는 아들이 허우대가 크니 힘이 많이 필요로 하는 목수를 시키려고 했지만, 어머니는 그가 미술에 소질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림을 배우게 했다.
그때 만약 아버지 뜻대로 목수를 시켰다면 우리 한국미술계는 위대한 작가를 하나 잃었을 것이다.
운보는 한국 미술계에서 커다란 족적과 영향을 남긴 거장이다.
청각장애를 딛고 피나는 노력 끝에 화가가 된 인간승리의 주인공이지만, 한편으로는 일제강점기에 친일 작품활동을 했다는 꼬리표 때문에 평생 마음고생을 한다.
김기창은 그의 스승 이당 김은호와 함께 대표적인 친일 화가로 지탄받아 왔고, 처음에는 친일을 부정하다가 결국 말년에 사죄한다.
그리고 살아 있을 때 친일 작가라는 수식으로 시달렸던 운보는 죽고 난 뒤에도 오점이 하나 발견되어 구설수에 오르게 된다.
1944년 결전미술전람회라는 대규모 전시회가 열렸는데 여기에 운보는 동남아 정글 속에 일본군들이 전투하는 장면을 그리고 '적진육박'이라는 이름으로 출품한다.
이 작품으로 조선군 보도부장상을 받아 친일 작품의 대표작으로 공인받는다.
그런데 광복 이후에 그린 '적영'이라는 그림이 '적진육박' 작품과 비슷하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1972년 베트남 전쟁 당시 맹호부대의 용맹한 활약상을 그린 민족기록화를 그리면서 자신의 친일 작품을 모방한 것이다.
전쟁터가 둘 다 정글 지형이라 복제하기에는 최적이었을 것이다.
최고의 존경받는 화가가 1944년 일제 군국주의를 찬양하는 그림을 광복 이후 정부 수립 이후에도 그대로 그렸다는 것이 미술계에서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국가에서 주도한 민족기록화 사업에, 자신의 친일 작품 중 대표작을 그대로 베꼈다는 것은 실수이든 의도이든 간에 변명할 여지조차 없는 잘못을 저지른 것이다.
이 그림은 국방부 청사 현관에 오랫동안 걸려 있다가 2018년 철거되는 비운을 겪는다.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고, 작가는 죽어 작품을 남긴다"는 말이 실감 나게 하는 일이다.
운보에게는 김기만이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부모님의 예술적 재능을 운보뿐만 아니라 그의 동생도 물려받았는지 월북하여 작가로서 성공한다.
운보가 세상을 뜨기 1년 전인 2000년 이산가족 상봉 때 병상에서 두 형제는 재회한다.
당시 동생은 형에게 자신의 작품인 수묵화 난초를 선물했는데 작품이 전시 중에 도난당하고 만다.
그래도 그나마 다행인 것은 청주 '운보의 집 미술관'에 가면 김기만의 '참새떼'를 그린 수묵담채화 작품을 볼 수 있다.
필자는 운보 김기창 화백을 실제로 본 적이 한 번 있다.
1984년 충북대학교 미술교육과에 입학하였을 때 단체로 청주 중앙공원에 있는 청주문화원 전시실에서 열리고 있는 충북미술대전을 관람한 적이 있었다.
그때 전시장에서 운보와 마주친 것이다.
호랑이 같은 인상의 큰 덩치에 지팡이를 짚고 있었으며 흰 고무신에 빨간색 양말을 신고 있었다.
특이한 것은 빨간 양말에 한자로 '운보(雲甫)'라고 흰색으로 자수를 놓은 것이 40년이 지났는데도 선명히 기억난다.
따져보니 그때 필자의 나이는 20살이었고 운보는 82세였다.
지금 같았으면 휴대전화 카메라를 이용해 사진이라도 같이 찍었겠지만, 그 당시 노대가 앞에서 감히 말 한마디 걸지 못했다.
그래도 운보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이분처럼 멋지게 화가로 늙고 싶다는 다짐을 한 것 같다.
그때 좋은 기운을 받아서인지 아직 30년 넘게 붓을 안 놓고 있다.
'한국의 피카소'라고 할 정도로 다양하고 왕성한 작품세계를 펼쳤던 운보는 말년을 어머니 고향 청주 양지바른 곳에 지은 '운보의 집'에서 유유자적하면서 보내는데 '운보의 집 미술관'에 가면 운보의 제대로 된 작품들을 볼 수 없는 것이 내심 아쉽다.
거기다 작품뿐만 아니라 '운보의 집'도 자식들은 지키지 못한다.
운보의 집 작은 동산에 누워있는 운보와 우현이 슬퍼할 일이다.
이를 볼 때 신은 완벽한 복을 그에게 내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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