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일보] 지금으로부터 20년 전 임권택 감독, 최민식 주연의 '취화선'이라는 영화가 있었다.
'취화선(醉畵仙)'이라는 것은 '술에 취해 그림을 그리며 사는 신선'이라는 뜻이다.
이 영화를 보면 장승업은 영화 제목처럼 부귀영화를 마다하고 일체의 세속적인 관습에 구애 받지 않고, 오로지 예술의 영감을 주는 사랑방과 술집을 전전하며 뜬구름 같은 일생을 보내다 생을 마친다. 길들어지지 않은 한 마리 야생마를 보는 것 같았다.
오원 장승업에 대한 기록은 황성신문 주필로서 '을사조약'을 규탄하는 사설 '시일야방성대곡'을 쓴 장지연이 대한매일신보에 '일사유사'라는 제목으로 쓴 글이 남아 있다.
그 기록을 보면 '일찍 부모를 잃고 집도 무척 가난하여 의지할 곳조차 없었다. 이곳저곳을 굴러다니다가 서울에 와서 동지중추부사 벼슬을 지낸 이응헌의 집에 붙어살고 있었다'라고 전한다.
오원의 후원자 이응헌은 '세한도'를 추사에게서 선물 받았던 이상적(李尙迪)의 사위이다.
이응헌은 장인 이상적과 같은 역관 출신으로서 그림과 글씨를 모으고 감상하는 취미를 가졌는데, 그의 집에서 더부살이하던 장승업은 화가나 수장가들의 그림 감상하는 것을 눈여겨볼 수 있었고, 어깨너머로 그림과 글씨를 배운다.
그러던 어느 날 붓질하는 오원의 모습에서 천재적인 재능이 있음을 발견하고, 이응헌은 장승업이 화가로서 성공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오원의 놀라운 그림 그리는 재주는 금세 주위에 알려져 놀라운 명성을 얻었으며, 그의 명성은 고종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어 궁중에 들어가 그림을 그리며 '감찰(정6품)'이라는 벼슬을 받기도 한다.
장승업의 호는 오원(吾園)인데 그것이 대해서는 흥미로운 얘기가 전해온다.
우리나라 유명한 화가들의 '호'가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 긍원 김양기, 희원 이한철, 초원 이수민 등 '동산 원(園)'자 붙인 사람이 많은 것을 알고 장승업은 ' 나라고 단원, 혜원만 못할 게 무엇 있느냐? 나도 단원, 혜원 못지 않다'는 생각으로 '나도 원이다'의 뜻인 '오원(吾園)이라 지었다고 한다. 그것을 봤을 때 장승업은 자의식이 강했던 인물이었다.
일자무식의 가난한 화가였지만 오원은 산수화, 인물화, 영모화(새나 짐승과 같은 털 있는 짐승을 그린 것), 기명절지화(정물화) 등 모든 그림 분야에 뛰어난 재주를 보여준다.
이번에는 그의 작품 중 압권이라고 할 수 있는 '호취도(豪鷲圖)'를 소개하고자 한다.
가로 55.3㎝, 세로 135.5㎝의 세로로 긴 그림으로 고목의 아래와 윗가지에 앉아 있는 두 마리의 매를 그렸는데, 매서운 눈, 날카로운 발톱 등은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한 생동감이 넘친다.
먹의 농도조절, 붓의 기운, 강약의 조절을 통해 표현된 고목의 단단함과 잔가지와 나뭇잎의 조화, 매의 생동감과 균형, 단단하고 매서운 매의 개성이 그대로 느껴지는 날카로운 발톱, 노려보면서 같은 곳을 바라보는 시선은 다큐 '동물의 왕국' 한 장면을 정지화면으로 보는 것 같은 역동감이 느껴진다.
'이 호취도는 점 하나를 더하거나 빼서는 그림이 안 된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완벽한 수작으로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럼 호취도에 나오는 매는 무엇을 쳐다보고 있는 걸까?
단순하게 먹잇감을 노려보는 것일 수도 있지만, 당시의 시대 상황과 결부시켜 조선이라는 나라를 차지하기 위해 몰려드는 외국 세력들을 매섭게 노려보고 있는 것 같다고 보는 미술사학자도 있다. 오원은 매의 그림을 많이 그렸는데 조선이 일본에 의해 지배당하는 시기에는 그의 매 그림은 호취도에서 볼 수 있는 기백을 잃어버리고 쓸쓸하고 외로운 새의 모습으로 바뀌어 가는 것을 그 증거로 제시한다.
대체로 화가들은 그림을 그리고 자신의 생각을 한 귀절 시로 표현해 적었는데 이를 '화제(畵題)'라고 한다.
오원은 글을 몰라 화제를 남이 대신 써주곤 했는데, 호취도 역시 화가로 같이 활동했던 정학교(丁學敎)가 써주었다.
'地闊山高添意氣(지활산고첨의기) 땅 넓고 산 드높아 장한 의기 더해주고
楓枯艸動長精神(풍고초동장정신) 마른 잎에 풀 소리 정신이 새롭구나'
라고 돼 있는데 이 화제가 오원의 생각을 옮긴 건지, 정학교가 임의로 쓴 것인지 알 수는 없다.
옛 선비들은 '글을 많이 읽고 틈틈이 교양을 쌓으면 몸에서 책의 기운이 풍기고 향기가 난다'고 믿었다.
이를 '문자향 서권기'라도 했는데, 이것을 얻기 위해 많은 책을 읽으며 부단히 노력했다.
당나라때 시인 두보는'남아는 다섯 수레의 책을 읽어야 한다.'고 했고, 추사도 '난치는 법은 예서와 가장 가까우니 반드시 문자의 향기와 책의 기운을 갖춘 다음에야 얻을 수 있다.'고 할 정도로 '문자향과 서권기'를 중요시했다.
오원 그림의 수요자들은 '문자향과 서권기'를 중요시하는 지식인들이었다. 대놓고 이야기하지는 않았겠지만 글을 모르는 이가 그린 그림을 높게 평가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여진다.
이런 상황에서 유난히 자존심이 강했던 오원은 마음고생이 심했을 것이다. 그것이 그가 술을 가까이한 원인 중 하나로 작용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분명한 것은 오원이 다른 화가들처럼 글과 그림 공부를 체계적으로 받았다면,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오원의 그림과는 다른 그림들을 나왔을 것이다.
오원은 당대 최고의 화가로서 그 뛰어나고 폭넓은 기량으로 많은 화가들에게 영향을 줬다.
장승업의 영향을 가장 많은 받은 제자는 소림 조석진과 심전 안중식이다.
그들은 장승업으로부터 정식으로 사사를 받은 것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흠모하면서 그를 따라다니며 그의 화론과 조언을 듣는 방식으로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보여진다. 한곳에서 안정된 생활을 하지 않았던 오원이 정식으로 제자를 키운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안중식과 조석진은 우리나라 최초의 미술학교인 '서화미술원'에서 많은 후진들을 양성한다. 김은호, 이상범, 노수현, 박승무, 이용우, 허백련 등 현대 전통회화의 대가들이 이들의 가르침을 받았다.
그 후 이당 김은호는 1920년대 후반부터 화실을 개방하여 백윤문, 김기창, 장우성, 이유태, 한유동 등 많은 제자를 길러냄으로써 한국미술 발전에 이바지한다. 운보 김기창, 월전 장우성을 비롯한 많은 이당의 제자들이 해방 후 대학에 동양화과가 생기면서 교수가 돼 제자들을 많이 키운다. 현재 그 제자들과, 또 그 제자의 후학들이 우리나라 동양화단에서 작가로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취화선 오원 장승업은 125년 전에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예술혼은 아직도 우리 한국화단에 살아 숨쉬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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