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흥수 , mixed media on canvas, 142×245cm, 1989.
ⓒ뉴시스
괴산군에는 청안면이라는 곳이 있다. 지금은 인구 3천여 명의 작은 면에 불과하지만 조선 시대에는 청안현, 그 이후에는 청안군으로 괴산의 중심 고을이었던 곳이다.
이 청안면에 전교생 17명인 청안중학교라는 작은 사립중학교가 있다. 필자는 10여 년 전 이 학교에 미술 교사가 없어 인근 학교에 근무하면서 일주일에 한 번 미술 수업하러 나간 적이 있다.
이 학교 졸업생 중에 장수현(1962-2012)이라는 화가가 있다. 그녀는 작품으로 널리 알려진 것이 아니라 미술대학 다닐 때 가르침을 받은 교수와 결혼해 큰 화제거리가 된다. 사제지간에 결혼한 것이 별 대수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결혼할 당시 장수현은 30세, 남편은 73세로 나이 차이가 무려 43세였다. 부모님보다도 나이가 많은 사람을 남편으로 맞아들인 것이다.
두 번 결혼에 두 번 이혼하고 세 번째로 장수현과 결혼한 남자는 김흥수 화백이다. 결혼식에서는 JP가 주례를 봤는데 "만년 청년과 절세가인의 결합"이라고 덕담하기도 했다고 한다. 장수현이 세상에 알려진 건 1990년 파리 뤽상부르미술관에서 열린 하모니즘 초대전 때 김 화백과 동행하면서다. 혹자는 청안중학교 출신 중에 가장 유명 인사가 된 사람이 장수현이 아니겠냐고 농담 비슷하게 말하기도 한다. 채묵화회 라는 그림 모임에서 필자와 함께 활동하고 있는 P선생님은 청안중학교 미술 교사로 있을 때 장수현을 가르친 적이 있다고 말한 것이 기억난다.
장수현은 20년간 김 화백과 결혼 생활하면서 본인 작품활동보다는 김향안이 김환기에게 했듯이 남편이 예술세계를 온전히 펼칠 수 있도록 내조에 힘쓴다. 장수현은 2002년 서울 평창동에 김흥수 미술관을 개관하며 관장으로 취임하며 남편 김흥수와 '꿈나무 영재 미술교실'을 운영하기도 한다.
김흥수 화백
김흥수(1919~2014)는 '한국의 피카소'라 불릴 정도로 우리나라 서양 화단의 거장이다. 1919년 함흥에서 태어난 김 화백은 화가가 되는 걸 펄펄 뛰며 반대했던 아버지에게 "미술학교를 보내주지 않으면 죽어버리겠다"고 악을 쓰며 뛰쳐나와 화가의 길을 걷는 독종이었다. 동경미술학교를 졸업한 김흥수는 1967년 미국 필라델피아대학에 초빙교수로 갔을 때 우연히 추상화와 구상화가 함께 놓인 것을 보고 1977년 추상과 구상이라는 상이한 화면을 하나로 조화시킨 '하모니즘 미술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한다.
김흥수의 하모니즘은 한 때 미국의 데이비드 살르를 표절한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받았으나, 김흥수의 '조형주의(하모니즘) 선언문'이 발견되면서 데이비드 살르보다 훨씬 더 빠른 시기에 김흥수가 먼저 작업하고 있었다는 것을 인정받는다. 김흥수의 하모니즘 선언은 1977년이었고 데이비드 살르는 1983년부터 작품을 내놓기 시작한 것이 밝혀지는데 프랑스의 저명한 미술평론가 피에르 레스타니에 의해 김흥수의 하모니즘은 독창적인 형식미학으로 인정받게 된 것이다.
김흥수는 미술계에서 강한 남자이면서 학연에 얽힌 미술계를 향해 쓴소리를 던졌던 그는 '폭군 화가', '고함쟁이 영감'으로도 불렸다. 특정한 그림을 그리면 대통령상을 주겠다는 유혹도 뿌리친 '다혈질·고집 불통' 화가로 알려졌다. 숱한 화제와 염문이 이어지면서 자신의 그림처럼 화려한 인생을 살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하얀 턱수염과 깃털 달린 중절모를 즐겼던 덕에 미술계의 '멋쟁이 화가'로 통하기도 했다. '화단의 이단아'로 불리며 관례를 깨고 새로운 문을 열어젖힌 김흥수 화백은 생전 "예술은 감동하라고 해서 되는 게 아니다. 저절로 감동하는 것이 예술이다, 새롭다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새로운 변화에 두려워하지 말라"고 미술계 후배들에게 조언하기도 한다.
김흥수 화백은 한국 화가로는 최초로 살로·또논드 정회원으로 활동했으며 세계적인 미술관에서 수많은 초대전을 연 국제적인 작가였다. 자신이 그림에 있어서는 최고라는 자부심이 대단했다. 2010년 92세 당시 어떤 작가와 대결을 했으면 좋겠냐는 질문에 "생존한 작가든 작고 작가든 외국 작가든 국적·성별을 초월해 누구든 자신 있어요"라고 거침없이 대답했으나 그의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다. "베푸는 삶을 살겠다"며 2006년도에는 제주도에 100억대 가격의 작품 20여 점을 기증하기도 한다.
김흥수 백봉승무도, 71x60cm, 판화지,실크스크린,석판화 기법.
ⓒ청작화랑 제공
2012년 43세의 나이 차이가 나던 아내 장수현은 50세로 젊은 나이에 난소암으로 먼저 세상을 뜬다. 평소 장수현은 "김 화백은 나의 신이다. 그분의 그림을 지키는 게 화두"라고 했다. 투병 중에도 "선생님의 예술세계에 반해 함께 지냈으니 여한이 없다"고 했다고 한다.
장수현이 영재미술학원을 운영하며 남편의 하모니즘을 계승하는 곳이던 서울 평창동에 건립했던 김흥수 미술관도 경제적인 사정으로 처분한다. 얼마 전 방문해 보니 금보성 작가가 인수해 자신의 이름을 건 '금보성아트센터'를 운영하고 있었다.
장수현이 세상을 뜨고 2년 후 김흥수 화백도 95세의 나이로 뒤를 따른다. 김흥수 미술관을 매각한 후 작품을 보관할 곳이 없어 평소 친분이 있던 사찰의 비닐하우스와 컨테이너에 방치되어있는 것을 유족들이 돌려달라고 소송을 건다. 김흥수의 장남 김용환은 오랜 소송 끝에 돌려받은 작품 71점을 재단에 기증하며 "돌아가신 아버지가 해놓은 문화사업에 조금이나마 전승할 수 있는 길을 만들어줬으면 한다"며 소신을 밝힌다. 기증한 작품의 가격은 수 백억원 대에 이른다고 한다.
파란만장하게 산 멋쟁이 화가 김흥수의 별세 소식에 주변에서는 "참 불꽃처럼 살다 가셨네요. 진짜 강한 남자의 표본입니다" 등의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빠른 시일에 김흥수 미술관이 다시 세워져 그의 작품을 맘껏 볼 수 있는 날을 기대한다. 김흥수 화백의 일생을 살펴보면 걸작은 예술가가 자신의 육체를 불꽃처럼 태워버릴 때 나올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