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우의 '그림이야기' - 안견의 몽유도원도

2022.08.11 16:18:43

순간의 선택이 목숨을 건진다.

몽유도원도는 단원 김홍도와 오원 장승업과 함께 조선시대 3대 화가로 일컬어지고 있는 안견이 1447년에 비단에 수묵담채로 그린 세로 38.7㎝, 가로 106.5㎝ 크기의 그림이다.

이 그림은 세종의 셋째 아들이자 세조의 친동생인 안평대군이 무릉도원에서 노닐었던 꿈을 안견에게 얘기한 후 그리게 한 것이다.

몽유도원도(夢遊桃園圖)는 "꿈속 무릉도원에서 논 것을 그린 그림"이란 뜻이다.

이 그림의 가치가 높은 것은 작품성은 물론 안평대군의 표제와 발문을 비롯해 당대 최고 문인들의 작품을 칭찬하는 시 23편이 곁들여 있어서이다.

그림은 수많은 봉우리들이 분리된 듯하면서 전체적으로 통일감이 있으며, 같은 눈높이의 평원법과 아래에서 위를 바라본 고원법이 대조적이다. 움직임을 느낄 수 있는 사선 구도의 활용을 통해 자연의 웅장함과 신선들이 산다는 환상의 세계를 절묘하게 표현한 수작이다.

'몽유도원도'는 조선 초기 시, 서, 화의 정수가 결집된 작품으로, 중국의 산수화들과 확연히 구별되는 특징을 지녀 조선 시대 산수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안견의 화풍은 화원들은 물론, 사대부 계층까지 폭넓게 전파되어 조선 후기에 정선의 진경산수화가 등장할 때까지 조선의 화단을 지배했다. 또한 일본 수묵화의 거장 슈분(周文)이 조선에 사절단으로 왔을 때 그의 그림을 배워 가서 무로마치 시대 수묵화에서도 안견의 화풍을 엿볼 수 있다. 이를 볼 때 안견은 우리나라 회화사의 큰 획을 그었고 이웃 나라 일본에도 영향을 줄 정도로 뛰어난 화가였다.

안견은 조선 시대에 그림 그리는 일을 담당하던 관청인 도화원에 소속된 화원으로, 젊은 시절부터 산수화, 사군자, 소나무, 노안도 등 모든 분야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게다가 안견이 위대한 화원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뛰어난 재능도 작용했겠지만, 안평대군과 교유하며 화가로서 안목을 기르고 그의 총애를 받은 덕분이었다.

안평대군은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꽃 피우는데 크게 공헌한 '메디치' 가문과 같은 조선 시대 대표적인 예술 후원자로서 시, 서, 화에 능했고, 중국 고전 회화에 박학다식했으며, 수많은 서화를 수집한 미술애호가였다.그런데 자신을 후원하고 아껴주던 안평대군을 안견은 배은망덕하게 배신하는 일을 저지른다.

윤휴의 '백호전서'에 따르면 "안견은 안평대군의 총애를 받으면서도 언제부턴가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는데 안평대군은 허락하지 않았다. 안평대군은 안견을 아껴 집으로 불러 그림을 그리게 하고 한시도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안견은 시절이 수상한 것을 감지하고 안평대군의 집 밖으로 나올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어느 날 안평대군이 중국에서 귀한 먹을 구해 안견에게 그림을 그리게 했는데, 외출했다 돌아 와보니 먹이 사라져 버렸다. 이에 종들을 다그치는 분위기에서, 안견이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소맷자락에서 먹이 떨어진다. 이를 본 안평대군은 진노하여 안견을 내쫓고 다시는 집에 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안견은 이후 자신의 집에서 두문불출했고, 얼마 후 계유정난이 일어나 안평대군을 비롯해 그 집에 드나들던 사람들 대부분이 죽임당하거나 화를 입었다."고 한다.
이 당시 화를 당한 사람들 대부분이 몽유도원도에 칭찬의 글을 남긴 사람들이었다. 몽유도원도가 살생부 역할을 한 것이다.

역사적으로 합법적이지 못한 방법으로 권력을 잡기 위해서는 부모 형제도 보이지 않는다. 수양대군(세조)은 임금 자리를 쟁취하기 위해 어린 조카 단종과 친동생인 안평대군, 금성대군을 비롯해 김종서, 황보인, 사육신 등 수많은 사람들을 추풍낙엽처럼 정리한다.

이런 분위기에서 안견은 안평대군에게 쫓겨났기에 기적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안평대군이 머지않아 수양대군에게 목숨을 잃게 될 것이고, 그와 가까이 지내면 목숨을 부지하기 어렵다는 것을 예감한 안견은 안평대군 눈 밖에 나기 위해 아끼는 먹을 일부러 훔쳤다는 것이다. 애완견이 집에서 나오기 위해서는 주인을 무는 방법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를 볼 때 안견은 앞날을 내다 볼 수 있을 정도로 머리가 좋은 사람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한편 안평대군은 여러 학자와 예술가들과 교감하며 멋지게 살다가 권력 욕심이 많은 형 수양대군이 등장하면서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 것이다.

중·고등학교 미술교과서에 빠짐없이 나올 정도로 유명한 명품 몽유도원도는 현재 안타깝게도 일본 천리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어떤 경유로 일본으로 넘어갔는지 잘 모르겠지만, 일본은 이 작품이 외부로 나가는 것을 철저히 경계한다고 한다. 우리나라에 전시를 위해 3번 잠깐 온 적이 있지만 찾아올 방법은 요원하다.

현재 우리나라의 귀중한 문화재들이 외국에 많이 나가 있다. 정식으로 돈을 지불하고 구입한것도 있겠지만 전시나 식민지 시절 훔쳐 갔거나 강탈해 간 것이 대부분이다. 지금 와서 돌려 달라고 하면 그들은 절대로 돌려주지 않는다. 되찾는 방법은 돈을 주고 되사오거나 그들이 했던 방법처럼 힘으로 빼앗아 오는 방법밖에 없다.

이를 볼 때 나라가 힘이 있어야 백성도 문화재도 지킬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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