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12월 8일 밤 10시 50분,
어느 스타가수가 뉴욕의 아파트로 귀가하고 있을 때,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팬이 접근한다. 불과 몇 시간 전에 사인을 받아 간 팬이었다. 그는 가수의 이름을 부르고, 뒤돌아보는 가수에게 총알 4발을 쏜다. 쓰러진 가수를 병원으로 급히 옮겼으나, 그는 이미 숨이 멈춰 있었다. 그 스타가수의 이름은 '비틀즈의 존 레논'이었다.
정신이상자 채프먼이 쏜 총알에 세기의 뮤지션 '존 레논'은 이렇게 허망하게 우리 곁을 떠났다.
총을 쏜 동기는 다르지만 이와 비슷한 어처구니없는 죽음이 지금으로부터 72년 전 대한민국 수도 서울 한복판에서도 일어났다.
1950년 11월 4일 밤,
통행 금지가 넘어서 한 남자가 술이 곤드레만드레 된 채 아현동 마루턱에 있는 검문소를 지나게 됐다. 경찰이 누구냐고 하자, 그는 대뜸 한다는 소리가 "이 거지 같은 자식아! 나를 몰라!"하고 욕설을 퍼부었다.
그는 해방 전부터 조선 미술 전람회에 출품해서 20살 때 특선을 하는 등 이름을 날린 화가였으나 6.25전쟁 혼란통에 그를 알아주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더구나 순경이 그의 존재를 알 리 만무했다.
모욕을 당한 순경이 그를 붙잡으려 하자, 그는 순경을 번쩍 들어 길바닥에 내동댕이치고 유유히 집으로 돌아갔다. 그 순경은 파출소로 달려가 화가의 이름을 대면서 동료직원에게 뭐하는 사람인지 아느냐고 묻자, 동료직원은 그림 그리는 환쟁이라고 알려준다. 순경은 순간적으로 분한 맘을 참지 못하고 칼빈 소총을 들고 그의 집으로 뒤쫓아갔다. 그때 그의 부인이 대문만 열어주지 않았어도 그의 생명은 지켰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의 부인은 별다른 생각 없이 대문을 열어주었고 순경은 다짜고짜 집 안으로 들어가 소란스러운 소리를 듣고 대청으로 나오던 그에게 연거푸 총을 쏘았다. 그는 그렇게 한마디 비명도 못 지르고 쓰러진다. 이 당시 상황이 순경이 겁만 주려고 공포탄을 쏜다는 것이 실탄을 잘못 쏜 오발 사고였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어쨌든 그의 오만함이 저승길 가는 것을 재촉한 것이다.
이때 쓰러진 화가는 '이인성(李仁星·1912~1950)'이었다.
그림 그리는 사람이 대중에게 본인의 그림을 알리는 방법은 공모전, 개인전, 단체전, 아트 페어, 인터넷 등이 있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위 방법 중 가장 짧은 시간에 가장 효과적으로 그림을 알릴 수 있는것이 공모전이다.
일제강점기에 조선미술전람회(선전), 해방 후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 대한민국미술대전에서 특선 이상 입상하는 것은 확실하게 작가로서 자리를 굳힐 수 있는 보증서를 받은 것 같은 위력을 발휘했던 시기가 있었다.
더군다나 최고 상인 선전에서 창덕궁상, 국전에서 대통령상, 대한민국미술대전에서 대상을 받은 작가는 지금으로 치면 '미스 트롯'이나 '미스터 트롯'같은 프로그램을 통해 한방에 스타가 된 '송가인'이나 '임영웅'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이런 공모전에서 특선 6회에 최고상 '창덕궁상'을 받으며 젊은 나이에 추천작가가 되고 제1회 국전 심사위원이 된 미술가가 이인성이다. 당대 화가 누구도 기록하지 못한 전무후무한 놀라운 성취였다.
"너 커서 이인성 되겠구나!"라는 말은 한때 대구에서 그림에 소질 있는 아이에게 하는 가장 큰 칭찬이었다고 한다.
이인성은 조선의 고갱이요 세잔으로 불렸다. 혹자는 그를 두고 "1930년대 마라톤 선수 손기정이나 무용가 최승희에 버금갈 정도로 유명했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 땅의 험난했던 시대에 그리 길지 않은 38년이라는 짧은 세월 동안 머문 화가라고 하기에는 이인성이 우리 미술계에 남긴 흔적은 너무나도 선명하기만 하다. 화가로서 등단은 이름에 별성(星)자가 들어가서인지 마치 혜성처럼 순식간에 왔다가, 나타나기가 무섭게 미술계를 현란하게 풍미하다가 바람처럼 사라졌다.
이인성은 유화, 수채화, 수묵화, 판화 등 다양한 재료와 기법을 이용해 풍경화, 인물화, 정물화 등 여러 장르의 많은 작품을 남겼다. 강렬한 원색 사용, 짧고 조밀한 붓 터치 등 수채화로 표현하기 힘든 기교를 선보인다. 유화를 사용하면서도 이런 기교를 더욱 발전시켜 거칠면서도 강한 붓 터치, 치밀한 공간 구성, 강렬한 원색 사용, 두터운 마티에르(질감) 등 후기 인상주의 기법을 더해 향토성이 묻어나는 색을 사용하여 '조선의 토속성'을 살리는 화풍을 형성한다.
그는 서양의 고흐나 고갱, 세잔 못지않은 색채 감각을 구사한 미술가였다. 그러나 이중섭, 박수근, 김환기 등 동시대 화가들에 비해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
그것에 대해 신수경 미술사학자는 아래와 같은 세 가지 이유를 꼽고 있다.
첫째, 39세에 요절한 것을 들고 있다. 생전에 뛰어난 기량으로 유명세를 날렸지만, 6.25전쟁과 같은 어수선한 시기에 허망하게 죽어 제대로 된 유작전도 열지 못했다.
둘째, 공모전 중심으로 한 작품활동이다. 출세를 위해 공모전에 치중했던 그의 작품 태도는 비판을 받아 마땅하다고 보고 있다. 심사위원들 입맛에 맞는 그림 위주로 출세 지향적인 작품 활동을 했고, 그로 인해 '친일작가'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셋째, 구상화(사실주의) 위주의 작품 경향이다. 그의 죽음 이후 추상화가 대세였던 국내 미술계에서 지나치게 아카데믹한 구상화가 대부분인 그의 작품은 온전히 대접을 못 받았다고 분석하고 있다.
1954년, 회고전이 열렸으나 '가난을 극복한 천재 화가', '요절한 천재 화가'라는 인생 역정에 많은 관심을 받았고, 그의 작품에 대해서는 제대로 된 평가를 못 받는다.
그러나 1974년 '한국 근대 미술 60년전'과 한국 화랑에서 '회고전'이 열리면서 그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진다.
우리나라 서양화 작가들은 한일합방이 된 1910년 서양화가 국내에 유입된 후 식민지라는 열악한 상황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는 관점이 대두된 것이다. 그러면서 조선의 '향토색론'이 대두되었고, 이인성은 '조선의 향토성을 가장 잘 구현한 선구적 작가'로 부각 된다.
한동안 잊히다시피 하다 이인성의 고향 대구광역시에서 2000년 '이인성 미술상'을 만들면서 '이인성'이라는 이름은 다시 빛을 보기 시작한다.
매년 11월 4일, 이인성 기일에 수상자를 발표하는데 올해 22회를 맞이하는 '이인성 미술상'은 한국 미술계에서 권위 있는 상으로 자리 잡고 있다. 지난해 21회 수상자로 제주도에서 활동하고 있는 강요배 작가가 선정됐다.
이인성의 아들 이채령은 늦게나마 아버지의 대를 이어 화가로 활동하고 있다. 천재 화가 이인성이 요절하지 않고 좀 더 오래 살았다면 공모전 위주의 작품이 아닌 자기만의 작품세계를 펼쳐 한국 미술사에 큰 획을 긋는 작가가 됐을 것이다. 이러한 점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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