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우의 그림이야기 -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조각가 정관

2024.09.05 13:30:15

정관 김복진.

ⓒ뉴시스
필자는 지난 1991년 3월 7일, 27살 때 영동중학교에 첫 발령을 받으며 영동과 인연이 시작됐다. 영동에서 11년간 살며 아들과 딸을 낳고, 학교생활과 작품활동으로 젊음을 불태웠다. 그래서 영동은 고향과 같은 느낌이 드는 곳이다.

우리나라 미술사에서 걸출한 미술가 중에 필자와 비슷하게 고향은 아니지만, 유년 시절을 영동에서 보낸 작가가 있다. 그의 이름은 조각가 정관 김복진(1901~1940)이다.

1910년 김복진은 아버지 김홍규가 황간군수로 부임할 때 황간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며 영동지역과 인연을 맺는다. 황간군이 지금은 영동군 황간면으로 흡수되었지만 구한말에는 영동군과는 별개의 군(郡)이었다. 김복진은 황간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자마자 학급 내 구타 사건으로 자퇴하고, 부친도 관직을 내려놓고 고향인 청주시 팔봉리로 함께 돌아온다. 부친이 1913년 영동군수로 복직되자, 영동공립보통학교로 편입해 졸업한다. 영동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배재고보에 입학하는데, 배재고보 졸업할 때까지 영동에 집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필자는 영동미술협회장을 하면서 영동을 문화 예술적으로 발전시키고 싶어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아름다운 영동그리기 대회'를 개최하고, 경부선 최초로 영동역에 전시장을 만드는 등 의욕적으로 활동했었다. 그리고 '영동예술지'에 한국전쟁 당시 이중섭이 제주도 서귀포로 1년간 피난 온 인연을 활용해 '이중섭 미술관'과 피난살이 했던 거처를 관광지로 만들어 성공한 예를 들면서, 김복진 조각가가 유년 시절을 보낸 영동에 '김복진 거리', '김복진 미술관' 등을 만들어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조각가가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것을 스토리텔링 해 영동을 '한국 근대조각의 발상지'로 만들자는 글을 쓰기도 했다.

글을 쓰기 위해 영동초등학교에 근무하는 지인에게 부탁해 김복진 학적부를 입수했는데, 학적부에는 아버지 직업이 관리(官吏)로 돼 있었고, 영동공립보통학교로 편입했음에도 불구하고 주소는 황간군으로 돼 있었던 것이 특이하다고 생각했다.

정관은 1920년 배재고보를 졸업하고 동경미술학교 조각과에 입학한다. 조각을 전공한 서너 명의 한국인 선배들이 있었으나 요절하거나 여러 가지 사정으로 작품활동을 하지 않는 바람에 김복진은 우리나라 최초의 조각가라는 타이틀을 갖게 된다. 김복진은 39세의 짧은 생애를 살면서도 전공인 조각 외에도 미술비평가, 문예 운동가, 언론인, 교육사업가로 활발하게 활동하며, 독립운동을 하다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기도 한다.

청주시립미술관 1회 김복진 미술상 수상자로 선정된 김영원 조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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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이 공로를 인정받아 예술인으로는 최초로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는다. 청주미술협회는 그의 업적을 기릴 공간이 없어 이 훈장을 유족과 협의해 청주시립미술관에 기증하고, 28년째 '김복진 미술전'을 개최해 후배 작가들이 그의 예술혼을 잇고 있다. 청주시는 2023년 '김복진 미술상'을 제정해 광화문 앞 세종대왕상을 제작한 김영원 조각가를 첫 수상자로 선정하기도 했다.

김복진에 관련된 자료를 찾아보면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조각가이자 근대미술의 선구자, 빼어난 예술혼, 한국 근대조각의 선구자" 등 많은 찬사의 글들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옥에도 티가 있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최근 '김복진의 친일행적'에 관한 글이 발표되고 있는데 김복진은 직접적으로 친일을 하지는 않았지만, 수많은 친일파들의 인물상을 제작하는 오점을 남겼다는 것이다.

김복진의 친일행적에 관련된 자료를 찾아보면 '다산선생상'을 제작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다산(茶山)하면 목민심서를 쓴 실학자 정약용(1762~1836)일 것이라 생각할 듯 한데, 김복진이 흉상을 제작한 다산(多山)은 박영철(朴榮喆, 1879~1939)이다. 박영철은 일제강점기 군부대신 관방부관, 중추원 참의 등을 지낸 친일파로 3·1운동이 끝난 후 매일신보에 "조선인에게는 나라를 지탱할 능력이 없다"는 글을 싣고, 1932년 이봉창 의거 때는 조선총독부에 사죄의 뜻을 전하고 근신했다고 한다.

김복진은 만주 지역의 대표적 친일 인사인 김동한의 동상도 제작했다. 김동한(金東漢, 1892~1937)은 만주에서 항일운동가 토벌에 앞장선 친일파다. 그 외에 인삼왕 손봉상, 인천 친일 관료 김윤복, 신문왕 조선일보 사장 방응모, 조선총독부로부터 불멸의 애국옹으로 불린 이원하(李元夏, 1866~1939) 동상도 만들었다.

이에 황정수 미술평론가는 "이제라도 김복진 삶을 다시 연구하고, 미술사에서 그의 공과를 밝혀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김복진, 러들로 흉판, 1938, 64×73×1.9cm, 동은의학박물관 소장(국가등록문화재 제49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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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김복진의 작품은 남아있는 것이 거의 없고 불상과 도판으로만 전해질 뿐이다.

김복진은 왜 작가의 개인적인 작품세계를 자유롭게 표현할 수 없는 불상조각과 인물상을 많이 제작했을까 생각해 봤다. 국민소득 3만 불 시대에 사는 지금도 전업 작가로 산다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런데 열악한 환경의 일제강점기에 조각작품을 팔아 산다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을 것이다.

김복진의 삶을 살펴보면 고정수입이 있는 직장생활을 한 것은 배재고보, 경성여상 도화(미술)교사, 조선중앙일보 학예부장으로 잠시 몸담은 것이 전부다. 집안의 장남으로 부모를 봉양하고, 가장으로 가족들을 책임지다 보니 돈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큰돈을 만질 수 있는 불상이나 인물상 제작에 손을 댄 것 같다. 인물상을 만들다 보니 돈 많은 친일파들의 작품의뢰 유혹을거절할 용기가 없었을 것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그는 정부의 철저한 검증을 받아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은 애국지사이며,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수 많은 친일작가들처럼 적극적으로 친일은 하지 않았지만, 한편으로는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는 어느 영화의 대사와 윤형근 작가가 일기장에 쓴 "예술은 이론을 가지고 되는 문제가 아니다. 천진무구한 인품에서만 영원불변한 향기 높은 예술이 생성되는 것임을 절감한다"는 구절이 64년 후배 미술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또한 조선 영조 때 "뭐야, 네 이놈이 감히 내 명령을 거절해? 곤장을 맞기 싫으면 어서 그려라!"는 한 양반의 횡포에 "세상이 나를 깔보고 함부로 대하는구나, 이렇게 무시당하고 사느니, 차라리…"라고 말하며 스스로 한쪽 눈을 찌른 최북(1712~1760)의 애꾸눈 초상화가 자꾸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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