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일보] 서울에 가면 경복궁 서쪽에 있다고 해서 '서촌'이라고 불리 우는 동네가 있다. 조선시대에는 중인들이 많이 거주했다고 한다.
이 서촌동네 골목을 따라 인왕산 등산로 쪽으로 가다보면 '종로구립 박노수미술관'이라는 나이가 90살이 다 되어가는 고풍스러운 건물을 만날 수 있다.
이 건물은 남정 박노수 화백(1927~2013)이 별세하기 전까지 40년간 거주하던 집으로, 2011년 종로구에 가옥, 정원 그리고 소장해온 다양한 고미술품과 골동품 등 1천여 점을 종로구에 기증하면서 미술관으로 재탄생하게 된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화신백화점을 설계한 건축가 박길룡의 1937년 작품으로, 구한말 관료이자 친일파 윤덕영이 그의 딸을 위해 마련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흥미로운 것은 붉은 벽돌에 한옥기와지붕, 서양식 창 등으로 한옥과 서양식이 절충된 건축기법을 보여주고 있고, 윤덕영이 딸의 행복을 기원하며 지은 집이, 그림 그리는 화가에 의해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는 미술관이 되었다는 것이다.
한국화 1세대인 박 화백은 해방 이후 서울대학교에서 오랫동안 후학들을 길러냈으며, 국내 화풍에 남아 있던 일제의 잔재를 떨쳐 버리고 독자적인 화풍을 시도, 한국화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힘쓴 교육자이자 작가이다. 집안 곳곳에는 박노수 화백의 체취가 배여 있다. 세련되고 규모가 큰 현대식 건물의 미술관은 아니지만 잘 정리된 정원, 최대한 리모델링을 절제한 건물내부와 그곳에 걸려 있는 박노수 화백의 작품들은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간 느낌을 준다.
남정의 작품세계를 살펴보면 해방 후 한국화단이 일본 색을 배제하고 정체성을 되찾고자 노력하던 시기에, 외모에서 풍기는 분위기와 비슷하게 절제된 색채와 간결한 운필과 강렬한 색감, 대담한 터치 등의 독자적인 화풍을 구축하여 전통 속에서 현대적 미감을 구현해 낸 작가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남정 박노수 화백은 세종시(충남 연기군)가 고향으로 서울로 그림 공부하러 가기 전에 청주에서 고등학교를 다닌 이력이 있어 친근감을 느끼게 하는 작가이다.
지금은 인문계 고등학교로 바뀐 청주상업고등학교(대성고등학교)출신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나라 흥행영화 제조기로 일컬어지고 있는 인기배우 이병헌과 결혼한 배우 이민정의 외할아버지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에는 작가의 이름을 딴 미술관이 많이 있다.
제주도에 김창열 미술관, 이중섭 미술관, 이왈종 미술관, 강원도에 박수근 미술관, 이상원 미술관, 대전에 이응노 미술관, 경남에 전혁림 미술관, 문신미술관, 서울에 김환기 미술관 , 박노수 미술관, 경기도에 장욱진 미술관, 백남준 아트센터 등이 생각난다.
이 미술관들의 설립배경을 살펴보면 금전적으로 여유 있는 작가들이 살아있을 때 만든 것이 몇 군데 있고, 대부분이 지자체에서 작가 사후 건립한 것들이다. 이 많은 미술관 중에 작가가 주거공간과 작업을 겸하던 곳을 지자치에 기증해 건립된 곳은 '종로구립 박노수 미술관'이 유일하다. 남정의 작품도 좋지만, 많은 사람들이 문화 예술적으로 향유할 수 있게 집과 작품을 아낌없이 사회에 희사한 것에 존경스러운 맘이 든다. 그리고 작가 개인적으로도 집과 작품들을 온전히 보존할 방법을 찾았으니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일 것이다.
그림 그리는 작가들과 "수요는 없고 공급만 있어 쌓여가는 작품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걱정스러운 얘기를 나눌 때가 있다. 그 많은 작품들을 다 태워 버릴 수도 없고, 자식들에게 물려주자니 너무 큰 짐을 남겨주는 것 같고, 공공 미술관에 기증을 하자니 받아줄 것도 같지 않다는 것이다.
실제로 오래전 한 작가분이 돌아가시고, 유족들이 작품을 지자체가 운영하는 미술관에 기증한다고 했을 때, 미술관측에서 작품 관리비로 2억이라는 큰돈을 요구해, 기증을 포기했다는 얘기도 있다. 작품도 유명작가가 그린 것이 아니면 상품(?)가치가 없어 대접을 못 받는 것이 냉혹한 현실인 것이다.
필자는 얼마 전 작업실로 사용할 아담한 건물을 전원에 마련했다. 교직생활 은퇴하면 전업 작가로 노후를 보낼 목적으로 구입한 것이다. 그리고 작은 꿈이 있다면 전시공간도 만들어 작은 미술관으로서 문화 불모지인 농촌지역에 '비빌 언덕'과 같은 역할을 했으면 한다. 작업실 짐을 나르며 아들에게 "이 건물은 생활이 어려워지더라도 팔지 말고 별장으로 사용하다가 자식에게 물려주라"고 당부해 놓았다. "지킬 자신이 없으면 증평군에 기증하겠다."는 말도 했다.
후손 중에 누군가 매매하는 것은 어쩔 수 없겠지만, 가능한 한 '이동우 미술관'과 작품이 대대손손 대물림되었으면 하는 것이 필자의 바램이다.
미술가는 작품제작도 중요하지만 사후 작품을 보존하는 방법을 마련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죽으면 후손들이 알아서 어떻게 하겠지" 하는 막연한 생각은 무책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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