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괴산군 소수면 숫골마을에 가면 마을 한가운데 수백 년 된 느티나무들이 스톤헨지나 이스타섬 석상들처럼 서 있는 언덕배기를 볼 수 있다. 빨치산 출신 화가 김형식(1926~2016)의 생가가 있던 곳이다. 10여 년 전 K선배와 방문했을 때는 쓰러져가는 행랑채 작은 방에서 김형식 화백이 그림을 그리고 있었는데 최근에 가보니 집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잡초만 무성한 것이 3대에 걸친 흥망성쇠를 보는 듯했다.
오늘 얘기하려는 김형식은 빨치산 출신 화가다. 빨치산이란 무엇인가? 빨치산이란 적의 배후에서 통신·교통 시설을 파괴하거나 무기·물자를 탈취하고 인명을 살상하는 비정규군을 뜻한다. 러시아어 파르티잔(partizan)에서 파생한 영단어다. 우리나라에서는 북한이 남한에 침투시킨 유격대원들을 빨치산이라 부른다. 오래 전 안성기 주연의 '남부군'이라는 영화가 빨치산의 세계를 그린 것이라 생각하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괴산 출신 김형식은 어떻게 빨치산이 되었을까? 김 화백의 삶은 격정과 혼돈으로 얼룩졌던 한국 현대사를 그대로 닮았다. 서울대학교 법대를 다닐 때 친구의 권유로 사회주의에 심취했던 그는 학교를 중퇴하고 월북해 군사교육을 받은 뒤 6·25전쟁 시기 내려와 빨치산으로 활동하다 경남 밀양 부근에서 체포된다. 처음에는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독립운동을 했다는 공적이 참작돼 무기징역으로 최종 선고를 받고 20여 년간 감옥에서 생활하다 출소한다. 출소 후, 47세에 고향으로 돌아와 결혼하고 정착했는데 불의의 교통사고로 부인이 사망한 뒤 혼자 생활한다.
일전에 그의 집을 방문했을 때 그의 얼굴에는 인고의 세월을 짐작케 하듯 깊은 주름이 패였지만 눈빛은 아직 날카롭게 살아 있었다. 다만 옹색한 방 한 구석에 언제 지었는지 모를 붉은색으로 변한 밥이 있었던 게 기억난다. 내가 "어떻게 하루를 보내시냐?" 하고 여쭈니, "아침을 먹고 면 소재지에 있는 다방에 가 조간신문들을 꼼꼼하게 읽고 집에 와 그림을 그려"라는 답이 돌아왔다.
대학에서 전문적으로 미술을 공부한 적 없는 김형식은 배재중학교 재학시절 일본에서 공부하고 온 이순종 미술교사로부터 그림을 지도받은 것을 기반으로 빨치산 활동과 교도소 복역, 농촌 정착 후의 생활 등을 소재로 삼아 다양한 그림을 그린다. 김 화백은 후배들의 주선으로 1999년 자연을 벗 삼아 고독하게 생활하는 자신의 삶과 심경을 표현한 작품들을 처음으로 대중에게 선보인다. 세상을 뜬 지 3년 뒤인 2019년 청주시립미술관에서는 그의 그림들을 모아 대규모 회고전을 열어준다. 그때 전시회장에는 겨울산 그림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빨치산으로 생활했을 때 본 산을 그린 듯 적막감이 감도는 것이 색다른 여유를 느낄 수 있는 그림들이다.
김형식의 할아버지 김용응(1870~1945) 선생은 상해임시정부의 군자금을 조달하다가 일본 경찰에 붙잡혀 고초를 겪는다. 광복 이후 이승만 대통령이 반민특위 위원장에 추천했으나 병환으로 취임하지 못하고 1945년 안타깝게 사망한다. 정부는 2019년 그에게 대통령 표창을 추서한다.
그의 아들인 김태규(1896~1956) 선생은 부친을 따라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한다. 1919년 3·1운동 당시 파리 강화회의에 보낼 의견서, 미국 대통령에게 보내는 독립청원서와 독립선언서를 중국으로 전달하고, 국내 독립운동에 관한 정보와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해 임시정부에 보낸다. 1919년 일본 경찰에 붙잡혀 1년간 옥고를 치른다.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한다.
숫골마을 생가터에 가면 '부자 독립운동가 공적비'가 세워져 있는데 오래전 방문했을 때 김형식 화백은 이를 자랑 삼아 보여줬다.
이번에 가 보니 전에 못 봤던 '아나키스트김원식물망비'라는 작은 목비가 설치돼 있다.
해당 비석은 김형식의 3살 많은 형 김원식(1923~2013)의 행적이 적혀 있다. 광복 당시 경성제국대학(현 서울대학교) 정치학과 학생이었던 김원식은 남로당 활동을 해 6·25전쟁이 끝나고 10년 동안 옥살이를 한다. 사회주의에서 끝내 전향하지 않은 채 60대 중반께 환경 운동에 투신한다. 1990년대 반핵자료정보실을 운영하면서 반핵 아시아포럼을 제안하는 등 한·일 연대활동과 반핵운동에 매진한다. 일본 시민운동가들과 교류하는 과정에서 아나키즘을 자신의 사상으로 받아들인다, 이후 해외의 아나키즘을 적극적으로 소개하며 한국 아나키즘의 새로운 상을 정립하고자 노력한다.
할아버지 김용응은 1945년에 세상을 떠나 못 봤겠지만 아버지 김태규는 1956년까지 살았으니 똑똑한 두 아들이 사회주의에 빠져 사상범으로 감옥살이하는 것을 지켜봤을 것이다. 부모로서 마음고생이 많이 심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면서 부유했던 그의 집안은 고래등 같은 기와집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김형식은 굴곡진 우리나라 현대사를 몸으로 겪었다. 어느 재능있는 소설가가 그의 가족 일대기를 글로 옮긴다면 박경리 작가의 '토지' 못지 않은 대하소설이 될 것이다. 토지는 박경리 작가의 상상력에 의한 픽션이지만 김형식의 가족사는 실화다. 더 많은 울림을 줄 것이다.
미술사에 남을 유명화가가 되기 위해서는 요절해야 한다는 말이 있다. 이중섭과 빈센트 반 고흐가 해당 요건을 완벽하게 갖춘 대표적 작가다. 가족을 부양할 능력이 없어 부인과 두 아들을 일본 처가에 보낼 정도로 어려운 생활을 한 이중섭, 동생 테오에게 생활비와 그림 재료비를 받아 근근이 생활하던 고흐. 이들은 세상을 뜬 후에야 그림 한 점에 수억에서 수백억 원까지 호가하는 블루칩 작가가 된다. 김형식의 이야기를 잘 다듬는다면 제2의 이중섭이나 반 고흐가 나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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