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우의 '그림이야기' - 자기와 닮게 그리기

2023.08.28 17:03:29

[충북일보] 미술 시간에 학생들 그림그리기 지도를 하다 보면 재미있는 일이 있다.

인물화를 그리라고 하면 자화상을 그리는 것도 아닌데 학생들 대부분이 자신과 닮게 그린다는 것이다. 심한 경우는 동물을 그려도 본인과 닮게 그리는 학생도 있다. 심리학적으로 다른 사람의 얼굴을 그릴 때 자신도 모르게 본인과 닮게 그리는 심리가 잠재하고 있는 듯하다. 이런 심리는 우리 화단을 대표하는 대가들에게도 예외가 아닌 것 같다.
◇사례 1: 충무공 이순신 동상과 김세중 조각가

광화문 앞에 서 있는 이순신 장군 동상이 현충사에 걸려있는 국가 표준영정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비판이 있었다. 현충사에 있는 영정은 곱상한 문인상인데 광화문에 있는 동상은 우락부락한 무인상이라는 것이다. 이에 동상을 제작한 김세중(1928~1986)조각가 측은 "장군의 실제 모습은 전해오는 영정이 없으며, 1953년 월전 장우성 화백이 그린 이충무공의 영정이 1968년 광화문 충무공 동상이 제작된 지 5년 후인 1973년 이순신 장군의 표준영정으로 지정됐습니다"라고 변명하고 있다. 그리고 광화문 이순신장군 동상의 얼굴이 이를 만든 김세중 조각가와 많이 닮았다는 주장이 있자, 부인인 김남조 시인은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모나리자가 다빈치를 닮았다는 이야기가 있지요. 예술가들은 얼굴을 그리거나 조각할 때 은연 중에 자기 얼굴과 비슷하게 한다고 하지만 작가와 닮았다는 말은 가족 입장에서 할 수는 없는 겁니다. 나라의 큰 인물과 비교할 수 없지요"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사례 2: 만 원권 세종대왕과 운보 김기창 화백

우리가 많이 사용하는 만 원권 지폐 속에서 우리를 보고 인자하게 웃고 있는 세종대왕은 익숙한 모습이다. 광화문에 앉아 있는 세종대왕 동상 역시 만 원권 지폐를 참고해 김영원 조각가가 제작한 것이다. 만 원권 지폐와 세종로에 세종대왕 동상은 진짜 얼굴이라 얘기할 수 없다. 세종대왕의 어진은 다수 존재했던 것으로 기록돼 있지만 임진왜란 등의 전란과 6·25 전쟁 때 화재로 전부 소실됐기 때문이다. 조선왕조 27명의 임금 중 어진이 남아있는 임금은 6명에 불과하다. 세종대왕의 영정은 1973년 세종대왕기념사업회의 의뢰를 받은 운보 김기창(1913~2001) 화백이 그린 것이다. 운보가 역사학자들의 의견과 기록, 그리고 자신의 상상력을 더해 그린 것이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세종대왕의 얼굴인 것이다. 그러나 이 세종대왕의 영정은 이후 운보의 친일 행적과 상상으로 그린 것을 표준 영정으로 인정할 것인지 많은 논란에 휩싸인다. 그중 사람들의 눈길을 가장 많이 끈 논란은 바로 세종대왕의 얼굴과 화가의 얼굴이 흡사하다는 것이었다. 영정 속 세종대왕은 쌍꺼풀이 없는 눈과 둥근 콧방울, 그리고 후덕한 인상을 하고 있는데, 이는 운보 김기창의 모습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사례 3: 천 원권 퇴계 이황과 이유태 화백

천 원권에 등장하는 퇴계 이황의 얼굴은 창백하고 핼쑥하다. 조선시대 최고 성리학자 이황의 얼굴에서 어떤 기운을 느낄 수가 없고 병색이 있어 보인다. 이 초상화를 그린 사람은 한국 화가 이유태(1916~1999)다. 퇴계 초상은 이유태 화백이 1974년 천 원권 화폐 도안용으로 그린 것인데 이황의 얼굴이 이유태의 말년 모습과 상당히 흡사하다. 천 원권 이황의 얼굴이 이유태의 얼굴이라고 단언하는 이들도 있고 소지섭 배우와 닮았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긴 것일까. 우연이든 의도적으로 그런 것인지는 이유태가 이와 관련해 기록을 남기지 않았기에 무엇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사례 4: 5천 원권 율곡 이이와 이종상 화백

서울대 동양화과 교수를 지낸 이종상(1938~현재) 화백은 1977년, 5천 원권 지폐의 도안이 바뀔 때 화폐 영정 제작을 맡게 된다. 정자관(程子冠)을 쓴 덕망 있는 선비의 모습을 한 율곡 이이의 영정이 그의 작품인 것이다. 이 작품 역시 이종상 화백과 닮았다. 한국은행은 처음 5천 원권 지폐를 만들면서 율곡 이이의 동상을 사진 찍어 영국에 보내 화폐 디자이너들에게 그려 달라고 했는데, 받아보니 서양인처럼 그려진 것이 온다. 이것을 지폐에 넣어서 만든 것을 1978년 사흘 동안 유통하다가 회수한다. 아마 이때 지폐는 희귀지폐가 돼 고가로 매매되고 있을 것이다. 그 후 한국은행은 지폐를 다시 만들고자 70세 넘은 원로 화가들 중 화폐에 들어갈 영정을 그릴 작가를 수소문했는데, 이당 김은호 화백이 물망에 올랐으나 건강상의 이유로 고사하고 36살의 이종상 화백을 추천한다.
◇사례 5: 현충사 이충무공 영정과 월전 장우성 화백

현충사에 가면 충무공 이순신 장군 영정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를 그린 장우성(1912~2005) 화백과 많이 닮았다는 구설수에 오른 적이 있다. 월전 장우성의 작품은 1973년 지정된 이후 47년간 표준영정의 영광을 누려왔다. 하지만 곧 지정 해제가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표준영정 해제의 이유로는 '복식 오류'와 장우성이 친일 화가라는 점이다. 문체부 국정감사에서 한 의원은 "충무공의 표준영정을 그린 장우성 화백은 일제를 찬양하는 그림을 다수 그렸고, 조선총독부가 주는 상까지 받은 사실까지 기록에 나와 있다"면서 "항일의 상징인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표준영정을 친일 화가가 그렸다는 자체는 말이 안 된다"고 지적했다고 한다.

화폐 속 위인들의 얼굴은 표준영정을 기반으로 한다.

표준영정이란 '국가가 공인한 위인의 초상화'를 말한다. 1973년 표준영정 제도를 만들 것을 지시한 사람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만주군관학교에 들어가기 위해 '일제 충성 혈서'를 쓰는 등의 행적으로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이 올라 있는 인물이다. 그리고 표준영정을 그린 화가들은 친일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한 상황이다. '표준영정 제도 자체가 역사적 인물의 영정을 정부가 일방적으로 선정하는 독재의 잔재'라면서 표준영정 제도 자체를 없애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여론이 일고 있다. 그리고 표준영정의 인물들은 실물 초상화나 사진이 전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화가의 상상력으로 그려진 것이다. 상상의 산물이다 보니 그린 이와 닮았다는 논란은 영원히 따라 다닐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필자는 어릴 때 타임머신이 발명된다면 카메라를 하나 준비해 과거로 가 세종대왕이나 을지문덕, 이순신 장군 같은 위인들의 얼굴을 찍어오고 싶었다. 한 작가의 상상력으로 그려진 초상화를 위인으로 모신다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빨리 타임머신이 발명될 날을 기다려 본다.

이동우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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