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화가 중 그림이 가장 비싸게 팔리고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정답은 '수화 김환기(樹話 金煥基, 1913~1974)'다. 지난 2019년 홍콩 크리스티 경매장에서 그의 대표작 '우주'가 132억 원에 낙찰됐다. 더 놀라운 것은 한국 근·현대 미술 경매 낙찰가 톱 10 중 9위인 이중섭의 '소'를 제외하면 나머지 9개가 모두 김환기의 작품이라는 것이다. 평범한 미술대학 교수였던 김환기 화백이 이렇게 한국 현대 미술을 대표하는 거장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내 김향안(1916~2004)의 통 큰 내조가 크게 작용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소설 '날개'와 '오감도'라는 난해한 시를 써 유명한 시인이자 소설가, 수필가, 건축가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 간 이상(본명 김해경, 1910~1937)의 아내는 변동림(1916~2004)이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두 천재 예술가의 배우자였던 김향안과 변동림은 같은 사람이라는 점이다.
그는 경기여고를 졸업하고 이화여전 영문과에 다니던 그 당시 최고의 신여성이었다. 1936년, 이상의 나이 스물여섯, 변동림의 나이 스무살 때, 친구 구본웅(미술가, 1906~1953)의 소개로 둘은 처음 만났다.
변동림은 이상의 과거 따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단지 그의 천재성을 알아보고 신여성답게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다가갔다.
변동림의 집안에서는 소문이 좋지 않은 이상과의 만남을 반대했다. 그럼에도 둘은 굴하지 않고 신혼살림을 차린다. 그러나 신혼을 즐기기에 이상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너무나 피폐해져 있었다. 이상은 햇볕 한 점 안 들어오는 셋방에서 하루종일 누워 있었고, 생계는 변동림이 일본인이 운영하는 술집에 나가 일을 하며 책임져야 했다.
이런 상황을 안타깝게 지켜보던 구본웅은 일본에 가서 얼마간 바람이라도 쐬고 오라며 이상에게 여행경비를 쥐여준다. 그해 10월 이상은 결혼 3개월 만에 평소 그토록 가보고 싶어 했던 동경으로 떠난다.
일본에 도착한 이상은 "동경은 속 빈 강정"이라고 비아냥거리며, 다시 경성으로 돌아가고 싶어했지만 날로 악화되는 결핵 때문에 선뜻 돌아오지 못한다. 피폐해진 그를 동경에 있던 친구들이 병원에 입원시키지만, 양쪽 폐가 형체도 없이 녹아내린 후였다. 뒤늦게 소식을 들은 변동림은 기차와 배를 갈아타며 꼬박 이틀을 걸려 동경에 도착하지만, 1937년 만 27세의 나이로 그는 숨을 거두고 만다. 그의 육신은 한 줌의 재가 되어 미아리 공동묘지에 안장되고 둘의 1년간의 결혼 생활은 종지부를 찍는다.
변동림은 이후 딸 셋(첫째 딸 김영숙은 경원대 총장인 윤형근 화백과 결혼)을 둔 무명 화가 김환기를 만났는데, 이때도 집안의 반대가 심했다고 한다. 그러나 변동림은 변씨 가문과 인연을 끊고, 이름마저 김향안으로 개명한 후 1944년 김환기와 결혼한다.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은 가난하고 힘겨웠지만, 김향안은 특유의 살뜰함으로 김환기가 예술에 몰두할 수 있도록 배려한다. 그녀는 살림이 어려울 때 백자 항아리를 사 들고 오는 철없는 김환기를 단 한 번도 나무라지 않았으며, 끼니를 걱정할 정도로 힘들었던 피난 시절에도 그를 탓하지도 않았고, 생계를 위해 친구들에게 그림을 팔러 다니고 끼니를 잇기 위해 쌀을 꾸러 다녔다.
해방이 되자 김환기는 서울대와 홍익대에서 미대 교수(1948~1962)로 초빙됐다. 김환기는 학생들을 지도하면서 마음만은 현대미술의 중심지인 유럽으로 가 작품활동을 하고 싶어 한다. 수입이 변변찮아 막연하게 외국행의 꿈만 꾸고 있는 김환기에게 김향안은 "그럼, 내가 파리로 먼저 가지 뭐"라며 혈혈단신 파리로 간다.
1955년 파리에 도착한 김향안은 미술사와 미술평론을 공부하며 김환기의 작업실을 구하는 등 정착할 준비를 한다. 1년 후 김환기는 교수직을 버리고 아내가 있는 파리에 가 살다가, 1964년에는 현대미술의 중심지 뉴욕에 자리를 잡는다.
김향안은 프랑스와 미국에서도 여전히 김환기 대신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동분서주하면서, 이제 단순한 후원자가 아닌 동등한 '예술적 파트너'로서의 면모를 보이기 시작한다. 수준급의 프랑스어와 영어 실력을 갖췄던 그녀는 김환기의 통역사이자 대변인이었으며, 미술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바탕으로 그의 작업을 돕는다. 피카소를 좋아하는 남편을 위해 신문에 피카소에 관한 기사가 나오면 전문을 번역해 식탁 위에 올려둘 정도였다고 한다.
김환기는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 하루 16시간씩 작업에 몰두한다. 이런 고행에 가까운 작업량으로 몸을 혹사한 그의 건강 상태는 눈에 띄게 악화돼 병원에 입원했고, 결국 수술 도중 뇌출혈로 61년간의 생을 마감하고 만다. 1974년, 김향안은 그렇게 자신의 성과 이름마저 바꿀 정도로 사랑했던 남편을 먼 곳으로 떠나보낸다.
1974년 김환기의 죽음 이후에도 김향안은 고인의 작품을 모으고 돌보는 데 모든 노력을 기울인다. '환기 재단'을 설립해 김환기의 작품을 세상에 알리는 데 일생을 바쳤고, 1994년 '환기 미술관'을 서울 부암동 산기슭에 개관시킨다.
그러다 수화가 세상을 떠난 지 정확히 30년 후인 2004년 김향안도 허드슨강이 내려다보이는 양지바른 남편의 묘 옆에 나란히 눕는다.
혹자는 그녀의 이런 슈퍼우먼과 같은 파란만장한 삶을 두고 "김환기가 꿈을 꾸면 김향안이 그것을 현실로 만들었다"라고 평하고 있다. 김향안의 삶을 한편의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면 많은 사람들에게 울림을 줄 것이다.
김환기에게 김향안이 있다면 현산(玄山, 필자의 아호)에게는 아내 Y가 있다.
이 글을 쓰며 자료를 찾다가 추운 겨울 키 차이가 많이 나는 김환기와 김향안이 뉴욕 거리를 나란히 걷고 있는 사진을 처음 봤을 때 '아! 이것은 우리 부부 모습과 비슷하다'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키 차이뿐만 아니라 단아하고 야무지게 생긴 인상과 김향안과 아내가 영어를 전공했다는 점도 공통점이다.
필자가 30년 넘게 작품활동에 매진할 수 있었던 것은 아내 Y의 적극적인 지원이 없었으면 불가능했다. 돈도 되지 않는 고급 취미 활동한다고 큰돈 쓰는 것에 대해 불평하지 않았고, 오히려 평범한 미술교사로 안주하지 않고, 작가 활동을 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학위논문 영작, 전시회 도록 및 신문칼럼 교정, 개인전 준비, 작품 반·출입을 도맡아 해 주는 등 매니저 역할을 톡톡히 해 주고 있다. 몇 년전 교직을 명퇴하고는 현산 작품활동에 도움이 될 것 같다며 청주시립미술관에서 일반 관람객들에게 작품, 작가 그리고 각 시대 미술의 흐름 따위를 설명해 주는 역할을 하는 '도슨트(docent) 연수'를 받기도 했다.
매니저님의 무엇보다도 큰 지원은 공무원 봉급으로 무리라고 할 수 있는 '작업실(이동우 미술관)'을 만들 때 흔쾌히 허락해 줬고, 자청해 '이동우 미술관 정원사'가 돼 멋진 정원을 관리해 주고 있다.
필자는 김환기처럼 한국현대미술을 대표하는 화가가 못 돼도 김환기처럼 사랑하는 아내를 두고 30년 먼저 하늘나라에 가지 않을 자신은 있다. 내년 3월에는 33년 교직 생활을 접고 전업 작가의 길을 갈 예정인데, 앞으로 남은 인생 그림과 매니저님을 많이 사랑하면서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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