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1월 15일 경기도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열린 기획전에서 한 관람객이 윤형근 작가의 상파울로 비엔날레 출품작 '69-E8'을 감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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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에는 작가의 이름을 건 미술관이 아직 없다. 앞으로 생긴다면 1순위로 거론되는 작가가 윤형근(1928~2007)이다. 그 정도로 그는 우리나라 미술사에 큰 획을 그은 작가다. 그는 면포나 마포 위에 2~3개의 청다색 또는 검은색 기둥을 세운 단색화 그림으로 유명하다.
그는 청주 원도심에서 승용차로 40분 거리에 있는 미원면 어암리에서 태어났다. 친구의 주말농장이 어암리에 있어 몇 번 가봤는데 산자가 수려하고 윤씨들이 많이 몰려 사는 동네였다.
윤형근 화백은 청주상고(현 대성고)를 다니며 일본에서 공부하고 온 미술교사 안승각(청주교대 교수 역임)의 지도를 받는다. 그가 다닌 청주상고는 상업계열학교면서 특이하게 미술가를 많이 배출한 학교로 유명하다. 박노수(한국화가·서울대 교수), 김봉구(조각가·이화여대 교수), 정해일(서양화가·청주교대 교수), 박영대(한국화가·백석대 석좌교수), 이석구(국전대통령상 수상·공주대 교수), 풍속화가 이서지, 신용일(직지화가)등 수많은 작가들이 이 학교를 다녔다.
윤 화백이 살아온 과정을 살펴보면 파란만장한 우리나라 역사와 맞물려 있다. 그의 삶에는 가슴 아픈 한국 근현대사가 새겨져 있다고 할 수 있다.
윤형근, Umber 7, Oil on linen, 130×161.3㎝, 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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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청주상고 졸업 후 잠시 미원금융조합에서 일하다가 적성에 안 맞는다는 것을 느끼고 화가가 되기 위해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의 문을 두드린다, 이 때 면접에서 면접위원이자 인생의 운명적인 사람을 만나는데, 그 사람은 후에 장인이 된 김환기 교수다. 두 사람은 서로 존중하며 장인과 사위가 아닌 아버지와 아들처럼 지냈다고 한다.
미 군정이 일제강점기에 있던 여러 단과 대학들을 통합해 국립서울대학교를 만들겠다(국대안)고 발표하자, 통폐합 대상 학교 교수와 학생들은 2년간 격렬히 반대 시위를 한다. 윤형근도 이 시위에 참가했다가 제적당하고 만다. 1950년 6·25 전쟁 직후에는 대학시절 시위 전력으로 보도연맹에 끌려갔다가 학살당할 위기를 간신히 모면하기도 했다. 전쟁이 끝나고 1954년 서울대 복학을 원했으나 시위 전력 있는 학생들은 복학을 시켜주지 않았다. 홍익대로 자리를 옮긴 김환기 교수의 도움으로 홍익대 서양화과에 편입해 졸업한다. 1956년에는 전쟁 중 피란 가지 않고 서울에 남아있었다는 이유로 6개월간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을 했다. 졸업 후에는 고향인 청주로 내려와 청주여고 미술교사 생활을 하며 이승만 정권에 대해 입바른 소리를 했다가 눈밖에 나 부당한 발령을 받자, 사직하고 만다.
그 후 유신체제가 한창이던 1973년, 숙명여고 미술교사로 있을 때도 어처구니 없는 일을 겪는다. 당대 최고 권력자인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의 비호로 부정 입학한 재벌가 딸의 비리를 따져 물었다가, 즐겨 쓰던 '베레모'가 레닌의 것과 닮았다는 이유로 '반공법 위반'으로 잡혀가 고초를 겪었다. 세파에 시달릴 때로 시달린 윤형근은 1973년(45세)부터 본격적으로 작품 제작에만 집중한다. 조각가 최종태(1932년생, 서울대 교수)는 "숙명여고 사건이 아니었으면 윤형근 선생이 그림을 안 그렸을지도 모른다"며 "그 사건 이후 10년 유신시절 동안에 윤형근의 그림이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숙명여고 사건 이후 그의 작품은 밝은 색채가 사라지고 검은색 위주의 작품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윤형근, 무제, Oil on linen, 60.0×41.0㎝,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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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볼 때 시대의 수레바퀴에 밟힌 것이 개인적으로는 많이 억울하고 아픔이 있었지만 회화사로 봐서는 걸출한 대가를 하나 배출하는 계기가 됐다고도 볼 수 있겠다.
윤형근 화백은 국립현대미술관과의 인터뷰에서 아름다움을 논한다. 그는 "피상적으로 표피가 알록달록하고 빛깔이 곱고 뭐 이런 게 아름답다고 난 생각 안해. 진리에 사는 것, 진리에 생명을 거는 거. 그게 인간이 가장 아름다운 거예요. 진실한 사람은 착하게 살게 돼있고, 진실하고 착한 사람은 내면세계가 아름답게 돼 있어. 그것 뿐이예요. '그림만 잘 그리면 됐지 그 사람 사생활은 어찌 돼도 좋다' 이렇게 볼지 몰라도 인간이 바로 서야…. 작품이란 그 사람의 흔적이니까, 분신이니까 그대로 반영되는 거에요"라며 작가의 인격이 훌륭해야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나라 미술과 교수 중 종합대학교 총장을 한 사람은 두 명이 있다. 한 명은 홍익대학교 총장을 한 이대원 화백(경성제대 법학과 출신)이고, 또 한 명은 오늘 얘기하고 있는 경원대학교 총장을 한 윤형근 화백이다.그 흔한 대학원도 안 나온 학사 학위 출신이 대학 총장을 했다는 것은 여러 가지로 시사하는 의미가 크다. 윤 화백의 일생을 살펴보면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고 항거하는 대쪽 같은 사람이었다. 말수는 적었지만 말과 행동에 진심이 드러난 인격자였기에 대학의 최고 자리인 총장으로 추대받지 않았나 생각된다.
전국적으로 살펴보면 작가의 이름을 딴 미술관들이 많은 관람객들을 불러들이고 있다. 6·25전쟁 때 잠시 피난 와 살았다는 것을 스토리텔링해 제주도 서귀포에 세워진 '이중섭 미술관', 동백림사건으로 감옥살이를 했다는 것도 인연이라고 대전광역시에 세워진 '이응노 미술관' 등이 대표적인 미술관이다.
충북은 조선시대 풍속화의 대가 단원 김홍도,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조각가 김복진, 단색화의 대가 윤형근 등 걸출한 예술가들이 태어나거나 인연이 있는 지역이다. 더 늦기 전에 작가들의 이름을 건 미술관들이 우후죽순처럼 건립돼야 한다. 그래야 충북이 미술문화의 메카로 발돋음할 것이다. 하루빨리 '윤형근 미술관'이 청주에 건립되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