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일보] 충남 예산에는 '수덕사(修德寺)'라는 천년고찰이 있다. 이곳에 가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 대웅전과 절 앞에 민속촌에서나 있을 것 같은 '수덕여관(修德旅館)'이라는 간판을 단 초가를 볼 수 있다.
지금은 리모델링을 과하게 해서 드라마 촬영 세트장 느낌이 나지만, 이 수덕여관은 우리나라 미술사에 큰 획을 그은 두 명의 화가와 깊은 인연이 있는 유서 깊은 곳이다.
그중 한 명이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화가 나혜석(1996~1948)이다. 최린과의 불륜으로 이혼을 당하고 친구인 일엽스님(1896~1971)이 있는 수덕사를 방문해 출가를 원했으나, 만공스님(1871~1946)으로부터 거절당하자 한동안 수덕여관에 머물며 학생들에게 그림을 가르친 인연이 있다.
그리고 수덕여관과 인연이 있는 또 한 명의 화가는 고암 이응노(1904~1989)다. 나혜석이 수덕여관에 머물며 학생들에게 그림을 가르칠 때 학생 중 한 명이 이응노다.
이응노는 나중에 아예 수덕여관을 매입한다. 그러다 조강지처에게 넘겨 주고 22살 연하 제자 박인경과 외국으로 간다.
고암은 동양화의 옛 기법에 머물지 않고 현대적 추상화를 시도한 한국 현대미술사의 거장이다. 동서양 예술을 넘나들며 '문자추상', '군상' 시리즈 등 독창적인 화풍을 선보이며 유럽과 미국에서 수많은 전시회를 연다.
1924년 선전에서 수묵화로 입상하는 등 초창기는 동양화가로 활동하다 1938년 일본 가와바타미술학교의 초청을 받아 서양화를 공부하면서 동양화와 서양화의 화풍을 조화시킨 작업을 한다. 그리고 프랑스 미술협회의 초청을 받아 1958년 파리로 건너갔고, 프랑스에서도 콜라주와 수묵화를 접목한 작품으로 주목받는다.
그러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잘나가던 고암에게도 시련이 닥쳐온다. 1965년, 북한 공작원이 6·25전쟁 때 납북된 아들을 만나도록 해주겠다는 말에 동베를린으로 간 것이 화근이 되어 한국으로 끌려와 구속된다. 이것이 '동베를린 사건'이다.
그러나 자유가 박탈된 감옥생활에서도 그의 예술혼은 꺾이지 않는다. 그는 감옥 안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는 다 이용해 작품을 만든다. 나무 도시락의 조각들을 하나하나 떼어내고 그 위에 틈틈이 먹지 않고 모은 밥을 붙이고, 덕지덕지 붙은 나무조각들 위로 배식용 고추장과 간장을 발라 색깔을 입혀 나무 도시락 콜라주 작품을 만든다. 이후 종신형을 선고받았다가 1969년 광복절 특사로 사면되어 자유의 몸이 된다.
이 과정에서 특이한 것은 고암이 대전교도소에 있을 때 옥바라지는 조강지처인 박귀희(1909~2001)의 몫이었다. 고암은 출옥 후 잠시 수덕여관에 머물며 몸을 추스르다 젊은 처가 있는 파리로 가버린다.
박귀희는 젊은 여자에게 눈이 멀어 떠나버린 서방이 뭐가 예쁘다고 옥바라지를 하고 집에까지 들여 몸조리까지 해줬는지 이해가 안 된다. 여기서 한국 여인네의 지고지순한 심성과 고암의 이기심을 엿볼 수 있다.
수덕여관에 가면 마당에 큰 바위가 하나 놓여있다. 이 바위를 자세히 살펴보면 음각으로 새겨진 추상문자들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옥고를 치른 후 수덕여관에 있을 때 고암이 직접 새긴 작품이다. 끓어오르는 표현의 의지를 이런 식으로 표현했던 것이다. 이응노는 회고록에서 "수덕여관에서 참 오랜만에 한가하게 지냈지. 산책하고 그림 그리고 산을 오르내리기도 하고. 그러던 어느 날 우물 근처 너럭바위에 앉아 넋 놓고 계곡 물소리를 듣는데 좋은 생각이 떠올랐어. 바위에 그림을 그리는 거 말이야. 나는 곧 지필묵을 갖추고 바위 옆면을 따라가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지"라고 당시를 회상한 바 있다.
예산 수덕여관을 가게 되면 마당에 있는 고암이 새긴 추상문자 바위를 꼭 살펴 보기 바란다.
이후 수덕여관을 떠나 외국에 정착한 고암은 '백건우, 윤정희 부부 납치 사건'의 배후로 둘째 부인 박인경이 지목되어 고국에서 변절자로 낙인 찍히자, 이를 견디다 못해 1983년에 프랑스 국적을 취득한다.
그런데 모순적인 것은 이런 고암에 대해 대한민국은 많이 관대했다는 것이다.
고암의 출생지를 관광 상품화하려는 홍성군과 예산군은 법정 공방을 벌인다. 그리고 대전시에서는 2007년 대전시립미술관 옆에 번듯한 이응노 미술관을 건립한다. 고암과 대전은 별로 인연이 없다. 굳이 인연을 만든다면 대전교도소에서 수감생활을 한 것밖에 없다.
오랜 공방 끝에 고암의 출생지는 홍성군의 승리로 끝나고 예산군에서는 수덕여관 옆에 "선미술관"을 개관해 고암의 예술세계를 기리고 있다. 고암이 6·25전쟁 당시 피난을 내려와 있던 곳이 바로 예산이었으며 출소 이후에도 잠시 머물던 수덕여관이 예산군에 있기 때문이다. 고암의 첫 번째 부인인 박귀희 여사는 고암이 프랑스로 떠난 이후 50여 년간 수덕여관을 지켰고 이후 수덕사는 수덕여관을 보존하자는 여론이 있자 이를 복원하고 바로 옆에 미술관을 건립한 것이다. 이를 볼 때 고암은 예술가로서 복이 많은 사람이다.
홍익대학교와 서라벌예술대학 동양화과 교수를 지냈고, 외국에 나가 자신의 작품세계를 전 세계에 맘껏 펼쳤던 보기 드문 한국화 작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후에는 대전, 예산 등지에서 미술관들이 건립되는 호사를 누리기까지 한다.
1989년 삼성에서 운영하는 호암미술관에서는 대규모 '고암 초대전'을 기획한다. 1월 10일, 이 전시회에 출품할 작품을 마무리하다가 고암은 심장마비로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한다. 그때 그의 나이 85세로 생일을 이틀 앞둔 날이었다.
고암의 일대기를 살펴보면 이념의 잣대로 그의 일생을 바라보기에는 남긴 자취가 너무 크다.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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