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우의 '그림이야기' - 이쾌대 화백 '군상'

2023.01.19 14:49:34

[충북일보] 올 9월에 미국 '로스앤젤레스 카운티뮤지엄(LACMA)'에서는 우리나라 국립현대미술관과 공동 주최한 기획전이 열렸다.

이 전시에는 한반도의 격동기였던 1897~1965년에 나온 회화와 조각, 사진을 엄선해 128점이 선보였는데, 특이한 것은 전시장 입구에 걸린 '군상Ⅳ'이라는 작품 주위엔 항상 많은 이가 몰렸다고 한다.

필자도 이 작품을 처음 봤을 때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 천정화인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작품이 연상되는 역작이라 생각했다. 규모면에서는 비교가 안 되지만 "우리나라에도 이런 탄탄한 실력을 갖춘 작가가 있구나!" 감탄한 적이 있다.
그럼 이 '군상Ⅳ' 작품은 누가 그린 것일까요? 정답은 이쾌대(1913∼1965)화백이다.

많이 들어보지 못한 이름인데, 그럴 만한 이유가 한국전쟁이 끝나고, 철의장막 북한으로 건너가 쓸쓸히 생을 마쳤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의 그림을 1980년대 말에서야 처음 볼 수 있었다. 월북자라는 이유로 작품은 물론이고 이름 석 자도 꺼내지 못하는 분위기로 있다가, 88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정부에서는 '월북 작가 해금' 조치로 반세기만에 빛을 보게 된 것이다.

이쾌대의 작품이 세상에 알려지기까지에는 30년간 가족들이 피나는 노력이 있어 가능했다. 남편의 월북 이후 서울에서 포목점을 하며 자식들을 키운 부인은 그림을 팔라는 수집가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으며, 작품을 경찰에게 압수당할까봐 신문지에 둘둘 말아 다락방에 숨겨두었다고 한다.

이쾌대는 경북 칠곡군에서 부잣집 아들로 태어났다. 부자도 보통 부자가 아니고 3만석 지기 대지주였다.

5천평에 이르는 그의 집에는 교회, 학교, 테니스 코트가 있었다고 전해지고, 결혼하고 일본에 유학 가서는 거처할 집을 새로 지을 정도로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다고 한다.
그가 화가가 된 것은 흥미로운 계기가 있었다.

휘문고보 시절, 야구를 지나치게 좋아해서 공부에 전념하기를 바란 부모님이 야구 빼고 좋아하는 건 무엇이든지 하라고 했더니 뜻밖에 '미술'을 선택하는 바람에 그림 공부하러 일본에까지 갈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서양화가 '장발(서울대미대 초대 학장, 장면총리 동생)'을 담임교사로 만나면서 그림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1932년에는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하여 화단에 이름을 알렸다.

일본에서 그림공부하고 돌아와 서울에 정착한 이쾌대는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부터 가시밭길을 걷는다. 만삭인 아내를 두고 갈 수 없어 서울에 남았다가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의 강요로 김일성, 스탈린 초상화를 그리는 강제부역을 한다. 이 때문에 연합군의 서울 수복 때는 공산주의자로 붙잡혀 '거제도 포로수용소'로 끌려가는 신세가 된다.

거제도 포로수용서를 배경으로 한 영화 '흑수선'을 봤을 때와 지금은 관광지가 된 거제도 포로수용소를 방문했을 때, 이곳에서 포로생활을 했을 이쾌대 화백을 생각한 적이 있다.

전쟁이 끝나고 이쾌대는 1953년 포로 교환 때, 가족이 있는 '남'이 아닌 '북'을 선택하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한다.

그 이유는 아직 정확히 밝혀진 바 없지만, 서울에서의 초상화 강제부역과 친형인 '이여성'의 월북 등으로 남한에서 자신이 무사하지 못할 거라 우려했고, 또한 분단이 오래 갈 것을 예상치 못한 것 같다고 보고 있다.

그는 "아껴 둔 나의 채색 등은 처분할 수 있는 대로 처분하시오. 그리고 책, 책상, 헌 캔버스, 그림틀도 돈으로 바꾸어 아이들 주리지 않게 해 주시오. 전운이 사라져서 우리 다시 만나면 그때는 또 그때 대로 생활 설계를 새로 꾸며 봅시다. 내 맘은 지금 안방에 우리집 식구들과 모여 있는 것 같습니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포로수용소에서 부인에게 보낸 것을 봤을 때 가족을 많이 생각하는 가슴 따뜻한 가장이었다.

북한으로 넘어간 이쾌대는 당에서 요구하는 작품을 만들다가 1965년 '위 천공'이 악화되어 사망하였다. 그 때 그의 나이 53세였다.

그 전에 월북한 친형 '이여성'도 북한에서 '민족적 사회주의 정당 활동'을 하다가 숙청당한 상황이었다.
이쾌대의 작품세계는 서양의 고전적인 기법으로 인체를 정확하고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듯 하면서도, 수묵화와 비슷한 필법으로 윤곽선을 두드러지게 표현하여 입체적인 명암은 자제되고 전체적으로는 그림이 평면적으로 보이는 느낌을 받는다. 서양과 동양의 기법을 혼합하여 적절히 사용함으로써 특유의 한국적 리얼리즘을 탄생시킨 작가로 평가받는다.

백자 그림만 잔뜩 걸린 도상봉의 전시를 보고 와서 "그림은 참 잘 그렸지만, 이런 시절에 어떻게 도자기만 저렇게 그릴 수 있는지 이해가 가질 않는다."고 말한 것을 봤을 때 '군상'같은 작품이 왜 나올 수 있었나 짐작이 갔다.

그는 현실을 왜면하지 않고 '시대정신'을 민감하게 받아들인 작가였다.

'북'을 선택하지 않고 '남'에 남아 있었으면 우리 한국미술사를 다시 쓸 정도의 명작들이 나오지 않았을까? 많이 아쉬움이 남는 작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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