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통영에 위치한 전혁림미술관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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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의 나폴리'라 불릴 정도로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는 경남 통영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충무(忠武)'라 했다. 우리가 즐겨 먹는 '충무김밥'이 유래된 곳이었다. 1995년 충무시와 통영군이 통합되면서 충무라는 이름은 사라지고 통영이라 부르고 있는 것이다. 충무는 이 지역에서 활동한 이순신 장군의 시호인 '충무공'에서, 통영(統營)은 지금의 해군사령부라고 할 수 있는 '삼도수군통제영'에서 유래됐다. 특이한 것은 인구 12만에 불과한 작은 도시 통영에서 우리가 누구라면 다 아는 수많은 예술가들이 배출됐다는 것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는 구절이 대표적인 시 '꽃'을 쓴 시인 김춘수(1922-2004),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는 구절이 유명한 시 '행복'을 쓴 시인 유치환(1908-1967), 수많은 연예인을 배출한 서울예전(현 서울예술대)를 설립한 '연극계의 거목' 동랑 유치진(1905-1974, 유치환의 형), 우리 소설의 문학적 승리라고 평가받는 대하소설 '토지(土地)'의 작가 박경리(1926-2008), 소설가 김용익(1920-1995), 시조시인 김상옥(1920-2004), 세계적인 작곡가 윤이상(1917-1995), 화가 전혁림(1915-2010), 김형로 등이 주인공들이다. 통영 출신은 아니지만 화가 이중섭(1916-1956)과 시인 백석(1912-1996)도 이곳에 잠시 머물며 작품활동을 했다고 전한다.
이처럼 '통영'이라는 작은 도시에 걸출한 예술가들이 다수 나올 수 있었을까·
이것에 대해 박경리는 "통영사람에게는 예술가의 DNA가 흐른다. 이순신과 300년 통제영 역사가 통영문화에 오래도록 영향을 미쳤다. 자연이 아름다운 것은 작가에게 큰 충격을 준다, 통영은 예술가를 배출할 여건을 갖춘 곳"이라고 말하고 있다.
전혁림 화백의 ‘통영항(255.6×602.6㎝, 2006)’. 노무현 전 대통령의 요청으로 제작된 작품으로 현재 청와대가 소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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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얘기하고자 하는 화가는 통영이 낳은 수많은 예술가 중에 한 명인 '바다의 화가' 전혁림이다.
전혁림은 민화나 단청에서 느낄 수 있는 전통적인 색채와 선, 문양을 소재로 한 독특한 색면구성의 추상회화를 선보이면서 우리 고유의 색채를 현대적 감각으로 재조명한 색채 화가로 평가받는다.
전혁림은 지난 2005년 경기 용인 이영 미술관에서 '90, 아직은 젊다' 전시회를 열어 대기만성형 작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줬다. 이 전시회와 관련해 재미있는 얘기가 전해오고 있다.
전시회가 열리고 있는 어느 날 아침 뉴스에 전시 소식이 실렸다. 아침 방송을 보던 노무현 대통령은 "바로 가자"하고는 미술관을 깜짝 방문한다. 대통령이 개인적으로 전시회를 방문한 것은 특이한 경우다. 전시를 관람한 노 대통령은 '한려수도'라는 작품에 감동을 받고 구매를 원했다.
그러나 그 작품의 사이즈가 너무 커 청와대에는 걸 만한 곳이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같은 그림을 작게 다시 그려줄 것을 청했고, 전혁림은 수락해 청와대에 그의 작품이 걸리게 되었다고 한다. 노무현 대통령은 부산에서 변호사를 하던 시절부터 전혁림의 그림을 좋아했었다고 한다. 노 대통령이 전 화백의 그림을 좋아하던 친구의 집에서 그림을 많이 접했던 까닭이다. 그런데 나이가 많아 돌아가신 줄 알았던 전 화백의 전시회 소식을 듣자 반가움에 급히 달려갔던 것이다.
통영에는 전혁림의 아들이 운영하는 검이불루 화이불치(檢而不陋 華而不侈)한 '전혁림 미술관'이 있는데 통영을 방문하면 꼭 방문해 보기를 권한다.
특이한 것은 미술관 건물이 하나의 예술 작품이고, 외벽은 그대로 전시실이라는 것다. 건물에는 전혁림 화백과 아들 전영근 화백의 작품들이 7천500장이나 전시돼 있다. 세라믹 타일에 두 부자 화가의 작품을 담아 외벽에 붙인 것이다. 미술관 건물의 안과 밖이 모두 전시장이니 이 미술관은 휴관일에 가도 작품을 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전혁림은 지난번 소개했던 박수근과 같이 제도권 교육 없이 독학으로 대가의 반열에 오른 작가이다.
'전혁림 : 다도해의 물빛 화가'라는 책에 따르면 "예술은 선생이 필요 없어. 자기 혼자 배우는 거라고. 나는 특별한 스승이 없이 나 혼자 독학으로 그림을 배웠어. 스승이 있다면 책하고 자연이지. …(중략)… 어떤 이들은 그림 많이만 그리면 뭐하느냐, 좋은 그림 하나만 그리면 되지 한다. 하지만 만개를 그려야 그중에 하나 좋은 그림이 나오는 것이다. 대가라 해서 그리는 것마다 명작이 나오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피카소나 마티스 같은 천재 화가들도 하루에 열점 이상씩 그렸다. 정열과 열정이 있어야 한다"고 전 화백은 말했다.
이처럼 전혁림은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추구했고 고령이 된 뒤에도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열정적으로 작업을 했던 까닭일까. 전혁림 화백이 90살이 넘어서 내놓은 작품들에서도 정열이 넘친다. 원로의 작품이 아니라 청년작가 작품 같은 활기가 느껴진다. 전혁림은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이 생각나게 하는 작가로 필자는 그의 열정과 장수를 닮고 싶다.
우리나라 화가 중 장수하면서 오랫동안 작품활동을 한 순위를 매겨보면, 107살까지 살다 간 이중섭의 친구 김병기(1916-2022)가 독보적인 1위이고, 그 뒤를 이어 2위는 전혁림으로 96세에 세상을 뜨기 전까지 붓을 놓지 않았다 한다. 3위는 올해 94세로 세상을 뜬 박서보(1931-2023)화가일 것으로 보인다.
그림만 생각하고 그림만 그리던 전혁림 화백은 2010년 5월 25일 3천여 점의 작품을 남기고 지구별 소풍을 마친다. 하늘나라가 있다면 그는 그곳에서도 붓을 놓지 않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