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일보] 그동안 '이동우의 그림 이야기'에 소개되었던 미술가들은 장승업, 최북, 이인성, 권진규, 천경자 등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밝은 분위기를 위해 많은 복을 누리다 간 한 미술가를 소개하고자 한다.
우리 옛사람들을 오복(五福)이라고 해서 살면서 간절히 바라는 다섯 가지를 정했는데, 그 중에서도 '오래 살고 복을 누리며 건강하고 마음이 편안한 것'을 으뜸으로 꼽았다.
이 수복강녕(壽福康寧)을 맘껏 누리다 간 미술가가 있는데, 그가 김병기 화백이다.
김병기는 올해 3월 1일 107세로 세상을 떴다.
100살 넘게 장수한 것도 대단하지만 세상을 뜨기 전까지 현역 작가로 왕성한 작품활동을 했다는 것은 경이감을 느끼게 한다.
1916년 평양에서 태어난 김병기는 국내 추상미술의 1세대로 추상과 구상, 창작과 비평을 넘나들며 폭넓은 활동을 했다.
김환기, 유영국 등과 함께 한국 화단에서 추상미술을 개척한 그는 한국 근·현대미술의 살아있는 역사였다.
미술 교과서에 나오는 전설적인 화가 이중섭과는 평양종로보통학교 동창이었다. 이중섭이 1956년 41살로 세상을 떴으니, 친구보다 무려 66년을 더 살다가 간 것이다.
이중섭은 죽어서 신화가 되었고, 김병기는 살아서 신화를 쓰다 죽은 것이다.
이중섭과는 절친으로 보통학교 6년간 단짝이었고, 일본 유학도 같이 갔으며, 험한 생활고로 건강을 크게 해친 이중섭이 서울적십자병원에서 황달, 정신병, 거식증 등이 겹쳐 안타깝게도 생을 마치고 방치되었을 때도. 시인 구상과 그의 시신을 수습해서 장례를 치르고 망우리 공원묘지에 묻어 준다.
그런데 김병기는 이중섭의 친구로 기억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작가 김병기로 남길 원했던 것 같다.
금수저로 태어난 김병기는 고희동, 김관호와 함께 서양미술 선구자로 꼽히는 김찬영이 아버지였다. 지금도 일본으로 유학 간다는 것이 쉽지 않은데, 김병기는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에 선친의 뒤를 이어 일본으로 유학 가 이중섭, 김환기, 유영국 등과 그림공부를 한다.
일본 유학 후 평양으로 돌아와 활동하던 중, 휴머니즘 예술관을 지닌 그는 북의 전체주의와 맞지 않아 1948년 월남한다. 월남 후에는 서울대 강사, 서울예고 미술과장을 하면서 우리나라 미술인들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한국미술협회 이사장'을 지낸다.
그는 재복(財福), 수복(壽福)과 더불어 감투 운까지도 좋았던 것 같다. 한국미술협회 이사장으로 1965년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참석했다가 큰 그림을 그리기 위해 귀국하지 않고 홀연히 미국에 정착해 작품활동을 지속한다.
오랫동안 국내 화단에서는 점차 잊혔던 그는 2014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김병기-감각의 분할' 전을 열면서 복귀해 최근까지 국내에서 작품활동을 해왔고, 2015년 대한민국 국적을 회복했다. 추상미술 형성 초기부터 서구 미술의 역사적 전개를 면밀하게 고찰한 김 화백은 현대적 조형 언어로서 추상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했다. 그의 작품은 드로잉과도 같은 선의 표현과 공간에 대한 실험이 두드러진 것이 특징으로 황톳빛· 붉은빛 색면 위에 자를 대고 선을 그어 화면을 분할하는 식으로 작업했다.
그는 2019년 104세의 나이에 개인전을 여는 활발함을 보여주는데, 이는 역대 최고령 개인전 기록이라고 한다. 그리고 2017년 102살의 나이로 예술가들의 최고 명예인 예술원 회원이 된다.
요즘 단색화로 주목받고 있는 정상화 화백(91)이 10년 전 미국에 갔을 때 김병기 화백 작업실를 방문했다고 한다. 둘은 1950년대 서울대학교에서 사제의 인연을 맺은 사이였다.
100살 가까운 나이의 노스승은 인사차 찾아온 제자에게 "정군 올해 나이가 어떻게 되었지?"
"예 선생님 80 조금 넘었습니다."
"아 그래, 그림 그리기 아주 좋은 나이야, 열심히 하게"라고 말했다는 일화는 영화 속에서나 나올 만한 흐뭇한 장면이다.
그는 100살이 넘어서 서너 시간을 얘기해도 지칠 줄을 몰랐고, 그림이 잘되지 않는 날에는 새벽까지 그렸다고 한다.
"도대체 선생님의 건강 비결과 나이가 뭐라고 생각하시나요?"라고 한 기자가 물으니 "부정적인 생각을 오래 두지 않고, 그걸 곧 긍정적인 쪽으로 바꿔요. 육십, 시작이지요. 칠십은 정말 시작이지요. 팔십쯤 되면 세상을 좀 알게 됩니다. 백세요? 그건 그냥 샘샘이지요. 허허."라는 답이 돌아왔다고 한다.
요즘은 "내 나이가 어때서"라는 노래를 들으면 김병기 화백이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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