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길 끄는 스페이스 몸 미술관 기획전

욕망으로 점철된 기억…그것이 곧 삶

2008.09.15 19:37:37

욕망의 파사드(facad)라?

파사드란 사전적의미로 건축물의 주된 출입구가 있는 정면부로, 내부 공간구성을 표현하는 것과 내부와 관계없이 독자적인 구성을 취하는 것 등을 말한다. 역시 사전에 의하면 건물 전체의 인상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것으로, 그 구성과 의장은 매우 중요하다. 보통 장식적(粧飾的)으로 다루어질 때가 많으며, 건축양식의 역사에서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다.

이 파사드라는 단어 앞에 ‘욕망’이라는 단어가 붙어 있고 그 앞에 ‘얼굴’과 ‘기억’이라는 어휘가 달려 있다. 그럼 모든 어휘를 조합해 보면 ‘얼굴기억욕망파사드’다. 이들은 각기 다른 어휘의 나열인 것 같으면서도 하나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 하나 일 수밖에 없다. 얼굴은 자화상이고 자화상은 언제나 과거형이므로 기억 속에나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 기억은 욕망으로 점철돼 있으며 그것은, 얼굴이나 기억은 삶의, 혹은 존재의 파사드다. 그러므로 파사드 앞에 서는 것은 얼굴 앞에 서는 일이며 기억, 혹은 과거의 입구이며 모든 욕망의 출발점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스페이스몸(청주시 가경동)은 ‘얼굴 그리고 기억- 얼굴, 욕망의 파사드’ 전시기간 중에 지역아동센터 어린이들을 초대해 체험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자원봉사로 참여한 한국전통문화학교 전통미술공예학과 이예림 학생과 참가 어린이들이 기억과 꿈, 욕망이 형상화된 작품을 감상하고 자신의 꿈과 미래모습 그리기를 해보고 있다.

청주시 가경동 스페이스 몸 미술관에서 오는 27일까지 열리고 있는 ‘얼굴 그리고 기억- 얼굴, 욕망의 파사드’ 기획전(서경덕 기획)을 그렇게 보려한다.

우선 작가구성에서 있어 기획자의 노력이나 안목이 돋보인다. 대략 일년 전부터 기획과 작가구성을 하고 있는 기획자는 오고가다, 혹은 의도적으로 찾아간 전시장에서 기획내용과 잘 맞는 작가를 직접 선택하고 여러 차례 작업실을 방문하며 기획 내용을 다듬어 간다.

그 대상이 전국이라는 것, 역시 평상시 많이 보며 발품을 판다는 것에 예의를 갖추고 싶은 부분이다. 부산에서 오순환, 서울에서 이사라, 대전에서 홍상식, 충주에서 석창원, 청주에서 임성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옛 석인’이라는 이가 있다.

옛 석인, ‘동자석’(58x72cm, 조선)

여기서 조선시대의 ‘옛 석인’을 먼저 본다면, 이는 옛 사람들이 마을 어귀나 묘 입구에 세워 놓은 동자석과 문인석을 말한다. 이 ‘옛 석인’이 미술관 전시장에서 현대 미술가들이 얼굴을 테마로 작업한 작품들과 함께 얼굴과 기억, 욕망의 파사드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문인석이 순장풍속에서 시작된 것으로 주로 왕릉 앞에서 죽은 왕을 수호하고 영혼을 시중드는 역할을 하며 관복을 입은 채 정중하게 서 있는 형상이라면 동자석은 그 기능이나 형상이 좀더 다양하다. 무덤의 주인을 수호하고 외로운 영혼의 벗이 되는 역할에서 출발했지만 마을을 보호하며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주술적. 신적기능을 하거나 위치를 표하는 방위적인 기능도 담당했다. 이 동자석의 형상은 둥글고 갸름한 얼굴에 눈, 코, 입의 선은 분명하나 그 표정이 다양하다.

얼굴의 눈이나 입의 선을 통해 어떤 것은 서늘하게 여유 있어 보이고 어떤 것은 경쾌하고 역동적인 표정을 짓고 있으며 어떤 것은 그저 조용히 침묵하고 싶은 표정을 그려내고 있다. 앞으로 모아진 다소곳한 손에는 무엇을 들고 있으나 그 물건 역시 모두 다르다.

뒤에 머리를 딴 동자석이 있는가 하면, 그대로 묶어 늘어뜨린 동자석도 있고 머리가 짧은 동자석도 있다. 모두 비슷한 듯 하면서도 사람의 다른 손맛이 느껴지는 다른 동자석인 것이다. 행여 돌을 쪼으는 석공이 죽은 자의 얼굴을 떠올리면서 그 무덤의 주인이 좋아할만한 얼굴을 만들지 않았을까 싶다.

오순환 작 ‘얼굴’(160x100x40cm, 나무에 채색)

다음은 현대미술가들의 작품이다. 오순환의 ‘얼굴’(160x100x40cm, 나무에 채색)은 순박하고 부드러운 자기 자신의 모습이다. 얼굴형상을 나무조각해 그 위에 여러 차례의 채색으로 부드러운 밀도감이 느껴지도록 했다. 과장되게 긴 얼굴에 가는 눈매, 그 위에 눌러쓴 모자, 긴 코, 얇은 입술이 조화를 이룬다. 이 얼굴이 결코 강하거나 거칠지 않고 부드러울 수 있는 것은 따뜻한 색감이나 나무 표면 질감에서 우러나오는 손맛 때문이다.

캔버스에 담은 ‘훈장을 단 아버지’(194x130cm, 캔버스에 오일칼라)역시 평면작업이지만 비슷한 분위기다. 평면에 입체적으로 서 있는 아버지는 가슴에 아내와 두 자녀를 훈장으로 달고 있다. 작가의 얼굴 안에 들어 있는 가족이라는, 또 다른 자신의 얼굴인 셈이다.

홍상식 작 ‘34years- 옆을 보다’(40x20(h)x40cm, 빨대)

홍상식의 작품 ‘34years- 옆을 보다(40x20(h)x40cm, 빨대)' '33years- 침묵(37x20(h)x47cm, 빨대)은 얼굴의 한 부분, 즉 눈과 입을 클로즈업했다. 아이들이 우유를 먹을 때 사용하는 플라스틱 빨대가 주 재료다.

빨대를 잘라 길고 짧게 집중적으로 붙이는 것으로 어느 것은 눈이 되고 어느 것은 입술이 되었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그 클로즈업된 부분을 깊이 들여다보게 된다. 그 안에 표정이 있다. 입술이 갖고 있는 표정이 때로는 섹시하고 때로는 고혹적이고 때로는 그저 침묵이 느껴진다. 눈에도 표정이 있다. 어떤 때는 무엇에 대한 욕망과 호기심이 잔뜩 들어 있는 눈 같고 어떤 때는 멍한 동공에 불과한 눈이기도 하다. 그 감춰진 것 같은, 내밀한 그 안에 한얀 빨대의 색을 깊이 흡수하는 또 다른 강한 색채가 보여 전혀 다른 그림이 된다. 눈과 입술 속에 감춰진 그 색채는 검은색이 되기도 하고 빨강색이 되기도 한다.

문제는 지극히 얼굴의 부분적인 형상임에도 마치 그 부분을 통해 얼굴 전체를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이다. 작가는 이 부분적인 작업으로 얼굴을 얘기하고 기억을 말하고 욕망의 파사드를 설명하는 모양이다.

이사라 작 ‘lovely’(40x40cm, 캔버스에 오일칼라)

이사라가 너무나도 정교하고 세밀하게 그린 작품 ‘lovely(40x40cm, 캔버스에 오일칼라)’, ‘dream(60x33cm, 캔버스 위에 오일칼라)’은 어린시절 늘 함께했던 만화속의 주인공이 그림이 되어 전시장으로 들어온 것이다.

이 그림에는 유년시절의 기억이 있고 그 시절 꿈꾸었던 꿈이 있고 미래에 대한 욕망이 있다. 언뜻 만화책의 한 부분을 카피한 것 같지만 가까이 들여다보면 오랜 시간 수작업으로 반복한 선과 반복된 색칠의 흔적을 발견한다. 마치 그 많은 시간과 공을 화면 뒤쪽에 감추고 가장 화려하고 몽환적인 이미지 만을 드러내고 싶은 작가의 의도를, 숨은 그림 찾듯 발견해야 할 것 같은 그림이다. 찾아보자. 그 안에 숨어 있는 잊혀진 기억과 자신을 닮은 꿈들을.

임성수 작 ‘윙윙윙~ 맴맴맴~'

얼굴에 대한 젊은 작가의 기발한 착상은 임성수의 ‘CLOUD 9(116.8x91.0cm, 캔버스에 오일칼라)’ 연작에서 희화적으로 나타난다. 역시 익살스러운 만화속의 캐릭터로 화면 안의 주인공은 앞으로 불쑥 내민 입을 통해 무엇을 자꾸만 뿜어내려 한다. 그 무엇은 결국 같은 얼굴을 한 화면속의 주인공이다. 손가락으로 떠받치고 있는 그 주인공들은 자가 증식을 하며 자신만의 왕국을 이루어 가려는 것일까.

자신의 영역에 다른 누구의 침범을 허용하지 않는 것일까. 어쨌든 그 주인공들은 땅위에 서 있는 본래의 주인공이 있다면 그것으로 인해 파생된 구름이나 하늘 속에서 자유롭고 싶은 또 다른 주인공을 끊임없이 생산해 내고 있다. 보편적인 인간들의 내면인가?

석창원 작 ‘자화상’(29x25x54cm, 세라믹)

대부분 미술가들의 얼굴 작업은 작가 자신을 닮는 것이 보통이다. 석창원은 자신의 모습이 그토록 마음에 들지 않았던가? 어떤 때는 너무나 흉측해 다가가기가 부담스럽다. 대체 얼굴 안에 몇 개의 얼굴이 더 있는지 세는 것도 부담스럽고 그 중첩된 얼굴이 어찌나 괴기스럽던지. 그렇다고 안세고 넘어가자니 괜한 호기심이 일어 견딜 수가 없다.

이번 전시장에 걸린 작품 ‘자화상1(29x25x54cm, 세라믹)’, ‘자화상2(38x20x60cm, 세라믹)는 좀 부드러워진 것처럼 보인다. 작품은 머리끝부터 바닥까지 온 둘레를 다 돌아봐야 한다. 어디 한곳이라도 시선을 놓치면 그가 만든 얼굴에 대한 이미지 한 부분을 놓치고 마는 것이다. 그 얼굴 안에 이루 헤아릴 수 없는 형상과 형태와 내용과 상상력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치밀하고 꼼꼼하고 섬세한 그림 작업이 병행되는 그의 자화상은 현실과 비현실을 넘나들며 소설과 신화적인 이야기가 중첩되고, 깊은 원시림의 자연과 광활한 우주 공간이 공존하고, 나와 나, 혹은 둘이 뒤섞여 상생과 조화를 이룬다. 이들은 서로 독립적인 것 같으면서도 나무줄기로 엉켜 있듯 서로를 끊임없이 부여잡고 그 연결되는 과정을 잃어버리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봐야 한다. 괴팍스러운 작품이다. 노랑나비의 밝은 색채나 깊은 밀림 속 같은 내밀한 색채가 자신의 얼굴을 쪼듯 가는 바늘로 쪼아 염료를 먹인 것이라니 그 작업 과정 또한 작가의 자화상인가 보다.

누구에게나 잠재돼 있는 꿈과 기억, 자유와 욕망, 사랑과 이기는 삶의 입구에서 수문장처럼 지키고 서 있다. 스페이스 몸의 ‘얼굴 그리고 기억- 얼굴, 욕망의 파사드’는 결국 삶의 전체를 들여다 볼 수 있는, 상징할 수 있는 얼굴이 아닐까한다. 이기적인 욕망조차 삶이 존재하므로 아름다울 수밖에 없다는 내용의 이중성도 느껴보고 그것을 표현한 작가들의 다양한 형식을 볼 수 있는 전시다. 전화 043) 236-6622n.


김정애/ 문화담당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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