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 명장 유필무의 산중살이

청원 문의 마동 창작마을서 11일까지 오픈 스튜디오

2008.06.08 20:13:53

가도 가도 끝이 없을 것 같은 마을이다. 겹겹의 산이 에워싸고 있어 천상 사람이 살 것 같지 않은 길, 그 막다른 곳에 마동리라는 마을이 있다. 그곳에 오래전 학교가 있었고, 그곳에 사람들이 뿌리내려 세월을 살고 있다.

새마을 모자를 눌러쓴 동네 아저씨, 평생 노동일에 허리가 구부러진 할머니, 그 할머니 손잡고 따라 나선 개구쟁이 손자, 가족의 삶을 이고 진 마을 아낙네들, 하얗게 머리가 센 뒷짐 지고 걷는 할아버지와 그 뒤를 줄래줄래 따라 나온 강아지. 다들 어디를 가시나 했더니 이웃집에서 잔치가 열린단다.

그들의 이웃이란 청원군 문의면 마동리 폐교에 창작마을을 이루고 작업하는 작가들(이홍원-화가, 손영익-전업작가, 송일상-조각가, 유재홍-도예가, 유필무- 붓 명장)이 머물고 있는 곳이다.

- 청원군 문의면 마동 창작마을 필무산방에서 유필무씨.

여기서 마을 사람들과 도시의 지인들을 초대해 ‘오픈스튜디오’라는 이름으로 맛있는 저녁 한 끼를 대접한단다. 올갱이 된장국에 먹음직스러운 잡곡밥, 삶은 돼지고기와 막걸리가 차려져 있다.

도시에서 초대를 받고 온 이들은 그냥 밥만 먹고 돌아갈 리가 없다. 신명나는 북과 꽹과리로 흥을 돋우더니 판소리 이야기꾼의 소리 한 자락이 어스름한 저녁 산중 마을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가야금반주에 맞춰 여류 명창들의 빼어난 가락이 이어 받았고 멀리 대천에서 왔다는 한 스님의 아코디온 연주가 관객을 하나로 만들었다. 한쪽에서는 통기타를 든 가수가 흥겨운 가요를 열창해 박수를 받는가 하며 한 여인네의 즉흥적인 춤사위가 고즈넉한 창작마을을 매료시켜 버렸다.

도시에서 간 지인들이 마을 사람들 앞에서 맘껏 재롱을 부려준 것이고, 마을 사람들은 이들을 위해 국을 끓이고 고기를 썰어 마음을 나눠 주는, 오래간만에 사람들이 북적이는 그런 잔치였다.

필무산방 작업실 풍경. 그가 만든 촉필과 모필들이 가지런하게 줄지어 있다.

지난 5일 이곳에서 시간과 씨름하며 붓을 매고 있는 필무산방의 유필무씨(49)를 만났다.

아무리 여러 개의 백열등을 켜도 어둑어둑 하기만한 그의 공방. 주변에 빼곡한 작업도구와 만들어 놓은 붓들이 빛조차 막아버린 탓이다. 이곳에서 마을에 새벽 첫차가 들어 올 때까지 밤새 붓을 잡고 시름하는 그다. 사람의 손으로 만 오천 번을 두드려야 붓의 총이 만들어진다는 초필을 재현해 이목을 끌었던 그다. 그를 전통 붓 명장이라 한다.

동물의 털로 붓을 만들던 그가 왜 갑자기 그 고단한 과정을 거쳐야 하는 풀잎으로 붓을 만들고자 했을까?

그것은 글을 쓰는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기 시작하면서 부터다. 붓은 글을 쓰는 사람들을 위한 가장 중요한 도구다. 글을 남들과 다르게 쓰고 싶은 사람에게는 남들과 다른 자신만의 붓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고, 붓 명장이라면 그런 붓을 만들어 줘야 하는게 당연했다. 그러다 10여 년 전 우연히 민속품 전시회에 갔다가 사진으로 닳아 낡은 몽당 갈필(갈대풀로 만든 붓)을 보았다.

생각해보니 옛 사람들이라면 주변에서 구하기 쉬운 재료인 풀이나 나무 섬유질을 이용해 당연히 붓을 만들어 사용했을 터이다. 초필을 사용했다는 구전돼온 이야기는 들었지만 실제 사진으로나마 확인한 것이 계기가 되어, 마치 운명처럼 초필작업에 뛰어 들게 되었다. 수많은 시행착오와 여러 가지 난관에 부딪치기도 했다.

한 자루의 초필이 만들어지는데 걸리는 시간은 무려 3개월. 물 빠짐이 좋고 양지바른 곳에서, 가장 좋은 조건에서 자란 가장 좋은 재료를 채취하는 것이 관건이다. 이것을 찌고 음지에서 건조하기를 여러 차례 한 다음에는 만 오천 번 이상을 두드리며 가늘게 쪼개고 가장 부드럽고 섬세한 상태로 만들어 주어야 한다.

이러한 작업과정은 그 어떤 것보다 집중해야 하며 멈추지 않고 해야 한다. 촉 알을 묶고 필관을 맞추고 접착하고 풀을 먹이고 나면 그제서야 한 자루의 붓이 완성되는 것이다. 이러한 작업과정에서 밤을 새는 일은 보통 있는 일이다.

“섬세하기로 말하면 초필이 동물의 털보다 더 섬세할 수가 있다. 볏짚, 띠풀, 갈풀, 칡 등 재료의 다양성으로 개성 있는 붓을 만들 수가 있어 창의적인 작업을 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역할을 할 수 있을 것 같아 시작한 일이다. 한 자루의 붓을 완성하는 일은 내 자신과 한판 겨루는 일이기도 하다. 그만큼 시간과 공력이 필요한 작업이다.”

필무산방 작업실 풍경. 그가 만든 촉필과 모필들이 가지런하게 줄지어 있다.

이렇게 만들어진 붓이 벽에 부딪치는 것은 고객들을 만나면서 부터다. 싸요, 비싸요하는 문제다. 넘쳐나는 중국산 붓의 가격과는 경쟁할 수 없는 노릇이다. 시중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붓으로는 살아남기 힘들어진 것이다. 그가 극복해야할 일이다. 붓대를 캔버스로 삼아 반양심경을 새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붓 촉을 더 많이 두드리고 매만져 글을 쓰는 고수들이 알아봐 주는 것, 세상에 단 하나 뿐인 붓을 만들고자 하는 것이 그가 찾은 해결방법이다.

붓의 생명인 촉 만들기에 온 힘을 다해 혼을 불어 넣는다면 붓대의 장식성에는 현실적인 욕심을 채워 넣는 일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생존해야 하기 때문이다.

충주 앙성이 고향인 그가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상경, 서울 공장지대를 전전하며 밥을 먹기 위해 일을 하던 시절이 있었기에, 그 끝에 찾은 붓 만들기였고, 그 붓에서 희망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 희망은 어김없이 옛 붓의 재현과 새로운 붓의 실험이라는 열정을 가져다주기도 했지만 중국산 붓의 범람이라는, 다시 맞은 현실적인 난관들은 그를 한길 나락으로 밀어뜨렸다. 그럼에도 붓 매는 일을 버릴 수도 없었고 더욱이 가족들의 배를 곯게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문의문화재 단지와 진천 등지에서 공방을 운영하기도 했지만 여러 가지 일들이 여의치 않아 이곳, 땅끝 마을 같은 깊은 마동에서 새롭게 시작한지 3년이 돼 간다. 낡은 학교 건물 한쪽에 작업실을 두고 자신과 씨름을 하고 있지만, 손발에 땀이 나지 않아 붓을 맬 수 없게 될 때, 눈이 침침해 붓 대에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될 때를 염려할 나이가 되어 버렸다.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함이기도 하다.

그럴 때는 16세 되던 해 남들 같으면 교복입고 교실에서 공부하고 있을 나이에 우리 붓의 귀한 쓰임을 일찌감치 알고 붓 만들기에 정진하던 그 시절, 초심으로 돌아가고자 온 힘을 다해 공력을 불러들이기도 한다.

“정성을 다해 귀한 붓을 만들어 세상에 내 놓으면 귀한 사람들이 알아줄 것이라 믿는다. 초필이나 목필을 재현하는 일은 옛 사람들의 작업을 되짚는 일이다. 붓 만드는 일의 특성이 새로운 것을 창작하는 일이라기보다는, 글 쓰는 도구로서 사용하는 사람들이 귀하게 여기는 물건이면 족한 것이고 옛 사람들이 만든 방법을 토대로 나만의 붓을 만들어내면 되는 일이다.”

오픈스튜디오 잔치에 참여한 주민들과 축하무대를 마련한 지인들.

유필무의 붓을 사기 위해 물어물어 그 먼 길을 찾아오는 이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이 평생 소중하게 간직하고 싶은 붓을 만드는 게 그의 바람이다. 더불어서 그것이 가족들과 나눌 수 있는 양식이 된다면 더 바랄게 없는 일이다.

오는 11월에는 청주시 한국 공예관에서 초대전을 마련해 주어 첫 개인전을 갖는다. 쓰임의 장인정신과 유일한 것을 만들고자 하는 예인의 정신으로 만들어진 천 자루의 붓이 장관을 이룰 것으로 기대된다. 마동 창작마을 오픈스튜디오 행사(043-221-0793)는 오는 11일 까지다.


/ 김정애 (소설가·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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