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Christmas)는 라틴어 '그리스도(Christus)'와 '모임(massa)'의 합성어로서 '그리스도 모임' 즉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는 모임'으로 종교적인 예식을 의미한다. 동방 정교회나 개신교에서는 '그리스도의 예배'로 로마 가톨릭교회에서는 '그리스도의 미사'로 번역한다. '그리스도(Christ)'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의미이다. 고대시대에 왕이나 제사장을 기름 부어 세운 전례에서 유래한 이름이며, 그리스도(Christ)는 곧 예수(Jesus)를 의미한다. 따라서 그리스도교, 예수교 및 기독교(基督敎)는 같은 뜻이다. 기독(基督)이라는 용어는 '터 기(基)'와 '살펴볼 독(督)'을 합성한 단어인데, 이는 '터를 살펴본다'는 의미가 아니라, 한자의 뜻과는 관계없이 그리스도(Christ)의 발음과 비슷한 한자를 임의적으로 차용한 음역(音譯)이다. 'Χ-mas'는 로마 문자의 '엑스(X)'가 아닌 '그리스도'(크리스토스)의 그리스어 첫 글자인 그리스 문자 '키(Χ)'에 '마스(mas)'를 붙여서 쓴 것이다. 일부에서는 관용적으로 '엑스마스'라고 읽기도 하나 이는 틀리는 표현이고, 원칙적으로 '크리스마스'로 읽는 것이 맞다. 언젠가 C대에서 필자의 강의를 듣는 한 제자에게 크리스마스에 교회에 오라고 권면한 적이 있었다. 돌아온 답은 "크리스마스인데 여자 친구와 함께 있어야죠!"였다. 크리스마스가 '예수(그리스도)에게 예배드리는 의미'라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매우 당당한 어투였다. 예년에는 12월 이전부터 거리마다 가게마다 크리스마스 '트리'를 장식하고 '캐롤'이 울려 퍼지며 연말 분위기를 띄우는 일이 많았다. 젊은 연인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며 기독교인이든 아니든 간에 서로 선물을 주고 받기도 한다. 어린아이들은 산타 할아버지의 선물을 기대하면서 나쁜 아이가 되지 않기 위해 가슴을 졸이기도 한다. 그런데 최근 이런 모습은 사라져버렸다. 경제적인 상황이 좋지 않은데다가 스산한 거리풍경이 더해져 왠지 썰렁한 느낌이다. 거리가 썰렁해진 원인은 저작권 때문이라는 시각이 있다. 정부는 지난 8월 저작권법 시행령을 개정했다. 창작자 권익 강화를 위해 음악 공연권 행사 범위를 확대한 것. 그간 유흥주점, 대형마트, 백화점 등에서만 인정하던 저작권을 커피전문점 등 비 알코올 음료점, 생맥주 전문점, 헬스장 등으로 범위를 넓혔다. 개정안에 따르면 주점 및 음료점업(커피 전문점, 생맥주 전문점 등)은 매장 면적에 따라 월 2천 원~1만 원, 체련 단련장은 월 5천700원~2만9천800원 등이다. 다만 면적 50㎡(약 15평) 미만의 소규모 매장은 면제된다. 저작권법 시행령이 개정되면서 캐럴은 점차 모습을 감추게 됐다. 자영업자들이 저작권료에 대한 부담을 느낀 탓이다. 여기에 한 백화점이 지난 2010년부터 2년간 디지털 음원을 전송받아 스트리밍 방식으로 매장에 틀었다가 '한국음반산업협회'에 2억3천500만 원을 배상한 사실이 알려지며 캐럴 트는 것을 꺼리는 분위기가 더욱 확산됐다. 그러나 규모 50㎡(약 15평) 미만의 소형 커피숍과 매장, 길거리 노점에선 캐럴을 틀어도 문제가 없다. 전통시장은 면적과 관계없이 저작권료 징수 대상이 아니다. 또한, 원저작자를 찾을 수 없는 캐럴은 저작권료 징수 제외 대상이다. 또 비영리기관인 교회에서도 자유롭게 캐럴을 틀 수 있다. 기독교인 여부를 떠나 모두가 평화를 즐기며 폭력이 사라지는 성탄(Xmas)과 세모(歲暮)가 되기를 소망해 본다. (눅 19:38) 이르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12월은 소득세의 연말정산 시즌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세금을 환급받기도 하고, 때로는 추가 납부하기도 한다. 그런데 '13월의 보너스'라는 말은 맞지 않는 표현이다. 왜냐하면, 소득에 따라 내야할 세금총액 중에서 미리 낸 세금(원천징수액)을 차감하고 결정세액에 미치지 못하면 추가납부(+세금), 부족하면 환급(-세금)을 받기 때문이다. 납세자 입장에서는 이자를 고려하면 중간예납금을 적게 내고 연말정산 때, 추가로 납부하는 것이 유리하다. 그러나 세무당국으로서는 뜻하지 않게 '세금 폭탄'이라는 원성을 듣게 되고, 정권에 부담을 줘 위기가 된다. 그럴 바에야 원천징수액을 미리 많이 부과하고 연말정산 때에 돌려주는 것이 납세자들에게 '공돈이 생겼다'는 좋은 인상을 주게 된다. 이를 모르는 납세자들은 '13월의 보너스'를 받았다고 좋아하지만, 사실은 좋아할 일이 아니라 억울해 해야 맞다. 과다 징수한 세금을 돌려받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세금의 종류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세금징수 주체에 따라 국세와 지방세, 담세자와 납세자의 일치 여부에 따라 직접세와 간접세, 과세금액에 따른 세율에 따라 비례세, 누진세 및 역진세로 구분된다. 조세저항의 측면에서 직접세 중에서 근로소득세, 간접세 중에서 부가가치세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세금은 세금을 납부하는 사람(납세자)과 실제로 부담하는 사람(담세자)이 같은지에 따라 직접세와 간접세로 분류한다. 노동활동을 통해 소득을 얻은 사람이 내는 소득세나 사업 활동을 통해 소득을 올린 법인이 내는 법인세, 재산을 상속이나 증여받은 사람이 내는 상속·증여세 등은 직접세(直接稅)이다. 반면, 우리가 사는 물건에 포함돼 있는 부가가치세나 특별소비세 등과 같은 세금은 물건을 판 기업이 세금을 내지만 세금을 부담하고 있는 사람은 물건을 구입한 사람으로, 납세자(기업)와 담세자(개인 소비자)가 일치하지 않는 간접세(間接稅)이다. 소득세는 본인이 얻은 수입에서 직접 납부하므로 '세금을 부담한다'는 의식이 강하다. 그러나 부가가치세는 세금을 납부하는지에 대한 의식이 없다. 예를 들면 아기 분유를 사거나 외식을 하는 등 의식주에 관한 구입비용을 지불하면서 세금납부를 의식하는 소비자는 많지 않다. 문제는 조세행정에 따라서 간접세가 소득의 불평등도가 심화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점이다. 간접세는 부자나 빈자나 동일 금액에 대해서는 같은 세금을 부담한다. 이는 소위 경제적 양극화를 부채질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제정의(經濟正義)'라는 측면에서 보면, 같은 가격대의 제품이라도 소득이 많은 이에게는 비싼 가격으로 판매하고 소득이 적은 이에게는 싼 가격으로 판매해야 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를 실천하기는 불가능하다. 우선 개인 소득에 관한 객관적인 자료를 갖출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소득불평등도(경제적 양극화)를 해소하기 위해 남은 방법은 한 가지뿐이다. 즉, 직접세율은 올리고 간접세율을 낮추는 것이다. 선진국들은 직접세의 세율은 높이고 간접세율은 낮춰 부과해 경제적 양극화를 완화시킨다. 반면 우리나라의 정권은 선진국과는 역방향으로 직접세는 낮추고 간접세는 높이는 조세정책을 펴왔다. 왜냐하면, 서민층의 조세저항을 줄이고 부유층과 유착해 정치헌금과 같은 실리를 챙기는 것이 유리하기 때문이다. 간접세는 구매금액의 과소에 관계없이 일정한 세율을 적용하는 '비례세(比例稅)'이고, 직접세는 소득이 많아질수록 세율이 높아지는 '누진세(累進稅)'이다. 예를 들면, 과세표준금액이 4천600만 원 이하인 근로자는 15%의 세율을 적용해 108만 원의 세금을 납부하는 한편, 5억 원을 초과하는 근로자는 40%의 세율을 적용해 2천940만 원의 세금을 납부한다. 만약 소득세가 비례세라면 5억 원을 초과하는 근로자는 15%의 세율을 적용해 1천102만 원만 납부하면 된다. 결과적으로 1천838만 원을 더 납부하게 되는 것이다. 간접세보다 직접세 부담률을 높여야 하는 이유는 조세정책을 통한 경제정의를 이루기 위함이다.
견원지간(犬猿之間)이라는 말이 있다. 직역하면 개와 원숭이의 사이란 뜻인데, 개와 원숭이처럼 사이가 나쁜 관계를 일컬을 때 쓰는 말이다. 인간사회의 현실에서도 이러한 관계를 심심찮게 볼 수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일부 선후배 또는 상사와 부하 사이 등등이다. 비판과 견제 역할을 해야 하는 정계에서 여당과 야당의 관계나 행정기관과 시민단체의 관계 등에서도 이런 현상을 목격하기란 그다지 어렵지 않다. 그리고 종교적인 논란으로는 진화론의 지지자(생물학자)들과 창조과학회원(신학자)들 사이에서도 흔히 목격되는 현상이기도 하다. 흔히 한국과 일본의 관계를 '가깝고도 먼 나라'로 지칭한다. 지정학적으로는 가장 가까운 곳에 인접해 있지만, 역사적으로 상호간의 혐오가 쌓여 가까이 하기 어려운 존재라는 의미일 것이다. 현대사만 놓고 보더라도 일본이 미국과 맺은 일본 총리 가츠라 타로 (桂 太郞), 미국 육군 장관 윌리엄 태프트 (William H. Taft)의 합의각서 (Agreed Memorandum)에 의해 대한제국과 필리핀의 상호지배를 묵인함으로서 한일 관계는 돌이키기 어려운 사이로 틀어지고, 현재까지도 과거사로 인해 가까운 나라로 발전하지 못하고 있다. 현재 전쟁기에 동원된 한국인, 조선인 피해자들에 대한 사과와 보상 문제와 그 해결책에 관한 문제로 한국과 일본은 역시 '견원지간'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정치적인 명분이나 정통성을 갖지 못하고 쿠데타로 집권한 5·16 군부 세력은 지긋지긋한 가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64년 김종필(한국 중앙정보부장)과 오히라 마사요시(일본 외무상)이 만나 이른바 "김·오히라 메모"로 배상문제를 졸속 처리해버리고 만다. 정치적,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이 만나 빚어낸 가슴 아픈 결과였다. 이는 결국 1965년 6월 22일 대통령(박정희)과 수상(이케다)의 결단으로 '한일기본조약(韓日基本條約)'이 조인됐다. 1905년 을사늑약(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한지 60년 만에 다시 한일협정이 이뤄지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113년이 지난 현재에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한일 양국에서 피해자들의 소송이 줄을 잇고 있으나 일본 정부나 법원은 인정하지 않고 있다. 한국 정부(박근혜)의 외교장관 윤병세는 일본 정부(아베 신조)의 기시다 후미오 외무장관과 만나 2015년 12월 28일 '한일위안부 합의'를 졸속으로 처리해 많은 국민들과 피해자들의 공분을 사기에 이르렀으며, 현 정부 들어서도 그 처리에 골머리를 썩이고 있다. 한국으로서는 일본이 독일처럼 진심으로 사과하고 보상 및 배상을 해 준다면 말할 나위 없이 좋은 시나리오일 것이다. 그렇지만 일본의 국내사정으로 가능하지 않다. 일본의 민주당 등 일부 정치인과 양식 있는 소수의 일본인들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 국민들의 표를 얻어야 하는 것이 일본의 우익세력이고 그들 입장에서는 사과와 배상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요구인 것이다. 대한제국 말기에도 그러했듯, 일본은 막강한 화력(경제력)을 바탕으로 세계열강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섬의 모습이 마치 군함과 비슷하게 생겼기 때문에 '군칸지마(軍艦島, 군함도)'로 불리고 있는 일본 '나가사키'현 '나가사키'시에 있는 무인도 '하시마(端島)'섬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한 것이 그 단적인 예이다. 제국의 식민 국민, 제국의 노동자들의 한(恨)과 고통이 서려있는 장소인데도 말이다. 일본이 지금이라도 자신들의 과오를 인정하고 진심어린 사과와 배상할 때 한일관계는 '가깝고도 먼 나라'에서 '가깝고도 가까운 나라'가 될 것이다. 전범국 일본은 극악무도한 성범죄와 약탈죄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성경은 '이웃을 사랑하라'고 가르친다. (롬 13:9)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추석(秋夕)을 한자어 의미 그대로 풀이하면 '가을 저녁'이라는 의미로, 깊게 해석하면 '가을의 달빛이 가장 좋은 밤'이라는 뜻이다. 우리 선조들은 밤을 밝혀주는 달에게 감사한 마음을 지녔는데, 특히 일 년 중 가장 크고 환한 보름달이 뜨는 음력 8월 15일이면 달 아래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강강수월래' 등 놀이를 즐기며 한바탕 잔치를 벌였다. 추석은 삼국사기의 기록으로 보아 신라 초기가 기원임을 짐작할 수 있다. 추수감사절(秋收感謝節, Thanksgiving Day)은 1620년 종교적 자유를 찾아 영국에서 신대륙으로 이주한 청교도들이 이듬해 정착지에서 첫 추수를 마친 것을 기념해 감사기도를 올리고, 원주민들을 초대해 옥수수와 칠면조 등의 음식을 먹으며 축제를 연 데에서 비롯됐다. 이후 1789년에 미국의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이 추수감사절(11월 넷째 주 목요일)을 국가기념일로 선포해 현재까지 미국의 대표적인 명절로 자리 잡았다. 캐나다에서는 10월 둘째 월요일에 기념한다. 대한민국에서는 11월 셋째 일요일에 기념한다. 금년에는 11월 18일이 추수감사절기이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민족적 경험과 감사의 축제 전통에 따라서 가지고 있는 3대 명절은 모두 감사절이었다. '유월절(Passover)'은 민족 해방에 대한 감사절로 기념했고, 봄의 '초실절(맥추감사절)'은 첫 열매의 수확에 대한 감사절이었다. 가을에는 추수해 곡식을 저장하고 나뭇가지로 집을 지으며 그 안에서 7일 동안 지내는 '수장절', 즉 '초막절'을 지켰다. 성경에서 말하는 가을에 하나님께 드리는 '초막절(草幕節)'은 한자어로, 말로 풀이하면 '풀로 장막(집)을 지으며 기념하는 절기'이다. '초막절'의 다른 명칭은 '수장절', '추수감사절' 등이 있는데 '수장절(收藏節')은 곡식을 거둬 저장한다는 의미이고, '추수감사절'은 가을에 곡식 추수함을 기념한다는 의미이다. 이름만 다를 뿐 의미하는 바는 같다. 그렇다면 '감사(感謝)'는 기독교도들만의 축제일일까?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농경문화가 중심이었고 자연스레 자연환경과의 공생을 모색해왔다. 조상의 은덕(恩德)을 기리며 '식물(植物)'들에 의해 제공되는 '식물(食物, 먹거리)'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살았다. 또한 가을걷이를 할 때는 농악을 비롯한 춤과 노래로 풍요로운 가을을 선사하는 자연에 대해 감사했다. 바로 중추절 명절 한가위(추석)이다. 사실 식물(植物)은 우리 인간들에게 많은 것을 선물해 준다. 자신은 가장 더럽고 냄새나는 물질(거름, 퇴비 등)을 받아들이고, 시원한 그늘과 산소를 공급해주며, 풍요로운 '먹거리'를 제공해준다. 인간이 플라스틱이나 쇳조각을 먹고 살아갈 수 있다면 모르거니와 식물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동물이 죽고, 결국 인간도 멸망하게 된다. 굳이 '농자천하지대본야(農者天下之大本也)'라는 말을 꺼내지 않아도 우리는 땅에 기대어 살 수 밖에 없고 죽어서도 땅의 일부분으로 흡수된다. 그러니 자연에 감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요즘 한국에서는 11월 셋째 주일에 지키던 추수감사절을 교회에 따라서는 다른 시기를 택해서 지키고 있다. 품종개량 등으로 조생종이 등장해 수확기가 빨라졌다. 따라서 추수감사절을 1~2주 앞당겨 지내기도 하고, 아예 '중추절(仲秋節)'인 추석을 추수감사절로 지키는 교회들도 있다. 아무렴 어떠랴. 완고하게 시시비비(是是非非)를 따질 일이 아니다. 성경은 창조주를 비롯한 모든 자연환경에 대해 감사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창세기 27:28) 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를 네게 주시기를 원하노라 (출애굽기 23:16) 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해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 수장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해 이룬 것을 연말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함이니라
'2080 법칙'이라는 별칭으로 부르는 '파레토 법칙'은 19세기 이탈리아 경제학자 빌프레도 파레토(Vilfredo Pareto, 1848~1923)가 발견했다. 영국과 유럽 여러 나라의 소득 통계를 조사하던 파레토는 당시 영국 인구의 약 20%가 영국 전체 부의 약 80%를 차지하고 있다는 걸 발견했다. 그 외에도 여러 나라에서 비슷한 경향이 확인됐다. 일본 곤충학자 '하세가와 에이스케'는 곤충 세계에서 이와 비슷한 현상을 찾아냈다. '에이스케'가 개미를 관찰한 결과 개미의 종류와 무관하게 일개미 중 70% 정도는 생산적인 일을 하지 않고 자기 몸을 핥거나 하릴없이 돌아다녔다고 한다. 꿀벌도 일벌 중 20% 정도만 열심히 꿀을 모으러 다녔으며, 열심히 일하는 20%의 꿀벌을 따로 떼어놓으니 신기하게도 이 무리 중 20%만 열심히 일을 하고 나머지 80%는 열심히 일을 하지 않았다. 이후 파레토 원칙은 사회 곳곳에서 다양하게 관찰됐다. '가장 잘 팔리는 제품 20%가 매장 매출의 80%를 차지한다. 가장 부유한 시민 20%가 국부의 80%를 차지한다. 상위 20%의 작곡가의 곡이 전체 재생 횟수의 80%를 기록한다. 상위 20%의 남녀가 연애경험의 80%를 보고한다. 상위 20%의 축구선수가 80%의 골을 넣는다. 올림픽에서 상위 20%의 국가가 메달의 80%를 가져간다. 온라인, 모바일 게임에서 상위 결제 유저 20%가 게임 수익 80%에 영향을 준다. 전체 범죄자의 20%가 전체 범죄의 80%를 일으켰다.' 등이다. 하지만 최근에는 시장 경쟁이 치열해지고 온라인 판매가 늘어나면서 '평범한 80%'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다. IT 산업의 세계적인 권위자인 크리스 앤더슨은 '롱 테일 이론(The theory of the Long Tail)'을 통해 이를 잘 보여줬다. 인터넷이 발달하고 온라인 쇼핑이 대세를 이루면서 소비자는 자신이 원하는 상품을 검색해 직접 구매한다. 즉, 파레토 법칙과 반대로 80%의 사소한 다수가 20%의 핵심소수보다 뛰어난 가치를 창출하는 역(逆)파레토 법칙이 나타나는 것이다. 롱 테일(Long Tail) 현상은 장기적으로 꾸준히 증가하는 매출을 그래프(긴 꼬리 모양)로 나타낸 것인데, 바로 '평범한 80%'들이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서적, 음반, DVD, 전자제품 등 소프트웨어 상품 시장에서 구매할 때 나타난다. 실제로 아마존 같은 유명 온라인 서점은 전통 서점에서는 많이 팔리지 않던 책이나 일부 계층만 좋아하는 음반이 롱 테일 현상을 통해 많은 이윤을 올려주고 있다. 이에 여러 기업이 롱 테일 현상을 바탕으로 상품 구성을 다양하게 갖춰 소비자의 선택 폭을 넓히고 있다. 하지만 주의할 점은 파레토 원칙과 롱테일 법칙 모두 일반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두 법칙 모두 일부 현상을 관찰하고 이를 바탕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업들도 여러 가지 측면을 고려해 두 법칙을 활용하고 있다. 나아가 '2080 법칙'이 80%의 평범한 다수를 무능력하고 쓸모없는 존재로 치부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하는 의문이 남는다. 또한, 진정으로 20%의 뛰어난 소수가 사회를 견인한다면 나머지 80%의 평범한 다수는 일하지 않고도 삶을 영위할 수 있으니 이상적인 유토피아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무임승차(free-rider)의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에 그야말로 상상 속의 이상향(理想鄕)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롱 테일 법칙(역 파레토 법칙) 역시 모든 상품의 매출이나 전체 사회현상에 일괄 적용하는 데에는 무리가 있다. 왜냐하면, 인터넷으로 구매할 수 없거나 인간관계를 맺는 경우에는 적용하기 어려운 난점이 있다. 그리고 인류사회는 100% 평등한 사회가 이뤄질 수 없음을 역사가 가르쳐 주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사회적 약자'를 돌보라고 가르친다. 인간사회에서 나타나는 현상을 모두 경제성의 법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이유다. (신 24:19) 네가 밭에서 곡식을 벨 때에 그 한 뭇을 밭에 잊어버렸거든 다시 가서 가져오지 말고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위해 남겨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시리라
도산 안창호는 1895년 미국 북장로회 계통 선교사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가 설립하고 밀러 목사가 경영한 구세학당(救世學堂, 경신학교)에 입학해 처음 신학문을 접했고, 여기서 그는 지리, 세계사, 과학 등 학문을 배우며 새로운 세계를 접했다. 1895년은 도산 안창호가 기독교인이 돼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한 해가 된다. 즉, 구세학당 재학 중 송순명의 전도로 장로교에 입교했다. 안창호의 나이 17세 때의 일이다. 장로교로 개종하면서 자신에게 개화사상을 준 필대은에게도 기독교를 소개했다. 1898년(광무 1년) 만민공동회와 독립협회가 황국협회의 무고와 습격으로 해산되자, 안창호는 은신해 있다가 고향으로 돌아가 교육과 기독교 전도운동에 뛰어들었다. 1899년 강서군 동진면 암화리에 점진학교와 '탄포리'교회를 설립했다. 1904년 샌프란시스코에서 리버사이드로 이주, 기독교계가 경영하는 신학강습소에서 영어와 신학을 가르쳤다. 1913년 5월 13일에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민족운동단체인 흥사단을 설립했다. 기본정신은 '무실, 역행, 충의, 용감'이었으며 단체의 상징은 기러기였다. 도산 안창호의 생애와 사상의 뿌리는 기독교 정신이다. 그의 어록을 중심으로 성경말씀의 표절(?)로 보이는 명언을 지면의 제약 때문에 몇 마디만 살펴보고자 한다. "무실(務實), 역행(力行), 충의(忠義), 용감(勇敢)" [잠언 11:3 정직한 자의 성실은 자기를 인도하거니와 사악한 자의 패역은 자기를 망하게 하느니라, 신명기 5:13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에베소서 5:9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다니엘서 11:32 그가 또 언약을 배반하고 악행하는 자를 속임수로 타락시킬 것이나 오직 자기의 하나님을 아는 백성은 강하여 용맹을 떨치리라] "애기애타(愛己愛他)" [마가복음 12:31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낙망은 청년의 죽음이요. 청년이 죽으면 민족이 죽는다." [갈라디아서 6:9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서로 사랑하면 살 것이요. 서로 싸우면 죽을 것이다." [요한복음 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허황된 마음은 패망의 근본이요, 착실한 마음은 성공의 기초이다." [잠언 16:18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곤란이 있더라도 인내하라." [로마서 5: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마음을 화평하게 만드는 공부가 가장 큰 공부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가장 큰 행복이기 때문에." [마태복음 5:9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농담으로라도 거짓말을 하지 말라. 꿈속에서라도 성실을 잃었거든 뼈저리게 뉘우쳐라." [신명기 5:20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 도산 안창호가 1913년에 조직한 흥사단(興士團) 활동을 지속해온 이들 가운데는 교조주의적 신념을 가지고 안창호의 사상을 신봉하는 이들이 많고, 그 중에는 평생을 흥사단운동에 바친 이들도 적지 않다. 그러나 정말로 도산사상을 신봉한다면, 안창호의 사상을 정확히 이해하고자 한다면 기독교사상에 대해 알아야 한다. 그러나 흥사단 활동에는 열을 올리면서도 유감스럽게도 기독교 사상은 외면하는 흥사단우가 많다. 오히려 기독교를 배척하는 흥사단우가 대부분이다. 기독교를 배척하고는 도산 안창호를 이해할 수 없음은 물론, 자가당착(自家撞着)에 빠지는 우(遇)를 범하는 결과로 귀착됨에도 말이다. 참으로 아쉬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품앗이'란 마을 공동체에서 힘든 일을 서로 거들어 주면서 서로 간에 품을 지고 갚고 하는 일을 뜻한다. 특히 가을의 수확은 비교적 짧은 시간 안에 마쳐야 하는데 한국에서는 예로부터 대부분 품앗이를 통해 추수를 했다. 일종의 시너지 효과를 통해 '가을걷이'를 효율적으로 마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우리나라는 사계절이 뚜렷해 씨앗을 심기에 알맞은 때와 거두기에 알맞은 때가 따로 있다. 이때를 놓치면 한해의 농사를 그르치고, 1년 내내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릴 수밖에 없기 때문에 품앗이를 통해 서로의 농사일을 도와야 했다. 수확 외에도 가래질하기, 모내기, 물대기, 등의 품앗이도 자연적으로 발생됐다. 비슷한 공동체에는 '두레', '계' 등이 있다. 먼저, '두레'는 집집마다 한 사람씩 나와 '일꾼 모임'을 만들어 마을 전체의 농사일을 한꺼번에 해결하는 것이다. 두레는 농사를 지을 때뿐 아니라 마을 잔치나 마을 사람 중 누군가의 집안에 큰일이 있을 때에도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며 기꺼이 일손을 도왔다. 또한, 경제적으로 서로 돕기 위해 만든 조직을 '계'라고 한다. 농사짓는 백성들은 대부분 가난했는데 아들딸이 결혼식을 할 때, 집안의 누군가가 세상을 떠나 장례를 치러야 할 때, 또는 집을 새로 지을 때에는 큰돈이 필요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 중 마음에 맞는 이들끼리 돈이나 곡식을 모아 그때그때 필요한 사람에게 주어 쓰도록 한 모임이 '계'이다. 품앗이 등은 서로 도움을 도움으로 갚아야 한다는 '증답의례적 호혜의식(贈答儀禮的互惠意識)'이 제도화된 협동체계라 하겠다. 이러한 각종 조직들을 활성화하기 위해 방편으로 농악대, 들돌 들기, 씨름 등 부수적인 활동이 수반되어 품앗이나 두레가 없어진 현대에 들어서도 일부는 민속전통이나 민속경기의 형태로 남아있기도 하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 또한 기계화와 더불어 임금노동관계의 변화로 인하여 대부분 쇠퇴하고 임금노동으로 전환되고 있는 추세이다. 다만, 인륜대사(人倫大事)로 일컬어지는 관혼상제(冠婚喪祭) 때 서로 돕는 미풍에서 그 잔재를 찾을 수 있다. 요즈음은 '하객 품앗이'라는 것이 있는데, 결혼 당사자의 한쪽이 지리적인 거리로 인하여 하객이 부족할 때, 전에는 업체에 돈을 지불하고 '일일 하객 알바'를 구하던 예전과 달리, 결혼식 몇 개월 전부터 만나 친목을 쌓으면서 보다 '자연스러운' 하객이 되는 등 결혼식에 새로운 풍속도가 등장한 것이다. 가장 큰 이유는 예식장 측의 최소보증지불제 때문이다. 어차피 남는 음식 서로 품앗이를 통하여 버리는 음식을 없애고 하객을 확보하는 것이다. 시대가 달라진 요즈음, 혼례와 장례 분야에서는 아직도 전통적인 품앗이가 작동하고 있다. 그런데 그것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있다. 갑자기 경제적인 어려움이 닥쳐온다던지, 질병으로 거동이 어려운 경우, 경조사비는 매우 큰 부담이 된다. 그러나 문제가 되는 것은 혼주가 사망하거나 당사자가 사망했을 경우이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일부는 품앗이를 외면한다. "정승 집의 개가 죽으면 문전성시를 이루지만 정작 정승이 죽고 나면 적막강산을 방불케 한다." 말이 있다. 세태의 무정함을 풍자한 말이다. 이런 경우 대개는 인간의 양심에 기대해보지만, 가장 좋은 방법은 예식문화의 변화를 모색하는 것이 가장 좋다. 말하자면, 일부 선진국에서 이루어지는 회원제도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다. 결혼식은 가족들끼리만 모여서 조촐하게 치루고, 어느 정도 시간이 경과한 다음 피로연을 갖되, 가장 가까운 지인 50~100명만을 초청하여 회비제로 운영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시간대도 평일 저녁으로 하면, 상대방의 주말휴식을 방해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까지의 경조사비를 되돌려 받아야한다는 의식에서 벗어나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할 것이다.
인류사회가 삼권분립을 기반으로 한 통치권력인 국가(國家)와 경제시스템인 시장(市場), 그리고 시민사회(市民社會)로 구성된다고 보면, 시민단체의 역할은 국가 권력의 통제와 감시, 그리고 자유주의 시장경제의 발전을 저해하는 모든 경제행위 주체들의 활동에 대한 감시와 견제를 통해 공공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시민단체의 역할일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 시민단체의 활동에 대한 몇 가지 문제점을 짚어보고자 한다. 첫째, 대표성과 회원구성에 관한 문제이다. 시민단체의 현주소를 보면 오랜 기간의 활동을 통하여 조직화되고 개인의 영향력이 거의 없는 흥사단, YMCA, YWCA 등과 같은 단체도 있지만, 상당수는 소수의 열성적인 회원과 해당분야 몇 명의 전문가가 중심이 되어 활동한다. 이는 시민들의 뜻을 모아서 활동한다기보다는 대표와 몇몇 사람의 의중이 반영된 활동에 치우치게 되고 결과적으로 시민들의 참여가 없는 시민운동이 된다. 그리고 한 사람이 여러 개의 시민단체에 가입해서 활동하는 경우가 많다. 언론 보도를 보면 모든 시민 단체를 망라하여 같은 얼굴이 비쳐지는 일이 부지기수다. 한 사람이 모든 분야에 전문가일 수 없다. 결국, 전문성 없는 활동을 위한 활동, 즉, 부실한 백화점[문어발]식 시민운동으로 귀결된다. 그 나물에 그 밥이라는 비아냥거림이 나오는 이유다. 둘째, 활동기금에 관한 문제다. 가장 이상적인 방법은 회원들의 회비로 운영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일부 직능별 이익단체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회원들의 회비만으로는 직원들의 인건비를 충당하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열악하다. 그러나 감시하고 견제해야 하는 시민단체가 보조금이나 후원금 형식으로 지원을 받는 것은 문제이다. 이렇게 되면, 권력을 견제해야할 시민운동에서 오히려 민·관 유착현상이 발생하기 쉬운 구조가 되어 버린다. 감시와 견제대상인 기관이나 조직으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게 되는 경우 협력(協力)관계가 아니라 유착(癒着)관계가 되기 때문에 그 감시기능과 견제역할은 무뎌질 수밖에 없다. 셋째, 시민단체 출신 인사들의 정계진출에 관한 문제이다. 물론, 국민은 누구나 참정권을 가질 수 있으므로 개인자격으로 지방의회나 지방자체단체장으로 출마하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아예 처음부터 정계진출을 위한 디딤돌로 사용하기 위해 시민단체 활동을 하는 사람이 나타나고, 그 사람의 시민단체 활동이 사익을 추구하거나 자신의 야욕을 채우는 도구로 전락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넷째, 시민단체를 견제할 세력이 없다는 점이다. 시민단체가 비대화하게 됨에 따라 영향력 있는 몇몇 사람에 의해 시민단체의 활동방향이 정해진다. 따라서 시민단체 내부의 의사결정과정이 투명하고 민주적이어야 하며, 이에 위배될 경우, 시민 모두의 뜻이 반영될 수 있는 시민단체 내외의 견제장치가 마련되어야 한다. 사회가 다양화하고 국가권력이 비대해지며, 경제활동 주체들의 경제력을 이용한 횡포가 증가함에 따라 시민단체는 없어져야할 조직이 아니라, 더 활성화되어 시민들의 공공권익을 수호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민단체의 활성화와 더불어 발전방향이 모색되어야 한다. 즉, 시민단체 간부의 대표성 확보, 조직 내의 민주성 강화, 독립성의 강화, 감시대상 기관과의 유착 금지, 활동기금 조달방법 등을 함께 고민해야할 시점이다. 성경은 위에서 준 권력이 복종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롬13:1-2)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보수주의 기독교인들은 이를 근거로 보수정권과 협력하기도 한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1조 2항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중세시대의 국가권력과 달리 현대는 국민이 국가권력이다. 따라서 국가권력이 개인(대통령, 지자체장, 각급의회 등)에 의해 남용될 경우, 그 정당성을 상실하기 때문에 언론과 더불어 이를 견제할 건전한 시민활동은 지속되어야 한다.
한 검사가 공범 두 명을 잡아 기소하려고 했으나 증거가 충분하지 않았다. 만약 이 상태로 기소한다면 두 공범은 재판에서 낮은 형량을 받을 것이 뻔했다. 검사는 이들에게 죗값을 제대로 치르게 하기 위해 자백을 받아낼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검사는 두 죄수를 각각 다른 방에서 취조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만약 너희 둘 중에 한 사람만 자백을 하고 나머지는 끝까지 무죄를 주장한다면, 자백을 한 사람은 무혐의 처리를 해주고 끝까지 무죄를 주장한 사람은 10년을 감옥에서 살게 된다. 두 사람 모두 자백하면 각각 5년을, 둘 다 자백하지 않으면 1년만 살게 된다. 자백을 하겠는가·" 죄수의 딜레마 상황에서 만약 두 죄수가 서로 의사소통이 가능하다면 당연히 자백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겠지만, 의사소통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결정은 더욱 복잡해진다. 자백을 안 하자니 상대방을 믿을 수 없고, 자백을 하자니 자신의 범죄를 인정해 높은 형량을 받게 된다. 이처럼 상대방의 협력을 확신할 수 없는 상황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침묵보다는 자백, 즉 협력보다는 배신을 선택한다. 협력보다는 배신을 선택하는 것이 개인적으로는 매우 합리적인 선택이기 때문이다. 상대방의 침묵을 가정하면 침묵(1년)보다는 자백(석방)이 낫고, 자백을 가정해도 침묵(10년)보다는 자백(5년)이 낫다. 게임 참가자들이 다수인 경우, 방목장의 공유와 같은 공공재화의 딜레마(public good dilemma)나 댐 건설비용 부담의 무임승차(free rider)가 있다. 결과는 너나없이 소를 방목하여 황폐화되거나 댐 건설이 불가능한 결과를 초래한다. 어느 경우이건 협동보다는 경쟁을 선택하는 심리에 의해 자신만이 불리해지지 않는 선택을 하지만, 결과는 모두가 불리한 결과를 선택하게 된다. 최근 K모 비서관이 자신이 수십 년 동안 모시던 주군(主君) L모씨의 불법 뇌물수수 사실을 검찰에 실토했다. 결국 L모씨는 형사 처분을 면할 수 없게 되었다. 자신도 자백에 따른 다소의 감형사유는 되겠지만, 자신만이 처벌받는 불이익을 피하겠다는 심리로 침묵[협동]보다는 자백[배신]을 선택했다. 죄수의 딜레마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항변하겠지만, 결국은 이기심의 발로인 것이다. 요 며칠 사이에는 K모 실장이 같은 이유로 2대에 걸쳐서 충성을 바친 자신의 주군(主君) P모씨 부녀를 배신[자백]하는 듯한 진술을 했다. 결국, 공익이 아닌 사익을 추구하는 공범들이 침묵[협동]보다는 자백[배신]을 선택하는 것은 사필귀정(事必歸正)이다. 그들은 사익을 추구하기 위해 협력을 하였고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자백[배신]을 선택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한 사람 보다는 두, 세 사람이 낫고, 합력하여 선(善)을 이루라고 가르친다. (전 4:9-12)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혹시 그들이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또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롬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공익이나 선(善)을 이루기 위한 협동[침묵]일 경우에 한한다. 예를 들면, 독립투사들이 자신의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동지를 배반[밀고]하지 않는 경우이다. 사익을 추구하는 공범(共犯)들이 곱씹어 보아야할 대목이다.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많은 선택에 직면한다. 소소한 일상에서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여러 가지를 생각한다. 좀 더 중요한 선택의 문제로는 어느 학교로 진학할 것인가· 무엇을 전공할 것인가· 또한, 사회에 나아가면 어떤 직업을 선택할 것인가· 공무원이나 회사원 자영업을 막론하고 각기 그 선택지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기 마련이다. 나아가 '인륜대사(人倫大事)'라고 일컬어지는 관혼상제(冠婚喪祭)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선택지에 직면하고 있다. 그 선택의 결과에 따라 희비(喜悲)가 엇갈리게 되고, 선택에 따라 만족감의 정도도 달라진다. 정말로 이 길을 선택하기를 잘했다고 만족해하기도 하고, 그때 좀 더 진지하게 고민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후회하기도 한다. 주변에 진심어린 애정으로 상담해주는 멘토(Mentor)가 내게도 있었다면 하는 아쉬움을 토로하기도 한다. 모르긴 해도 자신의 선택에 대해서 전혀 후회하지 않는 이들은 극소수에 불과할 것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선택을 만족스럽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인류가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지불하는 대가를 보면,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때로는 불가사의(不可思議)한 경우도 있다. 필자는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래서 도달한 결론이 '생존(survival)'에 필요한 재화와 서비스를 취득하기 위해 대가를 지불하는 경우와 '삶의 질(amenity)'을 위해 지불하는 대가의 선택기준이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빈국일수록 생존에 필요한 의식주(衣食住)의 경우 매우 비싼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한국전쟁 이후 어린아이들을 단지 먹는 입 하나를 줄이기 위해 학교도 보내지 않고 잘 사는 집에 가정부로 들여보내거나 대학생들이 숙식만을 제공받으며 가정교사를 하는 일이 많았다. 즉, 경제적 자립도가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경우, 제공되는 노동력에 비해 너무 값싼 임금을 받았다. 오죽하면 '가족(家族)'이라는 말보다 '식구(食口)'라는 말이 더 많이 사용되었겠는가· 결혼을 해도 아이가 태어나도 '먹는 입[食口]'이 늘었다고 표현했다. 그러나 경제적으로 풍요로워지고 배고픔의 문제가 해결되기 시작하면서부터 삶의 질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이는 기호식품이나 사치품의 가치가 상대적으로 상승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었다. 가난한 시절에는 관심도 끌지 못했던 '재화(goods)'나 '서비스(service)'가 생명유지에 필요한 음식물보다 더 비싼 대가를 지불해야 되는 상품이 되었다. 바로 '가치의 역설'이다. 예를 들면 '물'과 '다이아몬드'의 관계이다. 물은 인간의 생존에 필수불가결한 것이지만, 광석(鑛石)의 일종인 다이아몬드는 매우 비싼 가격에 거래된다. 경제학에서는 이 현상을 '한계효용(限界效用)' 이론으로 설명한다. 즉, 물 한 단위를 추가로 사용할 때 얻어지는 만족감이 다이아몬드를 한 단위 추가로 사용할 때 얻어지는 만족감보다 더 적기 때문이라는 논리이다. 그러나 이것도 어느 정도 생활이 안정적일 때의 이야기이다. 폭염이 기승을 부리는 요즈음이다. 열사의 사막 한 가운데서 타는 목마름[渴症]을 느끼는 이에게는 아무리 비싼 다이아몬드라 하더라도 아무런 만족감을 주지 못한다. 생사가 오가는 길목에서는 물 한 방울이 다이아몬드보다 더 값진 만족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한계효용 이론이 적용되지 않는 상황이다. 현대사회는 '얼짱', '몸짱', '좋은 집', '좋은 차' 등 지엽적인 문제에 매달려 정작 중요한 인간다운 삶의 본질을 잃어가고 있다. 가시적(可視的)인 것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닌 데도 말이다. 인간이 추구해야 할 핵심가치(核心價値)를 상실한 채 살고 있는 세태(世態)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성경은 본말이 전도(轉倒)되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고 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남에게 어떻게 보이느냐· 가 아니라, 자신의 내면을 가꾸어주는 것이 무엇인가· 를 깨닫는 일이지 않나 싶다. 마6: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우토로(宇土口)'. 일제강점기에 강제징용 등의 이유로 일본에 끌려간 재일동포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다. 우리가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곳 중 하나이자 재일 한국인의 한과 눈물이 서려있는 곳이다. 행정구역으로는 일본 '교토후(京都府)' 남부 '우지시(宇治市)'의 마을이다. 이곳은 태평양 전쟁 중인 1942년 교토 비행장과 병설 비행기 공장 건설 공사를 시행되었다. '일본 국제항공 공업'이 시공을 맡았고 약 2천 명의 노동자가 동원되었다. 그 중 약 1천 300명이 조선인이었으며 이 때 건설된 노동자와 가족을 위한 합숙소가 '우토로' 마을의 전신이다. 현재는 약 120명 정도가 살고 있다. 이전의 우토로의 거주여건은 말로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로 열악했다. 이 지역은 상수도 시설이 없었다. 지금은 물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되었으나, 하수도 시설은 아직도 없다. 그러니까 비오면 이 마을은 속절없이 침수 당한다. 뿐만 아니라 하수도와 빗물이 뒤섞여서 침수되므로 오물이 역류하여 무릎 높이의 물이 방안까지 침투한다. 이 정도로, 주변 일본인이 사는 마을에 비해 아직도 시설이 열악하다. 그런데 그곳에 살던 강제 징용 한국인들은 퇴거 위기에 시달렸다. 왜냐하면 원래 쿄토 지방정부의 소유였던 이곳이 '닛산'日産''자동차 그룹으로, 다시 부동산회사인 '서일본식산(西日本殖産)'으로 넘어갔기 때문이다. 무허가촌을 이루고 거주하던 조선인들은 강제퇴거를 강요받으며 어쩔 수없이 불법거주자 취급을 받게 되었다. 주민들은 소송에 맞섰으나 3심 모두 패소하고 말았다. 일본의 '우토로를 지키는 모임(대표 타가와 아키코)'과 한국의 '우토로 국제대책회의'등 시민단체와 종교단체가 나서 17억 원을 모금하고, 한국 참여정부가 30억 원을 지원하여 시영주택을 건립하고 2018년 1월 1차로 40가구가 입주했다. 75년간의 눈물과 투쟁의 한이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2020년에는 2차로 20가구가 순차로 입주할 예정이다. 주민들은 문재인 대통령에게 감사의 편지를 보냈고 문재인 대통령도 축하의 편지를 보냈다. 문재인 대통령은 "우토로 마을은 우리 동포들의 슬프고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곳입니다. 잊혀져서도 외면되어서도 안 되는 땅입니다. 우토로가 평화와 인권을 배우는 역사의 산 교육장이 될 수 있도록 한국정부도 계속 관심을 기울이겠습니다."라며 감사와 경의를 편지에 담았다. 우토로 문제가 이슈화됐던 2007년 당시 문재인 대통령 비서실장은 우토로국제대책회 등 우토로를 돕는 시민단체와 면담 후 30억 원의 정부자금의 지원을 추진해 토지매입 문제를 해결하기도 했다. 우토로 문제는 시작에 불과하다. 아직도 일본의 각 지역에서 차별받으며 살아가는 한국인[민단]이나 조선인(조총련)의 문제는 현재 진행형이다. 뿐만 아니라, 사할린에 끌려갔던 한국인. 즉,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당한 '카레이스키(高麗人)'들의 문제는 아직 관심조차 받지 못하고 있다. 정부가 국내 문제에만 매달릴 것이 아니라, 외국에서 '디아스포라(Diaspora, 이산가족)'로 살아가는 자국민에 대한 문제해결에 적극적으로 임해야 한다. 왜냐하면 국가가 강제징용 당해 끌려간 국민을 보호하지 못한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나그네(외국인)을 압제하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다. (신10:18)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여 그에게 떡과 옷을 주시나니 (딛1:8a) 오직 나그네를 대접하며 선행을 좋아하며 그러나 일본국은 '신토[神道]'의 나라다. 성경의 가르침을 알 리가 없다. 그렇다고 하면 우토로 주민의 조국인 한국이라도 국제적인 위상과 경제력에 걸맞게 재외국민에 대한 지원을 확대해야 하는 이유다.
쉼표(comma)의 사전적 어의를 찾아보면, "짧게 쉬는 부분을 나타내는 문장 부호로서 반점(,), 가운뎃점(·), 쌍점(:), 빗금(/) 등이 있으며 대개 반점을 가리킨다."고 설명하고 있다. 악보는 음의 배열 또는 그 연주법을 일정한 조직을 가진 문자 또는 기호로 이루어져 있는데, '쉼표'는 '음표'와 대비되는 쌍으로 이루어져있다. 음악에서 쉼표는 음표 못지않게 선율에 미치는 영향이 지대하다고 한다. 왜냐하면 음표만으로는 아무리 천재적인 작곡가라 하더라도 제대로 된 음악을 만들어내기 힘들기 때문이다. '쉼표'와 '마침표'는 비슷한 모양이기도 하지만, 그 생김새만큼이나 구별하여 사용하기가 어렵다. '쉼표(,)는 마치 공중에서 휘몰아치는 '회오리바람'이나 바다 한 가운데에서 일어나는 '소용돌이'처럼 꼬리를 드리운 모양이다. 그에 반하여 '마침표(.)' 한 가운데로 똘똘 뭉쳐있어서 어느 한 구석 뚫고 들어가거나 뚫고 나올 수 있는 여지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네 인생살이에서도 쉼표와 마침표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한다. 차마 마침표를 찍을 수 없어 쉼표를 찍어야할 때가 있고, 그로 인해 삶을 송두리째 잃게 되는 돌이키기 어려운 지경이 빠지기도 한다. 때로는 '쉼표(,)'를 잘 사용해서 성공한 인생을 사는 경우도 있다. 필자는 다소 손해를 보더라도 마침표보다는 쉼표를 잘 활용하는 삶을 살고 싶다고 생각하지만, 스스로를 돌아보아도 실제 그렇게 사는지는 의문이다. 마침표 또한 불확실성이 존재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예리한 메스로 환부를 도려내는 의사처럼 우리 삶의 현장에서 매사를 정확하게 맺고 끊으며 살아간다면 명쾌하고 확실한 결론을 도출해낼 수는 있겠지만, 때론 그로 인해 인간관계가 끊어지고 재물이나 사람을 잃게 되기도 한다. 마침표는 가까이 하기 어려운 상대이다. '물이 맑으면 고기가 모이지 않는다.'라는 속담을 실감나게 하는 부호인 셈이다. 음악에서 쉼표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면 그 악보에 따라 연주되는 음악은 아름다운 선율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것처럼 인생길에서도 쉼표를 제대로 활용할 줄 모르면 우리네 삶도 엉망이 될지도 무른다. 글쓰기에서도 쉼표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쉼표를 적절히 사용하지 못한다면, 글을 '읽는 이(讀者)'는 그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게 된다. 그저 어줍지 않은 신변잡기를 습작처럼 쓰는 필자에게 '쉼표(,)'는 참으로 다루기 어려운 상대이다. '글쟁이' 반열에 들기에는 어림없는 이유다. '휴(休)'라는 글자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마치 사람(人)이 나무(木)에 기대어 쉬고 있는 모습이다. 바쁜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휴식(休息)'은 필수불가결한 요소이다. 사람은 하루를 세 등분하여 '일, 잠, 휴식'에 사용하도록 프로그래밍 되었다고 한다. 모든 질병은 이 단순한 원칙을 지키지 않아서 자초되는 결과라고 한다. 왜냐하면 사람은 기계가 아니라 생명을 가진 유기체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사람은 일주일에 한번(안식일=일요일)은 쉬어야 하고, 형제에게 준 빚은 7년째에는 면제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자신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교훈이다. (레 19:3) 너희 각 사람은 부모를 경외하고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신 15:1) 매 칠 년 끝에는 면제하라 그리고 이 가르침은 인간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식물들에게도 적용되는 규범이다. 식물도 50년에는 원 상태로 되돌려줘야 한다. 창조주의 자연 사랑을 웅변해주고 있다. (레 25:11) 그 오십 년째 해는 너희의 희년이니 너희는 파종하지 말며 스스로 난 것을 거두지 말며 가꾸지 아니한 포도를 거두지 말라 '안식일'에는 자기사랑(愛己), '안식년'에는 이웃사랑(愛他), '희년'에는 자연사랑[愛自然]을 강조하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우리가 가끔은 '쉼(休)'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아야 할 까닭이다.
새터민 관련 공식명칭은 월남귀순자→귀순용사→귀순동포를 거쳐 현행 '북한이탈주민'이라는 공식명칭으로 변화돼 왔는데, 거부감이 있어서 '새로운 터전에서 삶의 희망을 갖고 사는 사람'이라는 뜻을 가진 '새터민'이란 용어를 사용하게 됐다. 새터민이 한국사회에 진입한 후 초기 6개월간 겪는 가장 큰 어려움은 남한사회의 문화적 이질성이다. 폐쇄적이고 상대적으로 자유롭지 못한 북한사회의 생활패턴을 경험해온 새터민에게 자유로운 행동과 외모, 생활풍습의 차이, 남한주민의 사고방식들은 낯설 수밖에 없다. 또한, 북한체제와 상이한 성격을 지닌 남한의 자유민주주의의 체제에 대한 이해부족으로 지역사회로의 동화과정에서 문화적 이질감 외에도 극심한 자격지심에 시달리며 남한 주민과의 생활에 적응하기 어렵다. 그리고 새터민은 자신들의 존재가치가 경제적 능력이나 지위와 무관하지 않다는 현실과 마주하게 된다. 과거에는 북한을 탈출해 남한에 왔다는 사실만으로 영웅시되고 많은 물질적 지원과 사회적 혜택이 주어졌지만, 현재는 인도주의적 관점에서 다루어지는 난민(難民)의 영역에 가깝게 자리하고 있다. 경제적 문제와 함께 사회적 안전망의 부실로 인한 탈북자의 외로움이나 고독감 등은 정착 초기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오히려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런 요인들로 인해 탈북자는 비교적 짧은 기간에 다양한 갈등을 겪음으로서 정체성 혼란을 야기하게 된다. 다른 난민(難民)들과 달리 탈북자의 경우에는 한국에서의 정착기간이 길어질수록 정신질환에 걸릴 확률이 더 높아진다고 한다. 점점 새터민과 난민의 경계는 불분명해지고 있는 요즈음 한국사회는 제주도에 들어온 예멘 난민 문제로 의견이 분분하고 소란스럽다. 새터민도 일종의 난민이지만, 차이점은 혈육인가? 아닌가? 라는 점과 종교상의 문제다. 즉, 새터민은 무종교인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예멘 난민은 무슬림이어서 기독교문화, 불교문화 및 유교문화와는 이질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다. 지금 우리 사회는 난민(難民) 인정에 대해서 찬성하는 이들과 반대하는 이들로 나뉘어 여론이 분분하다. 그러나 우리도 난민이었던 적이 있고 현재도 난민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많다. 즉, 상해 임시정부 요인이나 만주지역의 독립투사들은 분명 난민(難民)이었다. 그리고 현재 일본에서 '쵸센징'(朝鮮人·재일동포)이라는 이름으로 차별받으며 살아가는 이들과, 소위 '카레이스키'(高麗人·한국인-사할린에 거주하다가 1930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당함)라고 불리는 이들이 그들이다. 재일동포인 '쵸센징'도 그렇지만, '카레이스키'들도 소련연방이 붕괴된 이후 러시아와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등 11개의 독립국가연합 국가에 흩어져 살고 있지만, 아직 자치권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성경말씀은 나그네(난민)를 핍박하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다. 우리나라의 임시정부요인이나 독립투사가 나그네였고 재일 한국인, 재러 한국인은 지금 현재도 나그네이듯이, 이스라엘 백성도 애굽(이집트)땅에서 나그네(난민)였던 적이 있기 때문이라고. (출 22:21)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였음이라 새터민과 난민 모두 일자리와 종교적인 문제 등, 다양한 이해관계가 걸려있지만, 적어도 '교회'와 '기독교인들'만이라도 '새터민'과 '난민(難民)'문제를 고민해야 하는 이유다.
일부 대형교회에서 일어나는 담임목사직의 세습은 세간의 질타를 받는 교회의 또 다른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아버지로부터 직접 아들에게로 이어지는 경우는 물론이거니와, 다른 교회의 후임과 자신이 재직하는 교회의 후임을 맞바꾸는 교차 세습, 나아가 세 개 혹은 그 이상의 교회들이 후임자를 돌려가며 임직시키는 순환세습까지 일어나는 경우, 그 폐해의 심각성은 실로 헤아리기 어렵다. 일부 기업들에서 이루어지는 자본의 상호출자나 순환출자처럼 비난받아 마땅한 비정상적인 경영방식에 교회가 오염되어 버린 셈이다. 이는 교회 구성원들은 물론이고, 일반인들에게마저 이해하기 힘든 행태로 비쳐진다. 극소수 대형교회의 세습 문제가 마치 모든 교회에서 일어나는 현상인 것처럼 오도(誤導)하게 됨으로서 건실하게 사역에 임하고 있는 대부분의 목회자들에게 상대적 박탈감을 준다. 나아가 사회의 공분과 비난을 초래하게 됨과 동시에 하나님께도 용서받지 못할 범죄를 저지르는 결과로 이어진다. 물론, 소수의 교인들로 이루어진 규모가 작은 교회에서 후임목회자를 청빙할 수 없을 때 세습은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왜냐하면, 교회 재정의 부족으로 인하여 담임목사에게 사례비(급여)를 지불하지 못하는 경우, 아버지가 세운 교회를 폐쇄할 수 없어 아들이 희생적으로 사역(자비량=담임목사의 사비로 교회운영과 생계를 유지)을 계속하는 데에야 소속 교인들이나 비 기독교인들로부터 비난받을 하등의 이유가 없다. 문제는 재정규모가 어느 정도 이상인 교회의 경우다. 결국, 세습 문제는 금전문제와 결부되어 있다. 세습에 찬성하는 이들이 견해는 이렇다. 아들도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자격을 갖춘 목사이고 적법한 절차를 거쳐 직책을 맡은 만큼 '담임목사의 후계자 문제'이지 '세습 문제'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세습에 반대하는 이들은 비록 합법적인 절차에 의한다고 해도 전임목사의 카리스마적 지도력이 관철되고 교인들의 민주적 참여와 의사결정이 실제로 보장되지 못하는 조건 아래에서 전임목사가 자기 아들을 후임자로 선정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한다면 이는 '담임목사의 후계자 문제'가 아니라 '세습 문제'라는 것이다. 이런 세습 문제는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담임목사직은 말씀과 치리를 담당하는 특수 직책으로서 교회의 조직을 관리하고 운영하는 치리기관의 대표성과 책임을 부여 받는다. 그런데 현실적으로는 담임목사의 남다른 카리스마가 능력을 발휘함으로서 사람들의 호응과 인정을 받아 개교회의 외형적 부흥과 성장으로 연결되고 있다. 그 결과 목회자의 카리스마가 교회공동체 내에서 절대적인 권위를 행사하게 된다. 이런 환경 아래에서는 담임목사의 권위에 대한 비판적 성찰 능력 및 비판적 담론 능력을 퇴화시킨다. 담임목사의 청빙제도는 당회>제직회>공동의회>노회를 거쳐 결정된다. 청빙제도의 의사결정 과정이 왜곡된다면 그 결정은 정당화될 수 없다. 권위주의적인 교회 구조를 수평적이고 민주적인 구조로 개편해야만 할 이유다. 성경도 목회자가 탐욕을 부리면 비참한 죽음(아들 포함)이 기다린다고 경고하고 있다. (삼상 4:17b-18a) …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도 죽임을 당하였고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나이다 하나님의 궤를 말할 때에 엘리가 자기 의자에서 뒤로 넘어져 문 곁에서 목이 부러져 죽었으니 … (수 13:22)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을 살륙하는 중에 브올의 아들 점술가 발람도 칼날로 죽였더라 또한, 성경은 목회자들에게 임무를 마친 후,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라고 가르치고 있다. 교회(신앙)공동체는 세습할 사유물이 아니라 "만민이 기도하는 하나님의 집(사 45:7)"이기 때문이다. (삿 8:23) 기드온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하겠고 나의 아들도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 하니라
1990년대 중반 청주 MBC에 근무하는 L기자가 필자를 찾아왔다. 청주는 문화의 도시이기도 하고, 점점 국제교류활동이 증가하므로 무언가 공공기관이 다하지 못하는 부분을 감당할 민간단체가 필요하다는 이야기였다. 이유인즉, 청주의 C대학 학생들이 일본에 가서 홈스테이를 했는데, 일본 측 학생들이 오게 되면 홈스테이가 할 곳이 없으니 우리가 나서서 이 문제를 해결해보자는 것이었다. C대학 학생들의 약 70%이상이 서울 등 외지의 학생이기 때문에 청주에 집이 없어 홈스테이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여러 사람들과의 접촉 끝에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 약 30여 명이 모여 1997년 '청주국제친선교류협회(Cheong-ju International Friendship Association)'라는 모임이 결성되었다. 구성원은 의사, 대학교수, 공무원, 자영업자들 중에서 어느 정도 외국어 구사능력이 가능하거나 관심이 있는 분들이었다. 협회(協會)라는 명칭 때문에 충북도청에 비영리민간단체 등록을 할 때도 문제가 되었다. 당시는 아직 국제교류가 지금처럼 활성화되어 있지도 않았고, 전국적으로 조사를 해보니 협회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모임은 대부분 전직 외교관으로 근무하다 퇴직한 분들이 만든 것이 대부분이고, 순수한 민간단체는 한 곳도 없었다. 그렇지만 논란 끝에 결국 청주국제친선교류협회(CIFA)가 출범했다. 초기에는 일본을 오가며 홈스테이 하는 학생들을 지원하는 것을 시발점으로 해서 금천초와 '나가노'소학교의 음악교류, 공예비엔날레에 참가하는 외국인들에 대한 홈스테이 지원사업 등을 하다가 다문화가정 등으로 활동범위를 넓혀갔다. 외국과의 교류도 중요하지만, 국내에 들어와 있는 외국인들에 대한 지원사업도 중요하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도내에 거주하는 외국인 들을 불러 모아 체육대회, 등산, 장기자랑(노래, 악기연주, 춤 등) 등을 개최하여 많은 돈을 들이지 않아도 한국문화를 접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활동을 개시하였다. 문제는 회원들이 매월 1만 원씩의 회비를 갹출하는 것만으로는 턱없이 경비가 부족했다. 그래서 음식도 회원들이 직접 만들었다. 부침개(전)나 김밥, 불고기, 조리 기구 등을 회원 각자가 준비하도록 했다. 초창기라서인지 모두들 불평하지 않고 잘 협조해주어 어렵지만 꾸려나갈 수 있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던가· 공예비엔날레의 한 구석 부스를 빌려 외국인 장기자랑을 개최하였는데, 당시 청주시 N시장이 와 보고는 좋은 아이템이라고 하며 800만 원을 지원해주었고, 이후 도청의 민간단체 지원 사업에 신청을 해서 별도로 300만 원의 보조를 받았다. 덕분에 필자가 사무국장을 맡았던 6년 동안은 경비에 대한 부담이 없이 활동할 수 있었다. 후임 사무국장 이후 충북도나 청주시에 제출하는 여러 가지 복잡한 서류를 작성하는데 부담을 느껴 스스로 지원요청을 포기한 것은 두고두고 아쉬움으로 남는다. 앞으로 국내거주 외국인은 점점 늘어날 전망이고 '지구촌은 하나'라는 말처럼 외국과의 교류도 활발해질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희생과 봉사정신, 그리고 외국어 구사능력을 갖춘 회원의 참여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화려한 외국과의 교류도 중요하지만, 국내에 거주하는 외국인과의 교류는 저렴한 경비로 한국의 문화를 전파하여 한국에 대한 이해를 넓힐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다문화 가정은 물론이거니와 최근에 자주 논란이 일고 있는 인권의 사각지대에 있는 국내거주 외국인에 대한 나눔과 봉사가 절실히 필요하다. 성경 말씀도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학대하지 말고 선대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슥 7:10)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와 궁핍한 자를 압제하지 말며 서로 해하려고 마음에 도모하지 말라 하였으나 (신 24:19) 네가 밭에서 곡식을 벨 때에 그 한 뭇을 밭에 잊어버렸거든 다시 가서 가져오지 말고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시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