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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섭

청주시 공보관실 팀장

언제부턴가 시골장터의 풍경이 좋아졌다. 그 곳에는 도시에서 볼 수 없는 느긋한 여유와 한가로움이 있고, 사람들의 정이 있다. 농사일 잠시 잊은 채 손주들 입힐 옷을 흥정하는 아낙네의 모습에서, 막걸리 한 사발에 세상시름 던져버리고 풍년가 한 소절을 멋들어지게 뽑아대는 구릿빛 농사꾼의 얼굴에서 나는 삶의 여유와 넉넉함을 느낀다.  

오늘도 고향을 찾아 그 옛날 추억이 남아있는 시골장터를 기웃거렸다. 내리쬐는 뙤약볕 아래 나물바구니를 펼쳐놓고 손님을 기다리는 아주머니들이 나물단 처럼 모여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등이 굽어 유모차를 끌며 지나가는 동네 노인에게도 객지나간 자식들의 안부를 물으며 인사를 건넨다. 시골이라 그런지 주고받는 대화에도 순박함이 묻어난다. 

노점 끝자락에 어렴풋이 낯익은 얼굴이 보인다. 고향집 윗동네 살던 동순이 엄마였다. 반가운 마음에 다가가보니 텃밭에서 직접 가꾼 시들어진 호박잎과 열무 몇 단 앞에 놓고 꾸벅꾸벅 졸고 계신다. 장터 사람들과 반주삼아 해장술 한잔을 하셨단다. 부스스한 머리와 주름진 손 등을 들여다보니 살아온 세월이 고달파 보인다. 삶은 얼마나 무거운 것이기에 하루를 짊어지기에도 저토록 힘들어 보이는 걸까. "아직도 장사를 하세요."라고 물으니 사람이 그리워서 나왔단다. "오늘따라 개미새끼 한 마리 구경할 수 없다."며 투덜대는 모습이 영락없는 어렸을 적 동순이를 닮았다. "그래도 경력이 몇 년인데요, 아줌마 장사수완을 누가 따를까." 인사치례 같은 말 한 마디 남기고 발걸음을 옮겼다.

모퉁이를 돌아 장 안으로 들어서니 잘 익은 과일들이 가게마다 널려있다. 진열대 위에 과일들은 저마다의 빛깔로 단내를 품어내며 오고가는 사람들의 발길을 잡아끈다. 수박 한통을 놓고 손님과 주인이 흥정을 벌이고 있다. 다른 데는 만 오천 원 인데, 왜 여기는 이만 원을 받느냐고 손님이 따지듯이 다그친다. 그러자 주인이 "이 수박은 그 수박과 종자부터가 달라유. 메이커 수박이라 깎아 줄 수가 없어유."라며 맞받아친다. 손님과 주인의 수박 값 흥정은 한참동안 끝날 줄을 몰랐다.  

멀리 사는 친구에게 과일을 보내려고 살며시 문을 열고 가게 안을 들어서니 팔뚝에 문신을 한 주인이 홀아비 같은 모습으로 나를 맞는다. 손님을 기다리는 때 묻은 방석들이 궁상맞아 보인다. 친구와 어렸을 적 추억들을 생각하며 진열된 과일들을 바구니에 담았다. 먼 길에서 보내온 따뜻한 정성에 감동하는 친구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저 멀리서 아줌마가 수박 한통을 들고 걸어간다. 아까 실랑이를 벌이던 그 분이었다. 발걸음이 가벼운걸 보니 뜻대로 흥정이 잘 이루어진 모양이다.  

생선가게를 지나자니 돋보기안경 너머로 꼬깃꼬깃 접혀진 천 원짜리 지폐를 한 장 한 장 펴가며 침을 발라 세고 있는 아낙네의 모습이 낯설지가 않다. 고향을 떠나오기 전 어머니를 따라 장에 나오면 생선은 꼭 이 집에서 샀었는데…. 그때 그 아줌마는 지금도 살아계실까. 통통한 고등어 한 손을 사면 한물 간 생선 몇 토막을 덤으로 얹어주던 그 분의 고운 마음씨는 빙어의 속살처럼 맑고 투명했었다.

해가 기우는 저녁나절, 출출함을 달래려고 국밥집엘 들렀다. 식당 안에는 옻 오른 것처럼 벌건 얼굴을 한 남정네와 아낙네가 뒤섞여 일찌감치 자리를 잡고 앉아있다. 콧속으로 풍겨오는 사람 냄새가 좋다. 국밥 한 그릇에 막걸리 한 사발 시켜놓고 그들의 넋두리에 귀 기울이니 거칠게 주고받는 입담 속에는 장사꾼들의 고단한 삶이 고스란히 묻어있다. 산다는 것, 아무런 짐 없이 가볍게 나서는 산책 같은 것일 수는 없는 걸까.

식당 문을 나서니 해는 뉘엿뉘엿 서산으로 넘어가고 장사꾼들도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막걸리를 많이 마신 탓일까.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에 바람이 스쳐지나간다. 붉게 물든 석양아래 갈 곳을 잃은 사람처럼 나는 불어오는 바람을 따라 무작정 시골길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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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일보가 만난 사람들 - 단양교육지원청 김진수 교육장

[충북일보] 몇 년동안 몰아친 코로나19는 우리 나라 전반에 걸처 많은 염려를 낳았으며 이러한 염려는 특히 어린 아이들에게 실제로 학력의 위기를 가져왔다. 학력의 저하라는 위기 속에서도 빛나는 교육을 통해 모범 사례로 손꼽히는 단양지역은 인구 3만여 명의 충북의 동북단 소외지역이지만 코로나19 발 위기 상황에서도 잘 대처해왔고 정성을 다하는 학교 지원으로 만족도도 최상위에 있다. 지난 9월 1일 자로 단양지역의 교육 발전에 솔선수범한 김진수 교육장이 취임하며 앞으로가 더욱 기대되고 있다. 취임 한 달을 맞은 김진수 교육장으로부터 교육철학과 추진하고자 하는 사업과 단양교육의 발전 과제에 대해 들어 본다. ◇취임 한 달을 맞았다, 그동안 소감은. "사자성어에 '수도선부(水到船浮)'라는 말이 있다. 주희의 시에 한 구절로 강에 물이 차오르니 큰 배도 가볍게 떠올랐다는 것으로 물이 차오르면 배가 저절로 뜨더라는 말로 아무리 어렵던 일도 조건이 갖춰지면 쉽게 된다는 말로도 풀이할 수 있다. 교육장에 부임해 교육지원청에서 한 달을 지내며 교육장의 자리가 얼마나 막중하고 어려운 자리인가를 느끼는 시간이었다. 이렇게 어렵고 바쁜 것이 '아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