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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섭

청주시 공보관실 팀장

봄빛 쏟아지는 일요일 오후, 나는 그 햇살을 받으며 텅 빈 들길을 걷는다. 저 멀리 연둣빛 치마저고리를 입고 서있는 수양버들 한 쌍이 부는 바람에 몸을 맡겨 너울거리고 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속 잎 돋아난 가지에서는 버들강아지가 햇살에 반사되어 하얗게 빛나고 있다. 몽실 몽실 멍울 맺은 모습이 복스러워 버들강아지라고 불렀던 것일까. 물오른 버들가지를 살며시 부여잡고 머문 듯 흘러가는 미호천을 바라보니 옛 고향의 추억들이 사뭇 그립다.

어렸을 적 내 고향에는 강변 밭이 있었다. 뜰에는 모래밭이 펼쳐져 있고 언덕 위에는 낭창낭창 늘어진 수양버들이 줄을 이어 있었다. 초여름이 되면 아버지는 그늘도 없는 뙤약볕 아래 쪼그리고 앉아서 하루 종일 밭을 매셨다. 그리고 나와 동생들은 아버지가 만들어준 성글은 그물로 강버들 그늘 밑에 숨어있는 물고기를 잡으며 시간가는 줄 모르고 놀았다. 물속에 텀벙 뛰어들어 멱을 감고, 물놀이가 끝나면 강변 뜰 너럭바위에 벌러덩 드러누워 옷을 말렸다. 흰 구름 흘러가던 고향하늘이 지금도 나에게는 잊지 못할 추억과 그리움이다.

해가 중천에 떠오르면 강변 빨래터에는 동네 아줌마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묶은 삶의 때라도 벗겨내려는 것일까. 아줌마들이 두드리는 방망이질 소리는 봄바람을 타고 햇살처럼 내 귓전을 스치며 지나갔다. 한참을 뛰어놀다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날 때쯤이면 어머니가 새참을 내어 오셨다. 우리는 버드나무 그늘아래 옹기종기 모여앉아 이야기꽃을 피우며 음식을 먹었다. 이 순간이 아버지에게는 휴식이었고 우리 가족에게는 정을 나누는 시간이었다. 똬리를 튼 머리위에 소쿠리를 이고 수양버들 언덕길을 걸어오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서산에 걸린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이면 아버지는 언덕에 올라 버들피리를 부셨다. 필리리~ 필릴리리~ 봄바람을 타고 흘러가던 그 소리는 기찻길 저 멀리서 들려오는 기적소리와 어우러져 슬픈 듯 처량한 듯 하모니를 이루었다. 나도 아버지가 만들어준 버들피리를 힘껏 불어보았다. 후우욱~ 후우우욱~ 강변 뜰 언덕을 스쳐가는 힘 빠진 바람소리 같기도 하고, 동생이 어머니께 칭얼대는 철없는 소리로도 들렸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아버지께서는 두 동생을 지게에 태우고 말없이 노을 진 들녘 길을 터벅터벅 걸으셨다. 그때는 구수하고 정겹게만 들렸었던 아버지의 버들피리 소리. 세월이 흘러 생각하니 그 소리는 그냥 소리가 아니었다. 어린나이에 학업을 포기하고 대가족을 건사하며 삶의 무게를 견뎌야 했던 가슴에서 들려오는 울림의 소리였다. 휘리릭~ 휘리리릭~ 물오른 강버들이 봄바람에 휘날리면 버들피리 꺾어 불며 아버지를 따라 들길을 걸었던 그 시절이 그리워진다.

지난날 아버지가 그러셨던 것처럼 나도 미호천 강버들 언덕에 앉아 버들피리를 불어본다. 호디딕~ 호디디딕~ 불어오는 강바람에 피리소리가 낭랑하다. 끊어질 듯 이어지는 이 소리는 무슨 소리일까. 그 옛날 강변 뜰 빨래터에서 들려오던 아낙네들의 방망이질 소리인가. 버드나무 언덕에 올라 아버지가 불어주던 빛바랜 추억속의 그 버들피리 소리인가. 도시화에 밀려서 지금은 볼 수 없는 그 시절 내 고향의 풍경소리는 아닐는지. 코흘리개 동생들과 수양버들 언덕을 뛰어 놀았던 어린 시절 나의 봄은 참으로 행복했다.

지금쯤 동생들은 어떤 추억을 기억하고 있을까. 나와 아버지의 버들피리 추억처럼 동생들도 그때 그 시절을 기억하고 있을까. 텅 빈 들길에 오래도록 제자리를 지키며 서있는 저 버드나무처럼 살고 싶다. 베풀고 견디면서 유연하게 살고 싶다. 필리리~ 필리리리~ 미호천 강바람이 옷깃을 흔들며 지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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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일보가 만난 사람들 - 단양교육지원청 김진수 교육장

[충북일보] 몇 년동안 몰아친 코로나19는 우리 나라 전반에 걸처 많은 염려를 낳았으며 이러한 염려는 특히 어린 아이들에게 실제로 학력의 위기를 가져왔다. 학력의 저하라는 위기 속에서도 빛나는 교육을 통해 모범 사례로 손꼽히는 단양지역은 인구 3만여 명의 충북의 동북단 소외지역이지만 코로나19 발 위기 상황에서도 잘 대처해왔고 정성을 다하는 학교 지원으로 만족도도 최상위에 있다. 지난 9월 1일 자로 단양지역의 교육 발전에 솔선수범한 김진수 교육장이 취임하며 앞으로가 더욱 기대되고 있다. 취임 한 달을 맞은 김진수 교육장으로부터 교육철학과 추진하고자 하는 사업과 단양교육의 발전 과제에 대해 들어 본다. ◇취임 한 달을 맞았다, 그동안 소감은. "사자성어에 '수도선부(水到船浮)'라는 말이 있다. 주희의 시에 한 구절로 강에 물이 차오르니 큰 배도 가볍게 떠올랐다는 것으로 물이 차오르면 배가 저절로 뜨더라는 말로 아무리 어렵던 일도 조건이 갖춰지면 쉽게 된다는 말로도 풀이할 수 있다. 교육장에 부임해 교육지원청에서 한 달을 지내며 교육장의 자리가 얼마나 막중하고 어려운 자리인가를 느끼는 시간이었다. 이렇게 어렵고 바쁜 것이 '아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