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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섭

청주시 공보관실 팀장

시청 앞 마당에 배롱나무 꽃이 하늘빛과 어우러져 눈부시게 황홀하다. 찌는 듯한 더위에 맞서 오롯이 태양을 바라보며 분홍빛 꽃을 피워낸 저 나무가 참으로 대견하다. 한여름 뙤약볕 아래 활짝 피어있는 저 꽃은 화려하지만 번잡하지가 않다. 우아하면서도 탐스럽다. 어쩌면 저렇게 예쁜 꽃을 피웠을까.  

한참동안을 바라보니 오래전 떠나간 친구가 생각난다.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을 다 아는 도반 같은 친구였다. 그는 나만의 친구가 아니었다. 다른 친구들이 어려움을 당하면 소리 없이 찾아가 궂은일을 도맡아 했다. 그런 그의 품성 때문인지 주변에는 그를 따르고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하루는 친구 어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전화기를 타고 들려오는 떨림의 소리가 예사롭지 않았다. 어린아이를 구하려고 물에 뛰어들었다가 나오지를 못했다는 전화였다. 어린아이는 무사하다고 했다. 한걸음에 달려가 보니 친구는 싸늘한 시신이 되어 있었다. 자식을 먼저 보낸 어머님의 마음은 어땠을까. 친구를 가슴에 묻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그날도 오늘처럼 진분홍 배롱나무 꽃이 화사하게 피어있었다. 20여 년의 세월이 흘렀는데도 아직도 그 친구는 내 가슴에 그리움으로 남아있다. 저 배롱나무의 꽃말이 '떠나간 벗을 그리워함'이라고 했던가. 벗을 향한 그리움이 얼마나 컸으면 저토록 붉은 꽃을 피웠을까. 

굵은 줄기에 마른버짐처럼 번져나간 갈색 반점들이 그동안 살아온 나무의 세월을 말해주고 있는 듯하다. 숱한 세월을 견디며 싹틔우고 꽃피우려 애쓴 흔적들이 나뭇가지 곳곳에 널려있다. 솟아오른 가지는 용이 똬리를 틀고 하늘로 날아오르는 모습 같기도 하고 허공에 손을 벌려 덩실덩실 춤을 추고 있는 가냘픈 여인의 몸짓 같기도 하다. 마디마디의 굴곡은 보릿고개를 넘다가 지쳐 쓰러진 어느 노인의 등마루를 보는 듯하고 매끄럽고 윤기가 흐르는 튼실한 줄기는 고귀한 멋이 있어 보면 볼수록 기품이 느껴진다. 세월이 품어내고 있는 고목의 고풍스러움을 무심히 바라보니 살아있는 생명의 아름다움을 새삼 느낀다. 

봄이 되면 산천의 초목들이 새순을 내밀며 앞다퉈 꽃을 피우지만 배롱나무는 서두르는 법이 없다. 몸속의 세포들을 조용히 다독이며 때를 기다린다. 화려한 봄꽃들이 모두 질 무렵, 비로소 잎을 내밀고 뜨거운 태양아래 백일동안 피고지기를 반복하며 꽃을 피운다. 초록만이 무성한 이 계절에 선명한 분홍빛으로 다가와 우리에게 생기를 준다. 얼마나 큰 위안인가. 세상일은 서둘러서 되는 게 아니다. 급하고 빠른 것을 신앙처럼 떠받들고 사는 현대 사람들에게 느림의 미학을 온몸으로 실천하는 나무, 배롱나무가 우리에게 던져주는 화두는 단순하면서도 깊이가 있다. 

예로부터 배롱나무는 선비들의 사랑을 듬뿍 받아온 나무다. 일 년에 한차례씩 껍질을 벗는 나무의 줄기에서 청렴과 무욕을 배웠다고 한다. 언제부턴가 이 나무는 일편단심의 상징이 됐다. 껍질이 없어도 대나무처럼 속이 비어있지 않아 겉과 속이 같은 나무로 여겨져 왔기 때문이다. 사육신 성삼문에게 배롱나무의 붉은 꽃은 임을 향한 변치 않는 마음이었을까. 모진 고난 속에서도 어린 단종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쳤던 그의 무덤에는 해마다 이맘때면 배롱나무의 꽃이 붉게 피어 아직도 임을 향한 절개와 지조를 지키며 서있다고 한다. 시청 앞 마당에 배롱나무를 심은 뜻은 무엇일까. 서두르지 않는 대기만성의 지혜로 매일매일 새로워지는 법을 배우라고…. 그리고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의로움을 잃지 말고 올곧게 살아가라는 뜻이 담겨져 있는 것은 아닐까.

퇴근길에 올려다 본 배롱나무 분홍빛이 너머 가는 석양과 어우러져 더욱 화사하다. 여름의 마지막 불꽃을 태우려는 듯 불어오는 바람에 한잎 두잎 떨어져 내리는 꽃잎들이 시청 앞 마당을 붉게 물들이고 있다. 나도 저렇게 물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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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일보가 만난 사람들 - 단양교육지원청 김진수 교육장

[충북일보] 몇 년동안 몰아친 코로나19는 우리 나라 전반에 걸처 많은 염려를 낳았으며 이러한 염려는 특히 어린 아이들에게 실제로 학력의 위기를 가져왔다. 학력의 저하라는 위기 속에서도 빛나는 교육을 통해 모범 사례로 손꼽히는 단양지역은 인구 3만여 명의 충북의 동북단 소외지역이지만 코로나19 발 위기 상황에서도 잘 대처해왔고 정성을 다하는 학교 지원으로 만족도도 최상위에 있다. 지난 9월 1일 자로 단양지역의 교육 발전에 솔선수범한 김진수 교육장이 취임하며 앞으로가 더욱 기대되고 있다. 취임 한 달을 맞은 김진수 교육장으로부터 교육철학과 추진하고자 하는 사업과 단양교육의 발전 과제에 대해 들어 본다. ◇취임 한 달을 맞았다, 그동안 소감은. "사자성어에 '수도선부(水到船浮)'라는 말이 있다. 주희의 시에 한 구절로 강에 물이 차오르니 큰 배도 가볍게 떠올랐다는 것으로 물이 차오르면 배가 저절로 뜨더라는 말로 아무리 어렵던 일도 조건이 갖춰지면 쉽게 된다는 말로도 풀이할 수 있다. 교육장에 부임해 교육지원청에서 한 달을 지내며 교육장의 자리가 얼마나 막중하고 어려운 자리인가를 느끼는 시간이었다. 이렇게 어렵고 바쁜 것이 '아직